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사사기(33)/타락
제목 : 미가와 단 지파
본문 : 삿18장1절~31절
사사기 17장에서 21장까지는 사사기의 부록인데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어떻게 올라와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잡하고 끔찍한 내용들입니다. 쇼킹한 내용들입니다.
제사장을 돈을 주고 고용하고, 집단성폭행 사건이 일어나고, 시체를 토막 내고 동족상쟁의 잔인한 보복이 저질러집니다. 사사기는 이 모든 일이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왕정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단 지파의 타락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단 지파
⎷삿18:1
단 지파는 그때까지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민족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후손이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단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때가 있는데 그 때 단 지파는 중앙아시아 초원을 넘어 한반도로 왔고 거기에 임금 군(君)자를 붙인 것이 단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비슷한 풍습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 받아들일 수 없습니까?
‘한국은 영적으로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성경을 그런 식으로 끌어 붙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단 지파는 아주 못난 지파였고 저주받은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다른 지파는 다 정착하였는데 단 지파는 아직도 떠돌고 있었습니다.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다’고 했는데 사실은 분배 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에게 계속해서 밀렸습니다. 삼손이 단 지파 출신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부분적인 전투들에서 이긴 사사이지 전면적인 전쟁에서 이긴 사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운 살 곳을 찾아 북쪽으로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입니다. 단 지파는 우상을 숭배하는 지파입니다.
⎷31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오랫동안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단 지파를 저주 받은 지파라고 했는데 그 것은 요한계시록 7장 5절에서 8절까지 때문입니다. 이마에 인침 받은 십사만 사천에 대한 기록인데 유다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 계속 나오는데 단 지파는 빠졌습니다.
여하튼 ‘단 지파는 못난 지파이다’ 이렇게 기억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거기에 한 하나를 첨부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이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저주 받습니다.
⎷사사시대 타락상
17장에서 21장까지는 ‘끔찍한 내용이다’, ‘추잡한 내용이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성직(聖職)타락이고, ⎷또 하나는 성적(性的) 타락입니다.
17장과 18장은 성직 타락이고, 19장은 성적 타락입니다. 20장과 21장은 그에 따른 보복 이야기입니다. 성직 타락, 성적 타락, 이것은 그 사회의 바닥과 기둥이 무너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직은 매매될 수 없습니다.
미가가 자기 집에 신당을 차려놓고 떠돌이 레위 청년 하나를 제사장으로 고용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요. 자가용 제사장을 두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이 비슷한 일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 레위 청년은 ‘나는 고용된 제사장이다’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이 살 곳을 찾기 위해 먼저 정탐꾼 다섯을 보냈는데 이들이 미가의 집에 유숙했습니다. 거기에서 레위 청년을 만나 ‘당신, 어떻게 여기 왔소? 여기서 무엇을 하오?’ 물었습니다.
레위 청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4절을 보세요.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개역」”고빙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품삯 받고 일하는 제사장이다’ 이런 말이지요. 말을 바꾸면 ‘나는 품삯 받기 위해 일하는 제사장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런 것을 ‘삯군 목자’라고 하지요.
이 삯군 제사장은 단 지파의 정탐꾼들을 축복합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이것이 참된 축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엉터리 축복입니다. 이 레위인은 두둑한 사례를 바라고 이렇게 축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축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삯군 목자는 삯 조금 더 준다고 하면 얼른 주인을 버리고 새 주인을 따라갑니다. 이 레위 청년도 단 지파 사람들이 ‘당신 와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한 집의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을 하는 것이 낫지 않소?’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청년은 제사장으로서 기본을 못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직자의 기본의식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이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소명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이 있어야 영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이 있어야 성직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하실 때 이 시대의 성직자들이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를 섬기도록 보내주신 교역자들이 그런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과 타락에 빠졌습니다. 왕 중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질서 있고 정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상숭배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성직자들이 소명감을 갖고 일하도록 힘써 기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단지파의 편의주의
본문에 기록된 단 지파의 행동은 어디인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탐을 합니다. 정탐꾼들이 나가서 한 곳을 골랐는데 어떤 곳을 골랐습니까?
⎷삿18:7
⎷삿18:27
한마디로 해서 ‘만만한 곳’을 골랐습니다. 정탐꾼들이 라이스라는 곳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거기를 쳐서 우리 것을 만들고 거기에 삽시다!’ 하니까 단 지파 사람들이 ‘좋다!’하고서 무장하고 출발합니다. 라이스는 팔레스타인 북쪽, 요단강의 수원지가 되는 곳인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며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싸움에는 익숙하지 못했고 주변과 별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쳐들어와도 도와줄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정복하기 쉬운 곳, 만만한 곳이었습니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치기로 결정한 것, 대단히 못난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고 축복하지 않으시는 결정입니다. 원래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은 가나안의 서부 산간 지역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강한 힘을 가진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1장 34절을 보면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복해야 할 땅은 힘들다고 정복하지 못하고 만만한 곳, 정복하기 쉬운 곳을 고릅니다. 이런 것을 ‘이지 고잉(easy going)’이라고 하지요. 저는 오늘 ‘단 이즘(Danism)’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고 싶습니다. 단주의, ‘편하고 쉬운 곳을 골라 가지려는 단과 같은 심보’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단 주의자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고생스럽더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지켜 주시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단 지파와 정반대의 행동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갈렙입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갈렙은 일부러 힘든 곳을 자원합니다.
‘헤브론이 점령하기 힘들어요? 거기에 거인족인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거기에는 성읍들이 크고 견고해요? 나를 거기로 보내주세요! 내가 나이 많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들을 쫓아낼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수14:6~15)
갈렙은 헤브론을 점령하고 그곳을 자기 기업으로 삼습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갑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명의 길로 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요즘 세상은 단 지파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쉬운 곳, 편한 곳만 찾습니다. 그래서 3D 직종이 생기고 이공계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적어져서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단 이즘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많은 교회에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봉사하지 않아도 좋기 때문에, 뒷자리에 살짝 앉았다가 나와도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튼튼한 교회가 아닙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교인들 만 명보다 누가 누구인지 잘 알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서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들 천 명이 있는 교회가 더 튼튼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처럼 사는 사람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단이라고 바꿉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라이스는 북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와 같은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제일 북쪽에서 제일 남쪽까지’ 이런 뜻입니다. 단 지파는 여기에 신상을 만들어 세웁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단이라고 하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가라고 하시는 길,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가지 교훈
⎷1)우리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정탐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정탐꾼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열두 정탐꾼,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여리고 들어가서 라합의 도움을 받은 두 정탐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사기 1장에는 요셉 족속이 벧엘을 치기 전에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도 반역을 하기 전에 정탐꾼을 보내서 사전 공작을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을 보면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할 때도 정탐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흠잡으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탐꾼들은 참 중요하지요.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거기 형편이 이렇습니다.’ 하면 거기에 따라서 작전계획을 짭니다. 단 사람들이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서 무장한 사람 육백 명을 동원했는데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탐꾼들이 ‘거기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람들 아주 사납습니다.’ 하면 수천 명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이리로 가야합니다’ 하면 그리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복지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게 된 근본적인 원인도 정탐꾼에게 있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돌아와서 그 가운데 열 명이 ‘그 땅이 비옥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해서 우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잘못된 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정탐꾼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렇습니다.’ ‘이리로 가야합니다’ 하면서 바르게 이끌고 가야합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 정탐꾼은 못 된 정탐꾼이었습니다.
단 지파가 살 곳을 찾아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작 찾아낸 곳이 어제 말씀드린 대로 만만한 곳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평화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더 못된 것이 있습니다. 정탐을 할 때 미가네 집에 에봇, 드라빔, 새긴 신상,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뒤에 사람들에게 이것을 훔치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 마음먹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8절까지를 보면 이들이 앞장서서 그것을 훔칩니다. 도적질을 위한 정탐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교회는 이 시대의 정탐꾼입니다. 앞장서서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리로 가야합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알려주어야 합니다. 바르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 정탐꾼처럼 잘못 알려주어서는 안 되고 잘못된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2)우리는 무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라이스를 치러 올라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들려 그 집에 있는 에봇, 드라빔, 새긴 신상, 부어 만든 신상을 강탈합니다. 강탈한 다음에 ‘이런 것들은 우상이니까 안 돼!’하면서 파괴해 버렸다면 또 모르겠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가지고 가서 자기들이 살게 된 라이스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종교 강도짓입니다. 잘못된 신앙이고 무례한 신앙이지요.
⎷3)사이비 제사장과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나오는 미가의 집에서 고용된 제사장 생활을 하고 있던 레위인 청년은 ‘당신, 와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오. 한 집안의 제사장을 하는 것 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을 하는 것이 좋지 않소?’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 지파를 따라갑니다. 사이비 제사장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제사장이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해당되지 않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앙을 바꾸거나 교회를 바꾸거나 하는 것은 여기 나오는 사이비 제사장과 같은 짓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입후보자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일이 많은데 주로 교인이 많은 큰 교회에 등록합니다. 아니면 이 교회, 저 교회에 이중 삼중으로 등록합니다. 그런 사람들, 찍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정탐꾼에 의해 인도 받고 잘못된 짓을 한 단 지파는 결국 잘못된 길로 갑니다.
우리는 예의를 갖춘 신앙인, 자기의 유익을 이해 신앙을 바꾸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서야하겠고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정탐꾼 역할을 잘 감당해야하겠습니다.
30절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피해야 할 말이 하나 나옵니다. 어떤 말일까요?
“자기들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그 다음에 이웃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이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이 순서를 특히 잘 지켜야 합니다.
기독교를 고급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윤리적인 교훈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살 것을 권면합니다. 중급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에는 이웃의 개념이 없습니다. 굿할 때 이웃 잘 되라고 굿하는 것 보셨습니까? 저급종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신상을 세운 단 지파가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열왕기상 12장 27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로보암이 다윗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여로보암이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남 왕국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 그 마음이 남 왕국에 쏠릴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들의 신이라”합니다. 그 금송아지 둘을 어디 어디에 두었습니까?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29절) 단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단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곳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과 의미가 다릅니다. 단은 국토의 제일 북쪽입니다. 그런 점에서 단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토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우상숭배가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백두산 정상에 우상이 세워져 있다면 우리가 염려하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북한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입니다. 그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에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했다고 해서 백두산을 김일성 중심으로 ‘성역화’ 해 놓았습니다. 봉우리들의 이름도 ‘장군봉’ 또 하나는 ‘정일봉’ 이렇게 바꿀 정도입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는 좀 뒤에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필요를 아뢰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기도를 끝내야합니다. 주기도문의 기도순서가 모범적인 본보기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순서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시 30절을 보세요. 단 지파가 제사장을 세웠는데 누구를 제사장으로 세웠습니까?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을 그의 자손의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일부 사본에는 모세의 손자라고 되어 있지 않고 므낫세의 손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본문 밖에 보면 “또는 므낫세의” 이런 작은 글자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하면 옛날에 성경을 필사하던 사람들이 ‘모세의 직계 후손들이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일에 제사장 역할을 했을 리가 없다’ 하면서 좀 손질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권위 있는 주석이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글자는 손질하기가 더 쉽습니다. 므낫세는 아주 악한 왕이지요.
이때는 힘이 정의이던 시대였습니다. 21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서 미가가 새긴 신상, 에봇, 드라빔, 부어 만든 신상을 훔쳐 가지고 길을 갑니다. 북쪽 라이스를 향해 가는데 21절을 보세요, 이상합니다. 어린아이들, 가축, 값진 물건을 앞세우고 길을 갑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런 것들은 뒤에 두어야 안전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앞에 두었습니다. 미가가 쫓아올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미가가 쫓아왔습니다. 미가가 쫓아와서 항의를 하니까 단 자손이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라고 합니다. 점잖지 못한 말로 바꾸면 ‘살고 싶으면 입 다물어!’입니다.
미가는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갑니다. 26절을 역시 좀 점잖지 못한 말로 바꾸면 ‘찍소리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렇게 됩니다.
단 지파가 평화로운 성읍 라이스를 빼앗은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성읍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자기 지파의 이름을 따서 성읍의 이름도 단으로 바꿉니다. ‘내 거야!’ 하면서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 역시 힘이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습니까?
그 힘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단 지파처럼 힘을 멋대로 사용하면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이마에 인 맞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단은 빠져 있습니다. 그에 앞서 역대상 앞부분에 열두 지파의 후손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도 단은 빠져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저주를 자청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