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 화평(평화,화목)

(고후5:16-21)

화평(평화)을 지키는 일에 해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과 가족의 화평을 회복하고자 전문상담가들을 찾고, 외교관들은 국가 간의 화평을 추구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습니다. 법원은 개인 또는 회사 간에 화평이 깨지면서 늘어나는 소송 건으로 정신을 못차릴 지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죄악된 세상의 이같은 소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이리저리 요동치는 상황 때문에 불안해하고 깨어진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화평의 하나님’(여호와 샬롬)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도권을 쥐고 반역자 인간과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관계에서뿐 아니라 개개인의 화평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화평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14:27), 우리의 삶 속에서 화평을 원칙으로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화평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우리가 화평을 이룰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화평은 실제로 3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 안의 화평’,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 이 세 가지는 평행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관련 맺으면서 화평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과의 화평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이것은 모든 화평의 시작점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이 이루어져야 우리 안의 화평과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죄인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었으며 그분의 반역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57:20-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와 대적 관계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상황이 자비를 베풀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는 대신, 우리의 선을 위해 모든 상황 가운데서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롬8:28).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라도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잠16:7).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 안의 화평과 다른 사람과의 화평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세워졌다고 해서 화평의 다른 측면들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화평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화평의 성품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 우리 안의 화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삶 속에서 자주 화평이 깨어지고 불안, 초조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큰일을 겪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화평을 맛봅니다. 그런데 삶에서 겪는 일상적인 문제들이 우리의 화평을 빼앗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문제에 부닥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안달하고 애씁니다. 이럴 경우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온전히 믿고 맡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상황이 똑같이 화평도 빼앗아갑니다. 그같은 문제 상황의 공통분모는 ‘불확실성’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는데 병명도 치유가능성도 불확실할 때. 구조조정으로 인해 대기발령이 떨어져, 계속 직장에서 일하게 될지 해고 될지 불확실할 때. 이외에도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불확실한 상황들이 우리 삶의 화평을 소멸시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너무 작고 사소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라도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염려하게 됩니까? 그것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염려의 독을 없애는 가장 빠른 해독제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다루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큰일이거나,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날 정도로 너무 작은 일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며(고전10: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8:28). 그리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결과는 어려운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평강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장의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7,8).”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우리는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뿌리도록 내버려둘 때가 많습니다. 헬라어로 마귀는 ‘고발자, 참소하는 자’를 뜻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고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의심하게 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번민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화평이 없을 때, 성경의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가져가십시오. 마귀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는 마귀와 대적하여 싸우십시오.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하나님과 화평을 경험할 수 있어야 우리는 화평의 세 번째 측면인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9).”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0,11).”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화평을 위해 ‘힘써라’, 화평을 ‘구하라’고 수차례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평을 이루고자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일하게 있는 것은 화평을 추구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화평만 이루면 된다는 식의 절대평화주의적인 태도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표면적인 평화를 위해서 부정이나 불의에 굴복해 버리는 것도 화평을 추구하는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을 방해하는 갈등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용감하면서도 자애로운 태도로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 다른 성도들과 갈등을 겪을 때, 화평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

첫째, 우리는 같은 몸의 지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몸의 다른 지체들이 서로 싸운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만약 우리가 같은 몸의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다면 믿는 자들 사이에서 갈등과 대립이 훨씬 적어질 것입니다.

둘째,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화목이 깨어질 때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영광에 금이 갑니다. 성도들 간의 다툼만큼 그리스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의 불화는 묵인하면서도 사기죄나 간음죄를 지은 사람은 교제에서 추방할 것입니다. 우리는 ‘화평의 일을 힘쓰라’는 성경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불화의 원인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진실된 겸손의 정신을 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불화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원인을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돌리며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갈등을 키우게 됩니다.

넷째, 화평을 회복하는 데 주도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잘못이든 상대의 잘못이든 차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어느 쪽이든 화평을 향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책임은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성도들 간의 갈등을 풀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죄 문제는 초기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처럼 온몸에 퍼져서 나중에는 철저하고 심각한 영적 수술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 불신자들과의 갈등을 다루는 방법

첫째, 만약 우리가 불신자에게 잘못을 범했으면, 화평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때는 불화를 겪고 있던 성도에게 용서를 구하러 갈 때보다 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불신자는 자비와 용서의 태도를 보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계속 살려면 이 일을 행해야만 합니다.

둘째, 불신자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할 때는, 복수할 방법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불신자와 갈등이 일어났을 때, 서로 간의 유대나 교제의 회복이 없고, 회복을 도우시는 성령의 임재도 서로에게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복수의 관점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행동에 옮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태도는 명백히 성경에 위배됩니다.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롬12:19). 정의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그분의 판단만이 언제나 진리에 의한 것이며, 그분만이 모든 사실과 그 이면의 동기를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되며, 우리는 정의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정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 나한테 맡겨라. 넌 다른 것에나 신경 써라. 이게 바로 너에게 잘못을 범한 불신자를 이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