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9:1-7) 부모의 본심
2013년 어버이주일 설교 / 곽창대 목사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소원은 자녀들이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점에서 부모의 본심과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12명의 아들들을 불러 유언을 남겼는데 첫 세 아들들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유언을 했습니다. 나머지 9명의 아들들에게는 축복의 유언을 남겼지만 그래도 어떻게 아버지가 1/4에 해당하는 세 아들들 그것도 장남 차남 삼남에게 줄이어 저주를 내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물론 우리는 그 세 아들들이 아버지의 속을 크게 썩였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정말 매정하게 저주의 유언을 내릴 수 있을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성경 가운데서도 아주 난해한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난해한 본문이라는 뜻은 독자들이 신학적 연구와 사색을 깊이 해야 할 본문이라는 뜻입니다.
우선 야곱이 아들들에게 무슨 내용으로 유언을 남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절: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12명의 아들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장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언이 마치 하나님의 계시처럼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의 사사로운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곱의 유언에 신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유언대로 아들들의 장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4절: 야곱이 장남인 르우벤에게 내린 유언의 내용은 ‘네가 혈통으로는 장남이지만 실제로는 장남의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셋째 부인인 빌하와 동침했기 때문입니다(35:22). 빌하는 야곱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단과 납달리)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은 아버지의 셋째 부인이자 배 다른 형제인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를 통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패역한 짓입니다. 이로써 아버지의 명예는 물론 가문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한 르우벤에게 어떻게 야곱이 축복의 예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5-7절: 야곱이 차남과 삼남인 시므온과 레위에게 싸잡아서 자신의 불편한 심경을 토로합니다. 6절에서 치를 떨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의 소행이 괘씸해서 도저히 축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는 아예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아들들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뿔뿔이 흩어져서 살 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죽음을 앞둔 야곱 마음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큰 한으로 남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 34장으로 가야 합니다. 일명 디나 사건입니다.
디나는 야곱의 첫째 부인인 레아가 낳은 딸이었는데 아주 아리따웠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도 레아가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의 친 오빠였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의 세겜 추장의 아들이 디나를 보고 겁탈했습니다. 처음에는 청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해 겁탈했지만 점점 더 디나를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와서 디나를 자기 아들에게 주어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나서서 제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 결혼하려면 먼저 세겜 사람들 전부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아들이 내 여동생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 말대로 세겜의 장정들이 모두 할례를 받고 집에서 끙끙 앓아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의 집에 차례로 들어가 세겜 사람들을 칼로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의 가족은 인근의 주민들에게 악명이 퍼졌고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원치 않은 피난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습니다. 너와 너의 후손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네 가문이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와 비전과 사명을 헌신짝처럼 내던졌습니다. 대신에 도에 넘치는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말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뽑아 든 칼은 정의의 칼이 아니라 욕정과 거짓과 보복의 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 아들(시므온과 레위)에게 가슴이 아프지만 저주에 가까운 유언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크게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8-27절: 그 다음의 아들들에게는 모두 축복합니다. 그 중에서 유다(9-12절)와 요셉(24-26절)을 더 크게 축복합니다.
28절: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들인 12명의 아들들에게 야곱이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의 행적에 상응하는 적합한 축복이었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들이 그만큼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의 그릇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받은 저주 같은 유언도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저주 같은 유언이 축복입니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1) 저주 같은 유언 이면에 아버지 야곱의 본심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가 저주의 유언이라고 하지 않고 저주 같은 유언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어떤 아버지도 자녀를 즐겁게 저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 같은 말이라고 해도 그 이면에 부모의 본심이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서 너무 화가 받치면 입에서 십 원짜리 같은 욕들이 마구 터져 나오려고 합니다. “몹쓸 놈! 멍청한 놈! 빌어먹을 인간아! 야,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안 나가! 집에 들어오기만 해라! 가만 안 둘 꺼야!” 물론 이 같은 말들을 자녀들에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쨌든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속이 뭉개지면 입 밖으로 이런 말들이 쏟아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부모이기에 그 같은 쌍스러운 말들을 차마 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무수히 내뱉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으로라도 자녀들을 향해 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부모의 본심이 담겨 있습니다. “저 놈이 저래서는 안 되는데! 언제나 철이 들까?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되는데! 주님, 속히 정신 차리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사람 구실 하며 살게 하소서! 자기도 행복하고 가문도 빛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녀가 되도록 간섭하소서! 제 힘으로는 안됩니다. 도와주소서!”
자녀 여러분, 부모의 이 같은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부모가 돼보면 여러분들을 향한 부모의 본심을 뼈저리게 알게 되겠지만 일찌감치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효자입니다. 그래야 부모를 통해 내리는 하나님의 복을 마음껏 받을 수 있습니다.
2) 야곱이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린 저주 같은 유언이 축복인 이유는 그것이 징계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징계는 두 가지입니다. 최종적인 징계와 잠정적인 징계입니다. 불신자에게 내리는 징계는 최종적인 징계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대체로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이유는 최종적으로 징계하실 때 한꺼번에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녀들에게는 최종적인 징계가 없기 때문에 자주 징계하십니다. 즉 자녀들이 잘못하는 것을 볼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 이제는 안되겠다’고 판단되면 징계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세 아들들에게 내린 저주 같은 유언은 징계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는 그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소원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야곱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의 아들들에게 그 같이 징계를 내린 것입니다.
(히 12:6-9)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3) 야곱이 내린 저주 같은 유언이 축복인 이유는 그것이 결정론적인 예언이 아니라 얼마든지 축복으로 변경될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징계를 달게 받으면 얼마든지 축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히 12:11-14)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회개하고 다시 제 자리를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축복하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유언은 결정론적인 예언이 아니라 얼마든지 축복으로 변경될 수 있는 잠정적인 예언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저주 같은 유언은 세 아들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포착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유언을 받은 9명의 아들들에게는 축복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욱 분발하라는 뜻으로 축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주 같은 유언을 받은 세 아들들만 아니라 12명의 아들들 모두가 아버지의 본심과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서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후손들에게 선조들과 하나님의 본심을 충실하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 33장의 말씀이 좋은
실례가 되겠습니다.
1절: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한 유언입니다.
2-5절: 서언입니다.
요약하면 모세의 축복은 실은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유는 모든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6절: 르우벤의
자손들에게 모세가 축복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야곱은 르우벤에게 저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와 네 후손이 혈통적으로는 장자이지만
장자 구실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탁월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유언은 야곱의 저주 같은 유언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7절: 유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유다를 향한 야곱의 축복보다 조금은 약화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8-11절: 그런데 레위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야곱의 저주 같은 유언과 비교할 때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12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가 모세로부터 최고의 축복을 받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가 받을 축복을 10-11절에서 다섯 가지로 열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축복, 거룩한 제사를 집전하는 축복, 재물의 축복, 수고한 대로 풍성한 결실을 얻는 축복, 악에서 보호 받아 승리하는
축복. 엄청난 축복입니다.
대신에 모세의 축복 유언에서 시므온 지파는 아예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레위 지파에게는 저주가 종식되고 축복 받는 지파로 회복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레위 지파와는 달리 시므온 지파는 여전히 축복에서 제외되었을까요?
레위 지파가 최고의 축복을 받은 지파로 회복된 것은 역전의 기회를 잘 선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9절의 말씀입니다. 레위 자손들이 부모나 형제나 자녀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이 9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2장의 사건과 민수기 26장의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까지 진행하여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40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백성들이 모세를 기다리다 지쳐서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자고 아론에게
졸랐습니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가 죽었을지도 모르니 앞으로 이 험난한 광야 길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도록 지시한 자는 모세의 형 아론이었는데 그 금송아지 우상을 보고 백성들이 선포합니다.
(출
32:4)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리고 다음날을 여호와의 축일로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일찍부터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모여 각종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보았던 애굽 사람들의 종교의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입니다.
모세가 하산하여 이 광경을 보고 먼저 아론을 가차없이 문책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 ‘누구든지 여호와 편에 설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레위 사람들이 모세 앞에 나왔습니다.
그 레위 사람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합니다.
(출 32: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즉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레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중대한 헌신을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레위 사람들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백성 중에 약 3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3천명은 금송아지 숭배의 주동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레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출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 지파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민수기 26장에 나오는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세월을 거의 마치고 요단강 동편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잠시 싯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의 꾐에 빠져 바알브올 신전에 가서 먹고 마시며 제사도 하고 모압 여자들과 음행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을 내리셨는데 그 염병을 그치게 하려면 범죄자들을 색출하여 태양을 향해 목을 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 같은 진노 중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이방 여인을 데리고 자기 막사로 들어간 친구가 있었습니다. 시므리였습니다. 시므리는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즉 시므온 지파의 영적인 풍토가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 광경을 본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분연히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막사로 들어가 시므리와 이방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염병이 그쳤습니다. 그때 염병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24000명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에게 축복했습니다.
(민 25:10-13)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축복 받는 지파로 회복되지 못했고 레위 지파는 축복 받는 지파로 회복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축복을 받은 지파로 회복된 이유는 회복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선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의 기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늘 열려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저주 같은 유언이나 축복의 유언이 영원토록 변경되지 않는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계의 말씀으로 주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저주 같은 유언이나 축복의 유언 이면에 하나님의 본심이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의 미래에 관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7:4-8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의 총수가 144,000인데 각 지파마다 인 맞은 수가 12,000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므온 지파가 들어있고 단 지파가 빠져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얼마든지 역전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그 같은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전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았는데 그것을 로마서 9-11장까지 밝혔습니다. 거기서 밝힌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특별한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부지런히 전 인류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주 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 백성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롬 11:11-12, 29-3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이스라엘 백성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같은 뜻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 19:30, 막 10:3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눅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말씀 드린 설교 주제는 자녀들이 하나님과 부모님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문과 민족을 살리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부모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녀들이 될 수 있을까요? 레위 자손들처럼 하나님 편에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가문이 신앙의 명문이 됩니다. 레위 자손들처럼 하나님 편에 서는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레위 자손들처럼 하나님 편에 서는 자녀들이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에 헌신해야 합니다.
1)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현대의
가장 큰 우상들인 돈과 권력과 성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 불의와 싸우는 주님의 용감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의 칼로 무장해야 합니다.
3) 주님과 복음 때문에 희생과
아픔도 감내해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성령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게 되고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살고
가문도 살리고 교회와 이웃을 살립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에게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때는 남북전쟁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링컨이 이끌고 있는 북군에게 불리한 전세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기독교협의회의 한 대표가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심을 확신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한 것은 링컨 대통령에게 이 곤경의 때를 잘 견디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자녀 여러분, 링컨의 태도가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편에 서는 것,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을 따르면 그 다음의 모든 일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문에 하늘의 복을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이것이 명문가문이 되는 첩경입니다.
다시 요약합니다. 부모의 본심은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아 그 복을 후손들과 이웃들에게 풍성히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편에 서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