마틴루터의 이신칭의
1517년 초엽 중부 독일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부 ‘요힌 테젤’(John Tetzel)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습니다.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려고 하였지요. 특유의 언변으로 테젤신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귀를 열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낳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재산까지 남겨주었건만 너희는 우리를 이 고통받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꽃 속에 우리를 그대로 놔둘 셈이냐?’ 여러분은 고통 받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릅니다.”
절절히 가슴을 파고드는 테첼의 웅변에 돌아가신 부모형제를 생각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주머니를 들고 테젤이 팔고 있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종이화폐가 보급되기 전이라 주화를 사용하던 때였고, 면죄부 구매에 돈이 너무 몰려 판매대 한쪽에서 주화를 찍어내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면죄부는 한 사람당 3마르크씩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환율로 따지면 약5,000원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보면 3마르크라는 금액은 매우 비싼 금액입니다. 아마도 몇 백만원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그 면죄부가 무엇일까요? 면죄부란 죄를 용서하는 대가로 돈을 받고 발행한 증명서를 말합니다.
교황과 성인은 잉여공적(즉 남아 있는 공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쌓은 선행과 공적은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잉여공적’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권한인가요? 그것은 바로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교황이 갖고 있는 이 권한은 죽은 자나 산 자를 ‘죄의 징벌’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천국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실로 막강한 권한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교황의 ‘면죄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면죄부가 16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황이 ‘면죄권’을 대대적으로 행사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군전쟁 때였습니다. 당시 신흥종교였던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술림들이 635년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나중에는 지금의 터키지방에 있는 동로마를 침공하려 하였고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기독교의 성지 탈환’과 ‘동로마 제국을 사수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으며 8번의 출정을 거쳐 1270년 종료되었습니다. 약 200년동안 무술림과의 전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황은 십자군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거나 살아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면제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십자군전쟁 때도 전쟁이 한창 진행되면서 엄청난 전비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때 돈 많은 거상이나 귀족들은 십자군전쟁을 위해 돈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비에 쪼들리던 교황은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고 돈만 내놓는 사람들도 면죄해 주었습니다. 교황의 면죄권이 돈과 결부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약 200년동안 잠잠해졌던 교황의 면죄권은 1500년대 들어서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모습으로 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알베르토 대주교에게 면죄부 판대대금의 이익금 50%를 주고 나머지 50%를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기금으로 마련하려고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여 준 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1516년 루터는 2차에 걸쳐서 면죄부가 잘못된 것임을 비난하게 되며 1517년 2월24일,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기 전 9개월전에 마11:21-24을 본문으로 하여 면죄부의 해악에 관하여 설교를 합니다. 이렇게 교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면죄부를 판매하여 알베르토 대주교가 50%를 가지고 나머지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려고 하였을 만큼 중세의 가톨릭 교회는 타락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95개 논조를 성당문에 붙이기 전 독일의 각 도시의 주교들괴 비텐베르크 교수들에게 보내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토론하기를 뤈하였지만 교황청이 두려워서 아무도 토론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테첼 신부의 면죄부판매 즉 면죄부 촉진을 위한 광고문구인 “동전이 돈궤안에서 소리를 내는 순간 그 영혼이 연옥에서 솟아올라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말은 성경과 위배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틴 루터는 매우 격분하였습니다. 루터는 97개 논조중 36조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 86조에서는 “오늘날 제일의 부자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교황 자신의 돈으로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루터의 95개 논조를 읽어보면 놀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가톨릭 신부로서 역할과 신분을 잊은 것이 아니었고, 교황의 권위와 권세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였고 연옥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아도 그는 분명히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의 잘못된 면죄부 판매 승인과 잘못된 구원관에 일침을 가하고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므로 해명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 교회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개혁이 그의 주된 관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절대 권력인 교황에 대항하였다는 괘씸죄나 반역죄가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면죄부판매보다는 왜 감히 내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력에 흠집을 내고 도전하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95개조 반박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한국교인들은 95개 반박문이 어떻게 기록이 되어있는지 잘 모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주의하여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인 천주교는 연옥을 가르치지만 면죄부는 팔지 않습니다. 면죄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지난 497년동안 천주교회가 단 한번도 정식으로 면죄부판매를 잘못하였다고 선포한 적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정식으로 천주교회가 하던 말던 그런 면죄부를 판매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있을 오명이 되었습니다. 사과를 받을 필요도 없고 그 죄과는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리지 않다는 에레미야(렘31:29)와 에스겔(겔18:2)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미 500년전 잘못은 이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는 천주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이단성여부는 떠나서 정말 개신교가 아니 프로테스탄스인 개혁교회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얼마나 청결하고 정결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천주교회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중 가장 믿을 만한 종교로 가장 깨끗한 종교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고 개신교는 가장 타락하고 더러운 종교로 치부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몇 가지 페이스 북에 올라온 개신교를 비난하는 글을 소개합니다.
1) “구교의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개신교를 만든지 500년이다. 지금은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으로 구교 가톨릭으로 신자들의 탈출이 이루지고 있다. 세계 최고의 아이러니다, 임현석 @imhyunsuk1”
2)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것은 결과적으로 큰 실수였다. 그의 시대에는 세상에 교황이 한 명이었는데 교황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맞서 싸워 교황을 무찌르고 개신교를 세웠더니 교회마다 교황이 한 명씩 생겨났다. FORCEKIM @loui14c "
3) 교황을 "적그리스도, 우상 숭배자라고? 변병탁 목사는 "과거 종교개혁을 한 이유는 종교적 악행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내부에서 이런 문제에 진성성 있는 사과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친, 지금 한국교회 모습을 보면 마틴 루터가 기절할 걸" 역사를 사랑하는 영어쌤. @ela3599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 개신교를 바라보고 있나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교인들이 밀물같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천주교는 교황이 단 한명이지만 개신교는 교회마다 한명씩 있다고 합니다. 또 마틴 루터가 지금 와서 한국의 개신교를 보면 기절초풍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 많다는 것을 저는 새삼 확인하였습니다.
실로 한국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중교 개혁이 일어나던 16세기 중세교회처럼 교회가 썩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천주교회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500년전 만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국의 천주교회는 교리가 문제가 있지만 타락과는 거리가 먼 깨끗하고 청렴한 삶을 사는 교역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 개신교회는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고칠 지 모릅니다. 한번 열거하여 볼까요. 교회와 세상과의 성속이원론, 믿음과 행위의 단절인 값싼 구원론, 문자적으로 치우친 빈곤한 설교, 무속적인 상업적 성령의 가르침, 구약에 치우친 성경 해석, 돈을 사랑하는 맘몬주의와 출세를 바라는 바벨탑주의, 쇼로 변질된 예배, 메가처지문제, 성전지상주의, 목사들만의 제사장주의, 아들과 사위에게 교회세습, 목회자와 성도간의 부적절한 이성문제, 당회, 노회, 총회와 교단의 문제점등 너무나 많아서 이루 말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물론 이 중심에는 목사가 항상 등장한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금년은 한국교회가 493회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왜냐하면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바르크 로마 가톨릭 성당 문에 95개의 반박문을 게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날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동안 약1,000년동안의 중세 암흑기 시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새로운 교회와 사회의 출현이 되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개혁의 중심에 바로 마틴 루터가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루터는 끝까지 신부의 자세를 잃지 않았고 천주교 사제로 남아있기 원하였습니다. 괘씸죄로 파문을 당한 것입니다. 잠깐 그의 생애를 뒤돌아 봅니다.
마틴 루터는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최단기에 학사학위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임명이 되었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내면의 있는 죄성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세 사회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적 공포와 불안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지요. 하지만 루터는 늘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에서 그는 철저하게 금욕적이었습니다. 욕정이 생길까봐 더운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종탑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였으므로 까진 무릎의 상처가 나을 날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옥캄”이라는 당시의 유명하던 한 신학자의 구원 사상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로를 쌓아도 구원에 확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사람으로 창조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을 미워하며, 시험에 들었습니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 슈타우피츠는 진정한 참회란 벌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슈타우피츠의 영향은 루터가 복음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12년 어느 날 그는 수도원의 탑에서 회심을 체험하는 “탑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고, 구원은 공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루터는 비탠베르크 대학교의 성경학 교수로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하면서 복음을 철저하게 재확인 했습니다. 그로부터 5넌이 지난 1517년 마틴 루터는 테젤 신부가 자신이 거주하는 비텐바르크 성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고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관할 구역의 대주교와 주교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복사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습니다. 이 날이 1517년 10월 31일로 종교개혁의 출발일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인 토론을 원했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루터가 원한 것은 교회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지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로마가톨릭 교회에 남아 있기 원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루터의 95개 논조에는 면죄를 할 수 있는 교황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면죄부가 연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대했고 그것이 진정한 회개를 위협한다고 믿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로마서 1:17의 말씀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1장 17절을 다같이 합독하기로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라 600년전에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이 이미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박국 2:4을 읽어야합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의 뜻과 전체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BC 7세기경 남유다를 침략한 이방민족 바벨론은 교만하고 불의하여 결국 망하고 패배하지만, 의인인 유대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왜 하박국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였을까요? 그 당시 유다의 나라 상태는 비참하였습니다. 유다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학대하며 사회에 온갖 부정과 비리가 만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인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들을 심판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결국 잠잠하시던 하나님은 이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는데 바로 자신들의 적대국인 이방국가인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하박국은 절망에 빠집니다. 왜 하필 유다보다도 더 패역하고 불의하고 죄도 더 많이 짓는 이방민족인 바벨론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심판하려고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바벨론을 잠깐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하지만 결국 바벨론은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남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합 3:17-18의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바벨론이 유다를 침범하여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므로 결국 가축들도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 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황폐한 상태에서도 하박국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유다가 하니님대신 바벨론에게 심판을 받지만 결국 하나님께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하박국은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박국이 말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괴롭고 슬프고 가난하고 배고파도 건강이 나빠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라가 침략을 당하여도 나라가 망하여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600년이 지나서 사도 바울이 동일한 구원의 원리를 알고 이제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인 이신칭의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헤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자신의 선한 행위와 공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즉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심지어는 천주교도 믿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교가 구원의 조건은 선행과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로마 가톨릭도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선행과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교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착한 마음과 착한 일을 하고 선한일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의 기뻐하고 의롭다고 칭찬을 받으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착하게 살려고 착한 마음을 먹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남아있거나 새롭게 생겨나는 나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씩이나 주임신부를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하며 자신의 죄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주임 신부가 귀찮아서 이제 제발 나에게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를 없앨 수 없어서 고민하고 고뇌하였습니다. 자신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는 로마서 1:17을 읽고 묵상하여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고 합니다. “의”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공의나 정의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해석하면 결코 복음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직접 사람이 되시고 결국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냄새나고 더러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지지고 볶고 살다가 결국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의“ ,즉 관계가 나타납니다. 우리를 위해서,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뿐인 예수 아들을 죽이면서 나를 살리고 나를 아들로 딸로 입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의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내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루터가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교황의 말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테젤 신부의 말처럼 동전을 연보에 넣은 순간 연옥의 불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의 십자가로 나의 죄가 모두 없어지고 나도 부활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영생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께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참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것, 아니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이 산재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오늘의 설교제목인 ‘이신칭의’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신칭의를 오해하여 구원파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구원파적인 믿음으로 한국 교회가 도배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하여도, 행위가 관련없는 삶을 살아도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심지어 살인을 하여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러므로 교회가 썩어가고 세상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착한 일을 하고 충성되게 봉사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으며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하면 믿음좋은 성도로 인정받아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는 선한 말과 행위는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구별되어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리어 세상사람들보다 더 타락하고 냄새가 나지만, 별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회개도 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로 뻔뻔하게 살아갑니다.
제 직업중 한 가지 일은 한국 회사를 방문하여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노무조건과 근무조건과 환경조건을 감사하고 진단하는 일을 합니다. 회사에 방문하여 실사를 하다보면 회사의 경영주가 장로요 안수집사인 것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사결과가 어떨까요? 장로님이 경영하는 회사가 좋은 근무조건과 환경을 제공할까요? ‘예’라는 대답보다는 ‘아니요’란 대답이 훨씬 우세합니다. 불신자보다 더 못한 근무조건과 환경과 여건을 제공하는 회사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산위에 있는 동네, 산위에 높이 위치하여 누구나 쉽게 구별하고 찾아가서 쉼을 얻고 평화를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 나와 나의 가족만 알 수 있는 숨겨진 동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등잔은 높이 걸어야 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여야 하는데 땅 바닥에 내려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단시일에 세계적으로 가장 빨리 부흥 발전한 한국교회이지만, 이제는 잘못된 이신칭의로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전락하였습니다. 사회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교회에 매우 많다는 말입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은 모르고 자신과 가족들만 잘 먹고 사는 사람들로 변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인 평화와 정의와 사랑이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자신과 가족의 부와 안정과 평화에 집착하는 기복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교회로 교인으로 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른 이신칭의 뒤에는 반드시 착한 행동과 말과 생각이 따라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착한 말과 마음과 행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그 마음에 계시기 때문에 비록 시간이 걸리지만 매일 매일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잘못한 행동과 말로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그러다가 육신이 약하여 넘어지고 쓰러져서 죄를 또 짓지만 마음이 아파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신앙의 진행은 단순한 일직선이 아니라 용수철마냥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면서 결국 몇 년, 때로는 몇십년이 지나다보면 변화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점진적인 구원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영유아기적인 위치적인 구원 아니 과거적인 구원에만 안주하고 현재와 미래적인 구원의 서정에는 등한시하면 살아갑니다. 왜곡된 구원관입니다.
우리가 루터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행위와는 관계없는 설교를 하고 논문과 책을 썼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비록 루터가 전체적으로 이신칭의를 주장하였지만, 95개 논조에도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요구합니다. 이 같은 선행이 중요하다고 43조에서 46조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오해하여 함부로 막 사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이신칭의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착한 행위가 뒤따라 오게 된다고 설교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루터는 1517년 95개 논조후 3년이 지난 1520년 세편의 유명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 ,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나중에 출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논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로 믿음에 관한 자유문제입니다. 둘째는 행위에 관한 자유문제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믿음 따로 삶의 행위 따로“ 란 생각이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간단히 이 책을 요약하여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루터는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면서 또한 봉사자다고 그는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한편 매우 자유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모순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섬기야 하므로 종이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믿음만이 구원을 받는 방법이라고 하며 다른 어떤 공적도 아무런 선행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행위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행위없는 믿음을 사는 크리스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 우리는 몸을 편히 가져 아무일도 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만족하리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 몽매한 사람들아! 그렇지 않다”
사람이 신지인지 불신자인지는 그의 행위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루터는 착한 행동이 착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착한 사람은 착한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수님의 말씀인 마7:18을 인용합니다. 루터는 선행은 이웃을 위한 사랑과 봉사로 하며 자유롭고 즐겁게 하여야 하며 결코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이웃안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루터는 이 논문에서 구원은 결코 선행이나 공적으로 얻어지지 않지만, 구원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선행을 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행과 공적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이요 열매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권사나 장로나 심지어 목사라고 하더라도 말과 행위가 올바르지 못하고 상말과 거친 말과 거짓말을 하면서 못된 행동을 일삼는 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잘못된 구원관을 가졌음을 깊히 회개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첫째, 마틴 루터가 성당문에 97개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면죄부 판매가 잘못되었으며 이런 구원은 참다운 회개로 이루어짐을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선행과 공덕을 쌓아서 구원을 얻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가졌으나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종으로 이웃을 위하여 도아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다시 한번 회복하여야 할 교리인 이신칭의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왕자와 공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삶과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가 온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 군사적인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주권, 즉 주인됨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네째로, 마틴 루터가 그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을 가르치고 주도하였다고 믿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루터이후 49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믿음따로 행위따로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슴니다. 올바른 이신칭의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부활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 믿음에는 받드시 의로운 행위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