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무엇인가

 

막 1:1 고전 15:3-5

 

근래에 함께 신앙생활 했거나 직접 간접으로 알던 분들 중에 여럿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오랜 투병 끝에 가신 분도 있지만 갑자기 떠난 분들도 있어 우리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느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죽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 있는 자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이 때로는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교회 오래 다니면 다 구원 받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누구에게나 다 구원을 베푸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는 형제나 자매들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제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적어도 오늘 예배에 참석한 분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예수님이 구주 심을 분명히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서 언제 주님 앞에 설지라도 평강 가운데 서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지금 전하는 내용은 이미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여러 차례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복이 가장 좋은 학습방법이기에 다시 한 번 정리해서 함께 나눕니다. 이미 믿고 확신하는 분들은 믿음을 더욱 다지는 기회로 삼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잘 정리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으로 능력 있게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개역 성경 번역을 보면 1절이 문장처럼 보입니다. NIV로 볼까요?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보통 문장을 구성하려면 주어와 동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1절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1절은 문장이 아닙니다. 1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제목이 될 수도 있고 특별한 선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면서, 그의 오심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1절에는 신약성경에서 다루는 핵심 단어들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에서 '시작'으로 번역된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태초’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시작이라 함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처음이라는 뜻도 있지만 근본이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역의 시작이요 기초임을 알려줍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예수의 복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목적격으로 보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예수를 주격으로 보면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둘 다 맞습니다. NIV에서는 목적격으로 취급하여 about이란 전치사를 사용했습니다. 본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특히 바벨론 포로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종말론적인 해방과 구속을 알리는 복된 좋은 소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당시 로마제국에서 '복음'은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얻은 정치, 경제적인 번영과 평화를 말하는데 특히 이 복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지중해 연안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정치 경제적인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 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가리키는 로마의 선전 문구였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군사적인 파워와 정치 경제적인 번영을 근거로 로마황제를 온 세계에 복음의 구원자로 신격화하고 황제 숭배를 조장하고 정당화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마가는 진정한 복음은 로마 황제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다주는 것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을 NIV처럼 예수님에 관한 스토리로 볼 때, 복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사역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개인적인 이름입니다. 예수는 헬라 말이고 히브리 말로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생긴 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려면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 되고, 인간 편에서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예수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예수아, 호세아처럼 같은 어원을 가진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가진다고 다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가 자라난 곳의 이름을 따서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선택, 출애굽, 성막, 다윗의 전쟁기 등 다양한 스토리가 들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십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복수명사입니다. 천지창조 때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뱀, 즉 사탄을 저주하십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원시복음으로 알려진 창 3:15에 이미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고난을 당하시지만 사탄을 제압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복을 주시기 위함이요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출애굽, 즉 죄와 사망의 노예로 있던 인생들을 구원하여 영적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막을 이루는 지성소, 성소, 분향단, 떡상, 등잔, 번제단 등이 모두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탄생, 공생애,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등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 즉 구원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공적인 title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 말이고 히브리 말로는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누가 기름 부음을 받습니까?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그들이 취임하거나 사역에 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성령으로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분이 바로 왕, 제사장, 선지자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로 오신 대제사장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신 선지자입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 하나님의 아들
마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세상의 구원자요 신적인 권위를 가진 로마의 황제를 칭송할 때 사용하는 정치적이고 제의적인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로마황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자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베드로가 고백합니다(8:29). 마가복음의 후반부에는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숨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하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입을 통하여 고백하게 하십니다.


2)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바울은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복음을 예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교인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진대 어찌하여 신자의 육신이 장래에 부활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가 하면서 부활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분명한 사실임을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교회에서 전파되고 있는 복음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성도들의 부활과 연관시킵니다.

원문에는 15장이 “알게 하노니” 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인데 잊어버린 것 같기에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한다면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교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해되는 부분만 믿고 이해 안 되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은 참된 믿음의 도리가 아니라 도리어 헛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 복음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핵심이랄 수 있는 믿는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는 것이요 (13),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14), 사도들의 증언도 헛것이요(15),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라(19)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믿고 굳게 지키면 다 구원에 이른다고 호소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전해지던 복음의 핵심을 적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 자신이 생각해 내고 바울만이 전하는 독특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내용이요 바울 자신들도 그들에게 전해 받은 내용임을 밝힙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구원론의 견지에서 복음을 요약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네 절로 표현합니다.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들처럼 정치적인 반란을 꾀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구속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노예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사서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인인 우리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구속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2) 장사지낸바 되었다
예수님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깨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3)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의미에서만 부활이 아니라 죽은 몸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시 16:10,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
4)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공생애 동안 함께 지냈던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라는 말을 반복한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즉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1)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철학, 과학, 기술, 문화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초월자이시며 온전한 자이신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습니다. 영원한 위 세상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래 세상에 오셔서 물질인 육신이 되셨습니다.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와 시간 속에 있게 되었으며, 육신이 진리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 세상의 생명인 영생을 죽음의 세계인 아래 세상에서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분이 성육신하여 하나님을 이 아래 세상에 나타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14, 3:16에는 그분을 가리켜 ‘독생자’라고 하는데 이는 ‘외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monogenes에서 genes는 ‘탄생’의 뜻이 아니라 ‘종(種)’이라는 뜻입니다. 독생자가 아니라 독종자, 즉 종류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분임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unique son,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독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습니까?
-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죄를 지면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질 때마다 짐승들이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야만 되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죄 용서함 받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 죄가 드러나고 그 죄를 회개할 때 죄 씻음을 받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은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비난과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리고, 십자가에 달리는 수모까지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다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면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다 세신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하여 주십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그렇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있고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님 때만 나타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계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능력이 있는 영원한 복음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참된 복음이요, 구세주요,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고, 진정한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2)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요 경험의 대상이요 관계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와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가운데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음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든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거창한 일을 벌이고 놀라운 업적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하나님을 감격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자녀가 되면 부모의 집에 거하면서 부모의 모든 것을 값없이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것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질 때,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죽은 다음에 영생을 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땅에 살면서도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세상의 자녀였는데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값비싼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 즉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자기의 삶을 비추어보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3)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약속된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죄를 자복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시하면서 얼마든지 우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설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영화로 따진다면 자신은 엑스트라이지 결코 주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능력 많으신 이',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사역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증거한 목적은 그의 증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성도들의 모델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인생 목적은 “증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서 전체의 주제선언과도 같은 핵심구절이요 구원의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복음은 모든 시대와 지역, 인종을 초월하여 빈부․귀천․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증인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우리 자신이 바로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셨기에 우리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세례자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인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헌신할 사람을 찾으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기꺼이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려면 주안에서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먼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삶의 모습이 앉은뱅이에서 걷는 자로 걷는 자에서 뛰는 자로 변화된 모습,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경건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특히 우리 가정과 사회, 국가와 민족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우리 밖에서 오신 분이 계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믿음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을 수 있고 구원을 얻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못 박게 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성도들을 통하여 오늘날도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성육신의 정신을 실천하며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 있는 종들, 하나됨을 이루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며 기쁨과 소망과 평강이 충만하여 언제 주님이 부르실지라도 기꺼이 주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