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에 누군가 시 한편을 인터넷에 올려놓았습니다.
「정말 미안해」하는 시 입니다.
당신 향한 나의 사랑 한결 같지 못하여
정말 미안해
속상한 일 있어도 아무일 없는 듯 남몰래
삭혀야 하는데 당신에게 괜한 투정부려 정말 미안해 사랑의 눈빛 수다히 나누어도 아쉬울 짧은 생인데 종종 싸늘한 표정으로 당신 마음 아프게 해 정말
미안해
깊은
밤 곤히 잠을 자는 당신 모습 바라보며 앞으로 잘 해야지 늘 뉘늦은 후회
(정복연)
아름다운 시들도 많이 있었지만 왠지 소박한 이 시 한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쓴 것 같고 네가 쓴 것 같고 우리 얘기 같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창세기 강해 중 오늘 마침 창세기 2장 본문을 통해 「돕는 배필」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I.
결혼
오늘 본문은 인류 최초의 가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요성을 설교할 때 혹은 결혼주례에서 종종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공동체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입 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기도 합니다. 가정이 중요한가 교회가 중요한가?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가정과 교회를 분리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 건강한
가정들이 모여 건강한 교회를 만듭니다.
- 교회는
가정을 살립니다.
- 교회도
가정도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저는 30대에 50대, 재혼
부부 결혼 주례를 시작으로 수를 헬 수 없는 결혼 주례를 했습니
다. 결혼 주례를 하다가 꼭 한번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혼 서약을 마치고 축복기도를 한 후 성혼선포를 하다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결코 나누지 못할지니라」해야 하는데 「사람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이
결코 나누지 못할지니라」 큰 소리로 선포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킥킥대고 웃었지만 왜 웃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이내 눈치를 채고 이 가정은 하나님도 나누지 아니하신다고 얼버무려 넘긴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정 아담과 하와 결혼식의 주례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목사가
결혼 주례를 하지만 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것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례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 할 수만 있으면 교회에서 결혼을 하십시오. 서양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교회를 안다녀도 결혼과 장례는 교회를 통해
합니다.
- 일본은
기독교 문화는 아니지만 호텔안에 예배당을 꾸며놓고 거기서 결혼을 합니다. -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주례자도 없이 자기들끼리 편지 한장 읽고
식을 올리고 그걸 멋있는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못된 풍조입니다. 위험한 생각입니다.
아무튼 오늘 인류 처음 가정의
시작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저자는 1장에서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며 모든 관심을 하나님
한분에게 집중합 니다. 2장 4절이하에서는 하나님을 야훼
엘로힘이라 부르며 그 관심을 사람에게로 옮겨 갑니다. 야훼 엘로힘이 어떻게 인간을 만드시고 어떻게 그
인간을 우주의 주인공으로 세워 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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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마시며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생기를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영적교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 기도의 호흡,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성령 의 임재가 넘치는 예배, 하나님을 섬기는 행복, 사람을 사랑하는 기쁨... 등을 통해 우리는 생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II. 독처는 좋지 않아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형상, 즉 생기라면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을 섬기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행복한 관계를 깨뜨리면 안됩니다.
사람들과의 복된 관계를 깨뜨리면 안됩니다. 주어진 환경,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사 시킨 다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름 지어 보셨나요? 이름을 짓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리라 초등학교가 있어서 딸의 이름을 리라라고
지었는데 아버지 성이 고씨입니다. 곤란합니다. 우리나라에
노숙인이란 이름이 19명, 성이 예씨인데 이름이 수 예수 2명, 공무원 2명 성씨
빼고 총각 20명, 처녀
78명, 배테랑 6명, 방귀녀 7명, 강아지 5명, 고양이 1명입니다.
이름엔
∙ 특징이
잘 표현되어야 합니다.
∙ 이름의
뜻이 좋아야 합니다.
∙ 부르기에
좋아야 합니다.
∙ 이름 속엔 축복과 꿈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아담이 한참동안 신나게 이름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이름을
짓다 말고 대단히 중요한 무엇을 깨닫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번역이 이상합니다.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아담 자신에겐 짝이 없었다」
앞뒤 문맥이 잘 맞지요.
아담이 자기 앞에 나아오는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다가 문득 깨달아 지는게 있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에겐 암컷 수컷 짝이 있네. 그런데 왜 내겐 짝이 없지?”
이미 하나님께서 꼭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여기 성경상
최초로 좋지 아니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모든 창조 과정을 좋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 좋지 않다는 말은 나쁘다,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상적이지 않다. 미완성이다. 창조 목적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가정의 목적을 깨닫게 하고 짝을 맞아 들일 준비를 하게 하는 겁니다. 아내를 사모하며 기다리게 한 후에 이 소중한 선물을 허락합니다. 소중
한 것일수록 그 소중함을 깨달은 다음에 얻어야 진짜 귀한 줄을 아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간을 「사람과 사람사이의 존재」라고 해석했습니다.
∙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 남자는
여자와 더불어 살고 여자는 남자와 더불어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는 안됩니다.
∙ 사람은
가족과 더불어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 사람은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아담이 자신의 짝을 몹시 사모하며
기다리던 어느날 짝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 짝을 성경은 돕는 배필이라고 부릅니다. 바라는 배필 혹은 기대하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기대하는 배필로 살면 불행해 집니다.
언제 돕는 배필 하와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유대문헌 여러 곳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몸 하나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이 사람을 재워놓고 하나님께서 분리수술을 하셨다는
겁니다.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설명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또한 히브리 문법적으로 창세기 1장에서 아담(사람)을 부를 때 정관사를 붙여 “그
아담,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처음 지으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있던 그 모습을 일컫는다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몸으로 있다가 분리수술을 통하여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었다는 퍽 재미 에 있는 상상입니다. 그 근거도 일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아실 일이지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기독교 전통에서 믿어온 대로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마 그게 사실일 겁니다.
히브리어 에제르를 우리말로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할 때 여자는 단순히 남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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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에제르라는 말이 신약 성경 성령님을 일컫는 보혜사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에제르는 35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우신다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다”라고 할 때 이 도움이 에제르입니다.
하나님께만 사용되던 이 단어가
부부관계 사용되었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그만큼 부부관계는 신비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의 존재 – 천사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의 에제르를 나름
번역해 보면 “서로 도우며 함께 하는자”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그를 위하여」 케네게도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 그와는
반대되는 에제르
∙ 그와
동등한 에제르
∙ 그의 앞에 있는 에제르
∙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에제르 등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모자랍니다. 남자도 모자람이 있고 여자도 모자람이
있습니다. 서로 돕고 함께 하므로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함께 이루어 가도록 남자를 만들고 여자 를 만드셨습니다.
- 남자와
여자는 성적으로 서로 다르죠. 아니 전혀 반대로 지어졌습니다. 서로 보완하여 자녀를 얻고 생명을 이어갑니다.
- 서로
다른 이 모습을 통해 서로를 사모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기쁨을 가정안에서 누립니다.
- 부부는
대게 성격적으로 또 능력면에서도 서로 보완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섬세하고 제 아내는 동선이 큽니다. - 특별히 부부는 영적으로 서로 보완관계에 있습니다. 시험이 들어도 둘이 함께 넘어지면 안됩니다. 넘어진
한 사람을 한 사람이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부부가 둘이 함께 시험들어 드러누워 있으면 돕는 배필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는 너의 배우자의 약점을 얼마나 채워주었느냐?”
“너는 너의 남편의 아픔을 얼마나 감싸 주었느냐?” “너는 너의 아내의
꿈을 얼마나 세워주었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 그래서
가정은 최고의 선교지입니다. 가정 선교사역에 성공해야 합니다.
- 최고의
목회지입니다. 가정목회에 역시 성공해야 합니다.
- 가정은
아픔이 치유되는 최고의 병원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주 안에서 독신으로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신의 은사가 있어서, 주님의 일을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고
주님의 사역에만 집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혹 결혼의 의사가 분명하나 하나님께서 아직 짝을 허락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혹 사별, 이혼 등으로 홀로 되었으나
재혼의 기회를 아직 갖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분들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고 친히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런 분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 하십니다. 나이들은 분들이나 홀로 사시는 분들을 함부로 대하면 아니 됩니다. 독거노인들에게
매주 반찬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반찬나눔사역자는 그런면에서 근사한 사람들입니다.
또 홀로 사시는 분들이 유념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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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불같은
정욕을 잘 다스릴 수 없으면 혼인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 카도릭교회는 결혼이나 부부간의
성생활을 신성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회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결혼이나 부부 생활을 하나님이 만드신 신성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듯이 거룩한
마음으로 가정을 섬기고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을 섬기는 것은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성직입니다.
더구나 독신을 제도화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독신을 결혼생활보다 더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사고입니다. 교회만큼 거룩한 것이 가정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실 때는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제 여자를 만드실 때는 이미 만드신
남자를 재료로 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항상 남자의 관심사는 땅 즉 세상사입니다. 여자는 사람으로부터 만들어 졌길래 항상 관심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재료부터가
고급입니다. 피조물 중 마지막 작품으로 최고의 작품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이러한 표현을 신학자들은 신화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신화”라고 하면 오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만 여기 신화는 단군신화하는 그런 신화와는 다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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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서 35번정도 등장하는 히브리어의 첼라는 우리 번역처럼
갈비뼈라고 할 수 있지만 옆에서 즉 옆구리라는 뜻도 되고 파트(part) 한 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 우리번역에서도 오늘 본문 외엔 대부분 옆구리 혹 옆이라고 번역됩니다.
유대인들은
하와를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말을 재미있게 이해합니다. ∙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머리뼈로 여자를 만드셨다면 여자가
남자를 다스리며 살았을 것이다. ∙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발가락뼈로 여자를 만드셨다면 남자는 여자를 종으로 부리며 살았을 것이다. ∙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눈알로 여자를 만드셨다면 요염함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다. ∙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입으로 여자를 만드셨다면
여자는 온종일 집에 앉아 재잘대며 말만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
갈비뼈로 만드셨습니다.
-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동반자로 지어졌습니다.
- 하와는
아담의 중심부에서 나왔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중심으로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남자의 옆구리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 있을 때 제일 편안하고 행복하답니다.
그곳이 여자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분들, 가끔 한번씩 남편을 안아주며 고향행진곡을 불러 드리세요.
♪ 나의 살던 고향은 당신 갈빗뼈.
또한 갈비뼈는 몸의 중요한 기관을
감싸고 있는 뼈입니다.
갈비뼈가 부러져 장기를 찌르면
큰일 납니다.
- 혹
여자를 폭행하는 인간은 자기 갈비뼈를 부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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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암탉 울리면 집안이 망한다는 뜻입니다. 집안 잘 되려면 암탉 울리지 마세요.
- 여자가
상처를 입으면 남자의 내장기관이 다칩니다.
- 여자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아픕니다.
남자 여러분 두 손을 쇠사슬로 묶어서라도 여자를 때리면 안됩니다. 자기 옆구리를 걷어차는 겁니다.
여자분들 기억하세요.
나는 가정의 갈빗대다. 우리가정을 지키는 울타리다. 갈빗대가 장기를 보호하듯 식구들의 영혼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신앙과
가치관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는 방법은 참 신비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재우십니다. 요즘말로 말하면 전신마취를 시킵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여자 즉 잇사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남자로부터” 그런
뜻입니다.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여자를 만들고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자가 죽었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시니” 죽었다는 말입니다. 서로 죽어야 가정이 삽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죽으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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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 왜
순종이 아니고 복종일까요? 이 땅에 순종하고 따를 만한 남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존경할게 있어야 존경하지요. 아닙니다. 내가 나온 갈비뼈 주인인지라 존경하는 겁니다.
제가 요즘 결혼 주례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예화 콜롬비아 신학
대학장 맥킬킨 의 얘기로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그의 아내 무리엘이 치매에 걸립니다. 병원에 맡길 수 있습니다. 간호사를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돌보기 위해 학장, 교수직을 내려놓고 가겠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만류합니다. 모든 교수들이 말렸습니다.
교수직은 누가 합니까? 학장직은
누가 감당합니까? 사모님은 병원에서 돌봐 드릴 것입니다. 그때
맥킬킨 학장이 그렇게 말합니다.
지난 40년 내 아내가 나를 돌보았듯이 이제는 내가
내 아내 무리엘을 돌봐야 할 때입니다. 교수직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학장직은 다른분이 더 잘 감당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치매로 고통받고
있는 무리엘의 남편이 되는 것 은, 남편으로서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무리엘의 곁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