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의 한국 남성이 폐암 말기로 투병 중인 44세의 중국 여성과 결혼 스토리가 인터넷 상에 퍼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태씨는 2년 전 사씨를 만나 교제하기 시작했고, 사씨는 중국에서 사업을 벌인 태씨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그에게 힘이 돼 줬습니다. 그러던 작년 10월 사씨는 날로 심해지는 등 부분의 통증을 느꼈고, 자주 먹던 진통제도 효과가 없자 중국과 한국 병원을 모두 찾아 검진했고, 결국 11월 폐암 말기로 진단받았습니다. 그러나 태씨는 사씨를 더 극진히 보살폈고 태씨는 사랑하는 연인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고 의미있는 선물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기 마련이고, 아내는 저보다 조금 일찍 저 세상으로 간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라면 나는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면서 태씨는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병상에 누워 있는 사씨에게 다가와 '결혼해주세요'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멋진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사씨의 병세가 악화된 지난달 17일 신부가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상태여서 신부는 휠체어에 앉아 입장했고, 결혼식도 30분 만에 끝났지만 그 결혼식은 국경과 생사를 뛰어넘은 순애보로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 주 동안 각자가 받은 가장 의미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다양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줄 압니다. 각자의 선물 스토리를 적어 오늘 상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22일에 있는 성탄 축하의 밤에 푸짐한 선물을 드릴 예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요?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advent season 즉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약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는데 과연 하나님의 때에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성탄절의 초점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성탄절에 맞이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지난주에 이어 좀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으나 특히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의 내용, 그분이 하신 말씀 뿐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모두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자마다 강조하는 메시지가 다릅니다. 마태는 마태대로, 마가는 마가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족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밝힙니다. 마가복음은 서두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며 특히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누가가 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아담. 그런데 요한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처럼 예수님의 기원을 따지는 족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도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0:30-31에 보면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특정한 사건들만을 선택하여 적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사역을 예언하였는데 그것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언급함으로 예수님이 오시리라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명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메시아가 오셨음을 인정합니다. 요 6:14을 보면“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또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똑같은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요 5:17-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계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태초이전부터 계신다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며 과거에 완료되지 않은 영원한 존재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신데 장차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주의 깊게 볼 표현이 있습니다. 이사야 9:6에 보면“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For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아기는‘태어난다’로 표현하고 아들은 ‘주어진다’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사야가 예언한지 700년 후에 메시아로 오신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고 아들이 ‘주어진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사 9:6b).
그 다음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은 모든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선택하였습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 ‘pros’는 정적인 공존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향하여’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태초 전에 계실 때 활발한 교제를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정도로 친밀하였고 영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과 다이나믹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곧’은 접속사로 ‘다시 말해’의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예수님의 신성 즉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시는 유일한 분으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느끼시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기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궁금하게 할 셈이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이미 말했어도 너희는 믿지 않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이 일들이 나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않는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대인은 보낸 자와 보냄 받은 자가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니 예수님과 성령은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입니다. 보낸 자가 보냄 받은 자가 하나라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묻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10:33)고 대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아들이 주어졌는데 그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강이 되고 소망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분은 하나님 자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고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인하여 새로운 확신을 가집니다.
차의 트렁크 뒷면에 이런 심벌을 붙인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ΙΧΘUS”무엇을 나타냅니까? 그 심벌은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지만 특별히 성탄절의 의미를 잘 요약해줍니다. 계속되는 로마의 박해 속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들로, 광야로, 카타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인지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을 때 이 심벌은 기독교인임을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ΙΧΘUS’는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진리를 담고 있는 약자가 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이야기 합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I” (iota)는 Iesous 즉 Jesus를 가리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말합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X”(chi)는 Xristos, 즉 Christ를 가리킵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Θ” theos, 즉 God.
“U” ύios, son. 두 단어를 연결하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S”는 soter, 즉 savior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초대교인들이 믿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입니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으로 오신 그분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는‘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결국 말세에 오시기로 한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구주로서 죄의 징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보혈의 능력을 통하여 영생을 주신 분입니다. 이 물고기 심벌을 볼 때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의식하셨습니다.
· 열두 살 때에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눅 2:49-50).
·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요, 예수님께서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는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 맡겨진 구원 사명의 막중함, 자신의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만족 등을 확신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례식은 메시아 임명식, 혹은 메시아 즉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산상수훈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과 같은 권위에 두시면서 구약의 말씀에 당신의 말씀을 더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1-3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 전부터 계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어찌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표준, 요 10:36)
· 장차 능력과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마 25:64)
* 구원의 선물을 받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1) 임마누엘의 주님을 붙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죽음을 뜻합니다. 인간들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과학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적 기원을 지닌 예수님이 태어나심으로 일차적으로 그 약속이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 미래에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성취될 것입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신비적인 사건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예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이 예수님 안에 충만히 거하심을 의미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알려지신 예수님은 28장 20절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심으로써 임마누엘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 소개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 상태가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표현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에녹은 그의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냄으로 참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삶이 복을 받습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나,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이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인지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게 되면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여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있고 언제 어떤 사고가 우리에게 어떻게 임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어려운 때에 살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에 고난을 피하게 하시든지 극복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임마누엘의 의식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문제가 있고 대적이 있어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소망과 용기를 가집니다.
2) 주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주님을 붙들려면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로고스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적 존재이자 창조의 중보자, 계시의 중보자입니다. 로고스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서 참 지식과 구원의 가능성을 이 아래 세상에 열어놓은 사건입니다. 신성을 지녔고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로고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왔기에 이제 우리가 이 아래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가 베푸시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즉 복음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진리를 힘써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힘써 읽고 배우고 이해하고 암송하면서 그 말씀에서 사로잡히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신년도 달력이 성경통독 달력입니다. 내년에는 성경을 통독할 뿐 아니라 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하도록 합니다.
3)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거지가 등장합니다.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가 그 거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그저 동전 한 닢이 아니라는 감동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다가 “우리를 보라” 베드로가 외칩니다. 지금 당장 우리를 보라는 명령입니다. 그 거지는 혹시나 무엇을 얻을까 기대를 하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의 깊게 쳐다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면서 거지의 오른 손을 화악 잡아 일으켰다. 나면서부터 서본 적도 없던 그 거지가 그 자리에서 힘을 얻고 서고 걷고 뛰어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인하여 소망 없던 자가 소망이 생기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 자가 기쁨에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앉은뱅이가 되어 고생을 한다고 생각되던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칠세라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은 단순히 그 한사람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는 사건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죽어갑니다. 생명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주님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행동을 인하여 변화가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우리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 성탄절을 준비하며 대강절을 보내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 자리를 떠나기 원합니다.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님들께 주님이 베푸시는 참된 위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