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사사기(36)/징벌

제목 :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전쟁(1)

성경 : 사사기 20:1-16

 

 

삿 20: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삿 20: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삿 20:3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삿 20: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삿 20: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삿 20: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삿 20: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삿 20: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삿 20:9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삿 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삿 20:1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삿 20:12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삿 20: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삿 20:14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삿 20:15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삿 20:16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우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흥분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결정, 더구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반드시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흥분된 마음으로 무엇을 결정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쩔쩔매게 됩니다. 기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면, 특히 과격한 일을 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사기의 맨 끝 이야기인 20장과 21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큰 싸움이 시작되는 원인

⎷4-6절

레위 사람이 ‘내 첩이 이렇게 죽었소!’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알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모여 기브온을 치려고 합니다. 기브온은 베냐민 자손에게 속한 땅이었기 때문에 베냐민 자손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내전입니다. 동족상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몇 명의 군대를 동원했습니까? 칼을 찬 보병만 40만 명입니다(2절). 어마어마한 숫자가 동원되었습니다.

⎷1)우리는 ‘이 싸움이 과연 필요한 싸움이었나?’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를 벌하는데 꼭 이렇게 대규모의 무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잘 설득해서 나쁜 짓을 한 불량배들을 처단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너무 크게 벌였습니다. 이것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들고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2)우리는 ‘이 싸움이 과연 지혜로운 싸움이었나?’ 하는 질문도 갖게 됩니다.

아닙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사사기의 부록 격인 17장부터의 이야기가 사사기 뒤에 있다고 해서 사사 시대 후기에 일어난 일로 여기기 쉬운데 아닙니다. 이 일들은 사사 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28절을 보면 이 때 제사장이 비느하스인데 비느하스는 모세 때의 인물입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성품을 지닌 청년이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직전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할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일어나 음행하는 사람을 처단한 일이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시대의 인물이 이때의 제사장이었다면 이때는 사사시대의 초기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사람이 ‘사사 때는 왕이 없어서 이렇게 혼란스러웠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사건들을 기록했는데 먼저 사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 이야기를 뒤에 놓았을 뿐입니다. 사사시대 초기, 그렇다면 아직도 정복해야할 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방부족의 침입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족을 치는 일에 이렇게 열을 올렸습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지혜로운 결정이 아닙니다. 40만 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와글와글 떠들다보니 군중심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흥분한 이스라엘

⎷8-10절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흥분해서 일을 무슨 결정하거나 일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는 것은 후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 흥분해서 큰 싸움을 벌여 베냐민 남자들의 씨를 말려 놓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아, 우리 지파들 가운데서 한 지파가 빠지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 사사기의 끝장인 21장의 내용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흥분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따지고 앞 뒤 계산을 하다보면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큰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햄릿형의 사람들이라고 하지요. 저질러 놓은 다음에 수습하는 것도 일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아무리 흥분이 되었어도, 당장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기도를 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일이 잘못됩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기브아를 칠 것을 결정하는데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레위 사람의 선동에 넘어가 대규모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결정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베냐민 자손 하나를 대적해서 싸우는데 연전연패합니다. 사십만 대 이만육천칠백 명의 싸움인데 두 번이나 대패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성소를 찾아가서 울며 금식하며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여러분 26절에서 28절까지를 보세요.

삿 20: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삿 20: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삿 20: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처음에 하나님께 물어보았어야 합니다. 싸움에 지고 나서야, 전사자가 4만 명이나 나고서야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몸이 아프면 처음부터 의사에게 가야지 제 마음대로 이 약 쓰고 저 약 쓰고, 몸이 더 나빠진 다음에야 의사에게 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미스바에 모였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물어보았더라면 하나님이 ‘너희들이 힘써 싸울 필요 없다. 내가 그들을 벌주마!’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사십만이 동원되어 싸우는 것 쉬운 일이 아니지요. 본문 10절을 보면 먼저 양식을 준비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힘 가지고 이방민족과 싸웠더라면 훨씬 더 유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나친 흥분 때문에, 선동 때문에, 군중심리 때문에 경솔하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결정을 하는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고 무엇을 결정하는 일은 없습니까? 그런 일이 없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나 이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까? 알려 주옵소서. 그렇다면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흥분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사십 만이 동원되어서 베냐민 자손을 치려고 나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집 부리는 베냐민

⎷12-14절

여기에 대해 베냐민 자손들은 또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고집을 부립니다.

누가 보아도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잘못했습니다. ‘아,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내드리겠습니다.’ 했으면 비참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맞서서 싸웁니다.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이 사십 만명, 베냐민 지파는 이만 육천 칠백 명, 자기보다 열다섯 배가 넘는 병력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상한 고집입니다.

이상한 흥분과 이상한 고집이 충돌했습니다. 그 결과 한 지파의 뿌리가 거의 뿌리가 뽑히다시피 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때때로 이상하게 흥분하고, 또 이상하게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로 마음이 매우 흥분될 때 ‘이거 지나친 흥분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싶을 때 ‘이거 지나친 고집이 아닌가?’ 살펴 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모세가 지나치게 흥분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도 될 것을 두 번 쳤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어제 내가 한 일 가운데서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고집을 부린 일은 없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냐민 자손들의 행동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자기 땅에 들어온 손님의 첩을 집단성폭행해서 죽게 만든 것은 대단히 악한 짓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지파연합군이 베냐민 자손들에게 통첩을 합니다.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됨이냐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합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러면 베냐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지파 안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부끄럽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법에 따라 처단하십시오. 혹시 허락한다면 저희가 직접 처벌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변명할 필요도 없고 옹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주 싸우러 나옵니다.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고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돌을 잘 던지는 사람들 칠백 명을 동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명사수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을 믿고서 베냐민 자손들이 대차게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죽기 전에 열두 아들을 불러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하나하나에게 말해 주는데 여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베냐민에 대해서는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49:27)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입니다. 라헬이 이 베냐민을 출산하고서 죽었습니다. 그런 베냐민인데 이렇게 험악한 말을 합니다. 오늘 베냐민 자손이 하는 일을 보면서 야곱의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베냐민이 왜 이렇게 나왔을까요?

⎷1)오기(傲氣) 때문이었습니다.

‘이 놈들 보아라, 말로 해도 될 것을 힘으로 밀어부처? 숫자로 밀어부처? 어디 해보자!’ 오기 부려서 유익할 것 없지요. 베냐민 지파는 오기 부리다가 동족들의 손에 의해 씨가 마를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습니다.

⎷2)잘못된 동류의식(同類意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입니다. ‘우리는 같은 지파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소년들은 같은 패거리끼리 똘똘 뭉치지요. 이것을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갱들,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쌉니까? 그들은 그것을 의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잘못된 의리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칩니다. 누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지역 사람인가 아닌가, 그가 우리와 같은 학교를 나왔나 아닌가 그것을 따집니다. 대단히 잘못된 기준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교회가 더 심한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 안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바르게 처리해야합니다. 그래야 공의가 삽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베냐민 사람들은 이상한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 지파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르게 처리했으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이런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네 안에 죄가 있다’ 하는 말에 대해 ‘그렇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죄가 제 안에 있습니다. 제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해야 하는데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 하거나 ‘죄가 있으니 어찌하란 말입니까? 그가 뭐 큰 문제가 됩니까?’ 하면서 버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냐민 자손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잘못된 동류의식을 버려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삼아야하겠습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의 처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