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사사기(6)/사사

제목 : 첫 번째 사사 옷니엘

성경 : 삿 3:7-11

 

 

 

 

삿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삿 3: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삿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삿 3: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지금까지 살펴본 사사기 1장부터 3:6절까지는 사사기 전체의 배경을 설명하는 서론부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7-16:31절은 사사기의 본론부분으로서 사사시대의 범죄의 악순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각 지파의 구원자로 등장한 사사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을 편의상 소사사와 대사사로 나눕니다. 이것은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나누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를 어떻게 분류합니까? 그것은 기록된 성경의 분량에 따라 분류합니다. 이와 같이 대사사와 소사사도 기록된 자료의 양으로 구분합니다. 어떤 사사는 한절(3:31), 길어야 세절인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사사기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은 구원자가 아니므로 사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반사사’(the anti-judge)였습니다.

사사시대에 있었던 악순환의 고리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범죄⇒징계(압제)⇒회개(부르짖음)⇒구원⇒망각⇒재범죄>

사사기에는 이러한 악순환이 여섯 차례 반복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사건으로 첫 번째 사사 옷니엘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사사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마치 그 시작을 알리는 공식처럼 등장하는 멘트가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3:7, 4:1, 6:1)

여기 ‘악을 행하였다’ 하는 말에서 ‘악’ 앞에 관사가 붙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 악’(하라/히)이라 해야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그 악을 행하여..........’ ‘그 악’은 어떤 악입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악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아바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아자브) ‘그 악’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과 언약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전에 악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신들을 섬길 때 공공장소는 물론이고 산의 깊은 곳이나 신전의 내실에서도 제사와 같은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도 설마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여호와의 목전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목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범죄행위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유다나라의 정권 말기에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이 하나님의 성전 가운데 우상의 신전을 따로 지어 놓고 어두운 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겔8:1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을 뿐 아니라 이를 선지자 에스겔에게도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을 봅니다.

욥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시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 139: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시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섬과 우리가 선악 간에 행하는 모든 일을 은밀하게, 그러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살아야 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삿 3: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신 것입니다. 메소보다미아는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먼 나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동북부 시리아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먼 지역의 왕을 움직여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온 세계에 미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은 이 우주 가운데 어느 한 곳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은 범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세상 모든 나라에까지 동일하게 미칩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군주는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중 ‘리사다임’은 ‘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리쉬아’의 복수형이므로 구산 리사다임은 ‘죄들의 구산’, ‘범죄를 저지른 구산’, ‘이중으로 악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이름은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가를 암시하며 이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이름을 가졌다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붙여준 별명인지도 모릅니다. 압제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박해자였던 구산 리사다임 왕은 밉살맞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악한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구산 리사다임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움은 5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옷니엘의 스토리 가운데 그 이름이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이스라엘이 이중으로 악한 이방 박해자를 섬길 수밖에 없었음을 표현하려는 성경 기자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존 열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려 8년 동안 ‘이중으로 악한’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를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역전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못 본 척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사사 시대 초기여서 그런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여기에서 한 구원자는 ‘사사’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첫 번째 사사는 누구입니까?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입니다. 우리성경으로 보면 옷니엘은 갈렙의 아우이며 그나스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볼 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즉 ‘갈렙의 아우’는 옷니엘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스’를 수식하는 것입니다. 옷니엘의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보다 가장 어린, 즉 막내 동생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그나스는 갈렙의 막내 동생이다.’가 됩니다. 즉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옷니엘은 기럇 세벨을 점령한 대가로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하였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보통 사람들을 소개할 때는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두 번째 사사 에훗이나 삼갈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왜 옷니엘의 경우 그의 아버지의 이름 외에 큰 아버지 갈렙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갈렙의 지명도와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갈렙은 옷니엘의 큰 아버지이면서도 장인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이스라엘 건국 역사의 기둥과 같은 인물입니다. 신앙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입니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큰 아버지이며 장인이 되었던 갈렙의 영향을 옷니엘이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렙의 이름이 먼저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형제들이나 조카들이 여러분의 영향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신실한 신앙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토록 갈렙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구원자 옷니엘을 세워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여호와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하고 나서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모든 직분자도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세우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인 옷니엘은 이미 그 용맹과 신앙이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입증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준비하십시오.

온전히 여호와께 붙들린 인생

옷니엘은 큰 아버지이며 장인이었던 갈렙으로부터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용맹스러운 장군이 되었습니다(1:13). 그러나 사사기의 기자는 그가 그런 용맹이나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 때문에 위대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비결이 있었습니다.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즉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그가 메소보다미아 왕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즉 성령 충만을 받아야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8년간의 지옥 같은 노예생활 끝에 이스라엘에게 자유가 돌아왔습니다. 8년만의 자유 얼마나 달콤했을까요? 그 후 그들은 무려 40년 간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40년 동안의 태평한 생활은 원래 이스라엘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유를 남용한 결과 얻게 된 것은 자가 당착의 비극이었습니다. 자유를 상실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의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가지고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다가 자유를 상실하고 이중으로 악한 박해자를 만나 8년 동안이나 고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은 자유와 종노릇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누리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혹시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탐욕을 추구하다가 자유를 상실하고 구산 리사다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옷니엘 한 사람 때문에 40년 동안이나 태평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 받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복을 받고, 마을이 복을 받고, 나라가 복을 받으며 교회가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네 가지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1)없어야 할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입니다.

2)있으나마나 한 사람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입니다.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3)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4)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시대가 망하고 그 사람이 있어야만 시대가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께 온전히 붙들린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능력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