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증인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32)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사도행전 3:14~15)



할렐루야!
죽음이 끝이 아님을 확실하게 한 부활주일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2월에 이탈리아 신경외과 의사 ‘세르지오 카나베로’가
‘전신이식’프로젝트를 공개했습니다.
‘전신이식’이란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에 죽은 사람의 몸을 붙여,
뇌에서 척추, 사지의 뼈까지 수천 개의 신경계를 연결하여
새생명을 탄생시키겠다는 구상입니다.
< 헤럴드경제, “전신 이식 수술도 2년 내 가능” 2015.02.26. 기사 >

하지만 그런 기술들이
인간의 생명유지 기간을 조금 늘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믿음으로 이미 예수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에 …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증인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며 했던 설교들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증언’이란 ‘증인’이 하는 진술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증인(證人)’이란 “있는 사실·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 위키백과, ‘증인’ 2015.03.11. 참조 >

증인은 ‘진실된’ 증언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그 증언이 위증일 때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거짓증언을 하게 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합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위증죄 [perjury, 僞證罪] (두산백과) 2015.03.11. 검색 참조 >

거짓 증언은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죄인을 죄 없는 자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 증언을 엄히 금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잠 19:9)


거짓 증언이 무서운 것은 증언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삶을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1월에 미국 CBS에서는 두 사람의 비극적인 만남을 보도했습니다.
언론에서는 감동적인 만남이었다고 했는데 저는 비극적인 만남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잭슨(57)이라는 사람이 1975년 5월 클리블랜드에서 구멍가게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2명의 친구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증인으로 12살이었던 에디 버넌(52)이 섰습니다.
당시 버넌은 현장이 아닌 인근 스쿨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경찰의 말을 듣고 잭슨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봤다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배심원들은 버넌의 증언을 토대로 잭슨 등 3명에게 사형 선고를 했고,
그 뒤 그들은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런데 버넌은 오랜 세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한 목회자를 만나 비밀을 털어 놓았고, 잘못을 인정할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 11월 클리블랜드 법원에서 …
버넌은 자신의 증언이 거짓이었다고 밝혔고, 잭슨은 무죄방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주 뒤 그 둘은 교회에서 만나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뉴시스, 39년 억울하게 옥살이한 美 남성과 위증한 '증인 소년'의 화해에 '감동' 2015.01.10. 참조>

12살 이었던 한 소년의 거짓 증언으로 한사람의 인생 39년을 허비하게 만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증인은/증언은 이렇게 무서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 모두에게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증인된 우리는 증인으로써 진실된 사실을 말할 책임이 있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잠 21:28)


우리는 확실한 것만을 증언해야 합니다.
증인이 되어 증언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것을 보거나 들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보았거나 … 들었거나 … 하는
확실한 ‘체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정확히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증인이 되어 쉽게 판단하여 말하고 쉽게 행동합니다.

제가 감독을 지내면서 여러 서류에 도장을 찍을 일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일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서류가 있기에 담당자를 불러서 확인해 봤습니다.
자기가 본 적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서류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하고 말합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의 기분과 선입견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오래 전 독일에서는 고학생(자기가 돈을 벌어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붙잡히게 됐습니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 네이버블로그, 한태완의 설교예화자료집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자” 참조 >

우리는 직접 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
직접 보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따른 상상으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에 루터가 도망치면서 잡히지 않았다면
그에게 공부할 돈을 주었던 자선가를 평생 나쁜 사람,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 지금 닥치는 고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떠납니다.

하지만 지나보면 오히려 그 순간들이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슴으로, 말씀으로, 체험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고 간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구의 증인인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 경험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보고 체험한 것에 대한
정확한 분별과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 2:22)


당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직접 보았거나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경험하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 2:23)

“…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현재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fact)’를 놓고
많은 언론들은 자기 기준에 따른 해석으로 다른 기사를 내놓습니다.
우리는 어느 사건과 사실을 경험했을 때 그 의미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그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분별력도 있어야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신문을 3종류를 봅니다.
하나는 집으로, 두 개는 교회로 배달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있는 뉴스도 확인합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어떤 관점에서 보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보고 잘 판단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보면 그 기사의 생각대로 제 생각이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선택을 한 왕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찾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지어준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왕상 12:4)

그는 시간을 달라고 한 후, 두 그룹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 그룹인 나이 많은 사람들은 백성을 섬기라고 조언을 했고,
다른 그룹인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욱 무거운 멍에를 지우라고 말했습니다.

르호보암은 나이 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어린사람들의 조언을 따랐습니다.(왕상 12:6-11)
그 결과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가끔 나이 많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잘 안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제 아버님이 몸이 불편하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습니다.
그 병원 화장실에 갔다가 너무 좋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을 잃는 것은 큰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
세월을 많이 사신 분들이 그동안 살면서 얻은 지혜와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잘되는 경우를 못 봤습니다.

르호보암도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자기 기준에 맞는 젊은 신하들의 이야기만 듣다가
나라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때
내 판단이 과연 맞는 것인가? 옳은 것인가?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옛날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던 사람들만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도 만일 예수님시대에 같이 살았다면 …
예수님을 죽이라는 편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날 밤 …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마 26:75)
그날 밤 여러분이 베드로 옆에 있었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집권하면
뭔가 큰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 세상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 왕이라 믿었던 …
세상을 구원할 분이라 믿었던 …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사랑의 ‘성취’되었다는 것이
부활을 통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부활사건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충격적인 사실 앞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사건 앞에
‘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 믿으려고 결심한 사람은 정말 안 믿습니다.
안 믿으려고 결심한 사람은 예수님의 삶이 /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믿습니다.
‣ 성경의 증언이기도 하지만 …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 초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 믿으려는 사람은 안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침에 일찍 가서 만나려고 했던 여인들은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인들이 무덤을 착각해서 잘못 찾아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여인들은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고(눅 23:55)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부활하신 후, 40일간 11번이나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고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 열린편지, 섬기는 언어,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2010.04.08.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예수 믿는 우리는 모두‘예수님’의 증인이요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

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28:19~20)


명령이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마태복음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에서는

“…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6~48)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기록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절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대 …’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오늘은 130년 전 오늘, 인천 앞바다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날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을 전하던 토마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우리가 지원하는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하정화선교사도
복음을 전하던 선교현장에서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 부활의 증인으로 … 증인답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증거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