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분은 :『부활 생명』 (요한복음 11:17-27)


몇 해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해부용 실험 대상으로 기증하겠습니다.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랍니다.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내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는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유는 심리학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죽은 다음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가서 살게 될 내세의 천국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왜 나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필이면 왜 이 죽음이 지금 나한테 오는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자기만큼은 좀 더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지금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요, 무서운 원인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지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요 개신교 신학자인 John Calvin은 "사람은 죽을 때의 모습에서 그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특별히 '죽음의 사자가 잡으러 오느냐?' 아니면, "하늘의 천사가 모시러 오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두려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게 하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것은 잠시 잠든 것과 같다고 아주 쉽게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스토리 내용이 무엇입니까?

팔레스타인 베다니 마을에 아주 불행한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은 소위 소년소녀 가장이 이끄는 불쌍한 집이었습니다. 두 여동생을 데리고 살았던 나사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 가장 나사로가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과로해서 죽었든지, 못 먹어서 병들어 죽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뒷동산에다가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이런 슬픈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11절).


예수님은 여기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유대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 9:24).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께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깨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죽음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였으므로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사도들은 그가 죽었다는 절망적인 표현대신, 편안히 잠들었다고 보도해줍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초연한 입장을 취하는지요!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잠시 잠깐 동안 잠자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특히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우리 신자들이 맞이할 복된 부활을 이렇게 멋지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다 잠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동묘지(cemetery)라는 헬라어는 원래가 "잠자는 동산(sleeping place)"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잠시잠깐 동안 땅 속에 잠들어 있다가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은【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중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여기 부활과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오, 예수님 자신이 곧 부활 생명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죽음의 정복자이십니다.

죽음을 정복했다는 것은 죄와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구원, 완전한 해방, 완전한 정복, 완전한 자유, 완전한 축복을 말합니다.


1. 절대『능력』입니다


사실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만 사흘이나 지나고 있었습니다. 벌써 장례를 지낸지 나흘 째 되었습니다. 그가 병에서 회복되거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현실이었습니다(17절).

병든지 나흘이 아니라, 죽은지 나흘째나 되었다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는 것입니다(11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이동생 마르다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십니다(23절).

『너희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한 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병들었습니까? 고치시면 됩니다. 다쳤습니까? 낫게 하시면 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풀어주시면 됩니다. 잃은 것이 있습니까? 다시 찾아주시면 됩니다.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참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 살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건강이나 회사나 사업에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까?

다시 일으켜주시고, 다시 돌려주시고, 다시 갚아주시고, 회복해주시며, 일으켜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의 정복자이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절망적인 문제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4절).

오히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입증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에는 시간도, 방법도, 대상도, 전혀 제한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죽을병도 고치시고, 무너진 사업도 다시 일으켜주시고, 깨어진 인간관계도 다시 회복해주시며, 없는 아이도 생기게 하시고, 무엇이든지 가능케 하십니다.

원래부터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래를 통해 수많은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는 결혼한지 20년만에 쌍둥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무자한 불임여성이었으나 하나님이 생명의 문을 여시니 다섯이나 더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너무 늦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알맞은 바로 그때에 결정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너무 빨리도, 너무 늦게도 오시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더디게 역사하는 것 같으면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고쳐주신 것보다, 죽은 후에 살려주신 것이 훨씬 더 큰 기적입니다.


2. 절대『신앙』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자기 표명 일곱 가지 중에서 오늘 본문의 선언이 가장 위대한 선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여기서 믿음을 너무나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25-27절을 통해 네 번씩이나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절대 능력에 대한 절대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의 신앙적 발전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마르다는 머리로만 인정하는 지적 신앙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22,24절)《I know》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자기 표명의 말씀을 듣고는 대단히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I know에서 "I believe"로 발전한 것입니다.

지적 신앙에서 가슴의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정적 신앙에서 동적 신앙으로 발전한 것이요, 이지적 신앙에서 의지적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나 되었어도 다시 살아날 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절대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신앙고백이 분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205장)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는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만이 아니라,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 10:9)


⸂『영생복락』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축복됨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기시켜줍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낮은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합니다. 약하고 병든 몸이 건강하고 튼튼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땅에 속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이 세상의 육신적 몸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부활합니다.

한 마디로 영생 복락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원 형벌로 부활하게 되니 더욱 불행합니다.

기독교는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불멸 정도가 아닙니다. 영생 복락입니다.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이런 신앙고백을 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the everlasting life)을 믿습니다."


⸃『보상』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철저한 보상을 보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결론에서 이 한 마디로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그렇습니다.

희생이 있으면 회생이 있습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고 크게 보상하십니다.

당신의 헌신과 희생과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미래의 신앙이자, 동시에 현재의 신앙입니다. 그 부활의 신앙은 먼 훗날, 마지막 날에 대한 막연한 추상적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지금 나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승리의 삶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소위 부활신앙의 미래성과 현재성입니다.

부활신앙이란 현재 살아있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일화를 생각할 때 이 진리는 더욱 명백해집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거센 세력과의 싸움에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위협이 가중되고, 일이 점차적으로 더욱 힘들어지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의 체념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의기소침하여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완전히 탈진한 듯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그를 지켜보던 부인은 무척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가 쭉 빠진 채 서재에 틀어박혀 앉아있는 루터 곁에 상복을 입은 아내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 누가 죽었소?"

『예,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요?"

그때 루터의 아내는 이처럼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계시다면, 오늘 당신이 이렇게 맥없이 앉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나님이 죽으시다니…』

오늘 우리의 신앙도 다시 살아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초상집에서 잔치집 신앙으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오늘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둠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곁에 생명의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지금도 당신을 일으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의기소침과 낙담과 좌절과 실의와 패배와 삶의 의욕상실과 무력감에서 당신을 치유하시고, 회복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이야말로 살아있는 신앙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산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인 부호 존 록펠러에게도 한 때 큰 위기가 닥쳤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손댔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나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그는 황량한 폐광 현장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시오."

그는 계속 통고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여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거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전혀 뜻밖으로 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은 오늘 내 곁에 살아 계셔서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믿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나는 믿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오늘 아침【예수님의 약속】한 마디를 첨부해 드리고 싶습니다(40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는 새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초청) (생 165장 / 살아 계신 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을 초연하여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까지도 정복해주신 부활 생명이십니다.

우리 주님께는 죽고 사는 문제까지도 아무 것도 아니니, 우리에게는 오직 절대 신앙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시간도, 방법도, 대상도, 전혀 제한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죽을병도 고치시고, 무너진 사업도 다시 일으켜주시고, 깨어진 인간관계도 다시 회복해주시며, 없는 아이도 생기게 하시고, 무엇이든지 가능케 하십니다.

더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늘 내 곁에 살아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렇게 보장해주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