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갖고 계십니까?(1)


< 본문 - 골로새서 3:5-11 >

 

  여러분은 그 동안 이사를 얼마나 해 보셨습니까? 저는 이사를 그렇게 많이 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이사를 한 사람들 심방을 갈 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이사를 하다보면 버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평소 생활할 때에는 집안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는 짐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데 별로 필요하지 않는 것들도 쌓아둘 공간만 있으면 쌓아둡니다. 특별히 저와 같이 버리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구석구석 별로 쓰지 않는 것들이 쳐박혀 있는 것을 봅니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2년 이상 한 번도 안 쓴 것은 평생 쓸 일이 없을 것이니 과감하게 버려라.’ 하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 쓸 때가 있을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제 때 제 때 버리지 않으면 쓰레기만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버려야 할 때가 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쓰는 물건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썩는 것인데도 버리지 못하고 남겨둔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주변에 곰팡이를 창궐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거나 상하는 것들은 유통기한을 두어 그 기간 안에 소비하도록 합니다. 그걸 잘 알기에 우리는 그렇게 썩거나 상하는 물건을 유통기간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방치하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유통기간 안에 소비하거나 유통기간 안에 소비하지 못한 것은 아깝지만 버립니다.

 

  쓸모가 없거나 못쓰는 것, 그리고 썩거나 상하는 물건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보다 더 빨리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육체에 속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얽매여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골로새서 3: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생명에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의 것 -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추구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엔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모습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모습을 두 가지 차원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못된 성품들입니다. 5절‘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못된 성품들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나쁜 습관들입니다. 8-9절에 새사람이 된 우리가 버려야 할 못된 습관으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그리고 거짓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습관보더 더 바꾸기 어려운 것이 성품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생각이나 성품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우리에게 그것을 버려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그 암덩어리를 제거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하는 것이 아프다고, 고생스럽다고 암덩어리를 계속 안고 있으면 수술의 아픔은 겪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는 나쁜 성품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암덩어리를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큰 아픔도 겪어야 하고, 또 그만한 수고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과 수고를 겪으면서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암덩어리를 없애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버려야 할 나쁜 성품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걸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피폐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6절 말씀에서는 그런 나쁜 성품들 제거하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나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바로 앞인 에베소서 2: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버려야 할 성품들을 버리지 못해서 다시금 그 진노 아래로 되돌아간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버려야 할 못된 성품 가운데 첫 번째로 ‘음란을 버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란(πορνεια)이라는 말은 우리 성경에 ‘음란 또는 음행’이란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종류의 부도덕한 성적 비행’을 가리킵니다. 매춘이나 간음 간통 등 모든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버려야 할 못된 성품 가운데 왜 ‘음란’을 가장 먼저 꼽고 있을까요? 그건 바로 그 음란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장 근본적인 죄악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성적 욕구와 무의식적인 성적 충동인 리비도(libido)가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적 욕구와 성적 충동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성적인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느 사회이고 타락한 사회에는 그 한 가운데 성적 타락과 성적인 문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죄악된 도시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도 성적 타락이 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노아 홍수 시대에도 성적 타락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건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성적인 타락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세기 6:2)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아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신앙인들마저도 타락한 세상에 물들어 성적으로 문란해진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적으로 타락해져 가는 세상을 향하여 성결한 삶으로 참된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적인 타락은 근본적으로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성적인 타락의 모습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근본인 마음부터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마태복음 5:2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에 있는 음란의 씨를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에 보면, 성적으로 타락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5:3)고 말씀합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미를 주기 위해서, 분위기를 위해서’ 등 어떤 이유로도 타락한 성적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코 마땅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성적인 타락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타락한 세상 속에서 음란한 마음과 생각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성품 깊숙이에 뿌리박혀 있는 음란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거룩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첫사랑의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음란의 생각과 마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버려야 할 못된 성품은 ‘부정’입니다. ‘부정’(ἀκαθαρσια)이라는 말은 ‘깨끗한 것’(καθαρσια)에 반대되는(ἀ)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더러움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삶을 더럽히고 추하게 만드는 모든 것과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더러운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세상의 더러움과 부정함에서 떨어져 나와 구별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 속에 더럽고 추한 것들은 다 버려야 합니다. 늘 깨끗한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늘 올바른 것만 추구해야 합니다. 늘 성결한 마음만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정함을 버리고 깨끗하고 성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함은 거대한 힘입니다. 우리 스스로 다스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힘을 빌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우리 안에 있는 더럽고 추한 생각들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려는 적극적인 신앙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걸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적당하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하면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결국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체의 열매만을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의 소욕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육체의 열매만을 맺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려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놔두면 우리 마음은 자꾸만 더러운 것에 물들어가고, 더럽고 추한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버려야 할 못된 성품은 ‘사욕과 악한 정욕’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욕’(πατος)이나 ‘악한 정욕’(ἐπιθυμιαν κακην)이란 말은 모두 ‘잘못된 것들에 대한 욕망, 허황된 갈망’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을 택하기보다는 악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는 데에는 무감각하면서 악을 따르고 악을 자행하는 일에는 아주 민첩합니다. 그래서 선하고 착한 것은 가르치고 배워도 잘 되지 않는 반면, 악하고 잘못된 것들은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참 천사 같고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 없습니다.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그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다릅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처럼 아이들은 선하게 자라기보다 악한 것, 못된 것을 더 빨리 배웁니다. 내 아이만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같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욕하고 욕심을 부리고 떼를 쓰는 것은 쉽게 배우고 금새 따라합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마음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들에 대한 욕망’(사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아이들만 그런가요?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들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되고 허황된 욕망의 노예가 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아무리 신앙의 훈련을 잘 받는다 하더라도 그런 세상적인 욕망과 헛된 갈망은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라고 하는 사도 바울도 이렇게 처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울부짖는지 아십니까? 그의 신앙 양심은 선을 향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고 싶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자꾸만 자신을 죄악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2-23)

   사욕과 악한 정욕은 자꾸만 우리를 죄 아래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는 정욕을 충동질하여 악을 즐기도록 유혹합니다. 계속 죄악이 주는 쾌락을 보게 만듭니다. 죄악이 주는 쾌락을 느끼게 하고, 만지게 하고, 듣게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그걸 찾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사욕과 악한 정욕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죄의 법 아래로 우리를 사로잡아 가는 사욕을 버리고, 죄악이 가져다 주는 쾌락을 즐기려는 정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해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4)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우리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건 분명 고통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욕과 정욕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버려야 할 못된 성품은 ‘탐심’입니다. ‘탐심’(πλεονεξιαν)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가져야 할 분량 이상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탐심이요, 내가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 역시 탐심입니다. 흔히 우리는 그걸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그 욕심이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적절한 욕심은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탐심이라는 것은 단순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도에 지나친 욕심, 그래서 그 욕심 때문에 우리가 비정상적인 마음이 되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살게 만들어버립니다. 탐심이라는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삶이 거기에 집중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공관병에게 비인격적인 갑질을 자행했다는 제2작전사령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분했습니다. 특히 그의 부인의 갑질이 더욱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인이 거주하는 공관에 냉장고가 9대나 있었고, 그 냉장고 안에 있는 과일이 썩어나갈 정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관병들에게는 사과 한쪽도 나눠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대문 밖에서는 버려진 거지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부자는 날마다 호위호식하며 잔치를 즐기며 삽니다. 집을 나설 때마다 그 거지를 보았을텐데 부자의 안중에는 배고파 죽어가는 거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9대의 냉장고에 과일에 썩어가는 데도 공관병에게 사과 한쪽 주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기도한들 그게 과연 신앙인의 모습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는 그에게 거짓된 욕심이 남아 있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모든 군인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난 달 20일에 전역한 이순진 합창의장에게 대통령이 캐나다 항공권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 큰 기사거리가 되었습니다. 42년 동안 군생활하면서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딸이 살고 있는 캐나다에 다녀오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대우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순진 대장은 창군 이래 처음 3사관학교 출신으로 합창의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화려한 이력 뒤에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공관병에게 갑질을 한 제2작전사령관과 달리 그는 아예 음식을 만드는 공관병을 원대복귀시키고, 그의 아내가 모든 살림을 직접 했고 음식도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2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폭설로 사단 관할 주요 도로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을 때 새벽에 제설작업을 하고 있는 부대원들을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찾아와서 직접 커피를 끊여서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생일을 맞은 병사들에게는 직접 손편지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 ‘순진 형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엄격한 상명하복 체계인 군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분은 그렇게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군인이었습니다.

 

  여러분, 탐심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탐심이 없는 것 아닙니다. 신앙을 갖기 시작한 순간 탐심이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우리의 마음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탐심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역할과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바로 서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겠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이나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서 얻은 진리는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너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소유하려는데 얼마나 많은 힘을 쏟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탐심을 이기는 방법을 시편의 말씀에서 가르쳐 줍니다. 시편 119:3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탐심을 이기는 방법은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서 있지 않으면, 탐심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여 말씀에 이끌려 살려 해야 합니다. 말씀에 지배되지 않는 한 우리는 탐심에 이끌린 삶, 탐심에 지배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옛 성품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는 못된 성품들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우리가 새사람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답게 사십시다. 그것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