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나?

     마태복음 28:1-10


I. 부활 – 역전의 능력, 뒤집기의 역사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며 한국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전 1885년 제물포 항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사람의 선교사가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그 날이 한국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이고 아펜젤러는 감리고 선교사입니다.

언더우드가 나이가 조금 많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배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먼저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회가 형님이다 그럽니다.

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는 총각으로 왔고 아펜젤러는 결혼해서 왔기 때문에 레이디 퍼스트 아마 사모님이 먼저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회가 형님이다 죠크를 하기도 합니다.


부활! 창조가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할 수 없듯이 부활이 없는 종교는 부활을 말한들 부도수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흙을 뒤집어 쓰고 땅속에 묻어있는 사람이 다른 인간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예수님만이 천국 가는 길이요 그만이 진리요 그만이 부활이요 그만이 생명입니다.


제가 27권 정도의 책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된 책 가운데 한 권이 「꿈대로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당시 그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서점에 들렀다가 재미있는 책 제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라는 로버트 풀검 목사의 책이었습니다.

로버트 풀검은 목사, 교사, 저술가, 바텐더 등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토대로 재미있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구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87가지 방법」등등 많습니다.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라는 책에서 마샤 카터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서를 남깁니다.

내가 죽으면 상복을 입지 마라,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라, 박수를 치며 나의 천국입성을 축하하는 승리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얘기합니다.


김활란 여사도 그렇게 했다고 그러지요.

내가 죽거들랑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마샤 할머니의 유언을 따라서 그분의 장례식은 음악회로 춤추며 박수치며 큰 잔치로 치루어 졌습니다.

그의 유서 중 인사말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 살아가며 예수 안에서 참 행복한 인생,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내가 이토록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제 곁에 있었기에 나는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은 나를 사랑해 주며 나는 참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내 숨이 끊어지는 날은 천사의 손을 붙들고 천성을 향하여 춤추며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천국문에 다다르면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히 계십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마샤.」


여러분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죽음을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돌무덤이 굴러갔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공격할 어떤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오늘 처음 교회 나오신 분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씨름선수였습니다.

씨름 할 때 제일 잘 쓰는 기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보기에 거구는 아니지요. 그때도 그랬습니다.

큰 사람 밑으로 파고 들어가 뒤집어 던지는 겁니다. 그것을 씨름에서

“대치기” 혹은 “뒤집기”라고 합니다. 제가 뒤집기 기술을 참 잘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면 뒤집기의 명수입니다.

통나무 하나는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통나무는 죽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라미는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숨을 쉬지만 그 영혼이 죽은 사람은 시류에 환경속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그 영혼, 생명이 살아있는 사람은 환경과 역사와 시류를 거슬러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당신의 인생을 꽁꽁 묶고 있는, 가두고 있는 돌무덤이 무엇입니까? 살아오며 실패의 상처를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꽉 막힌 상처를 가지고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경제활동이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건강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안에서 위대한 교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적인 교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왔던 죄악의 짐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 안에서 용서가 선포되어집니다. 상처와 질병을 가지고 오면 깨끗이 치료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가나한 자는 부요를 죄책감을 사라지고 자유를 죽음의 염려와 고통이 평강과 영생의 자유함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숨을 내쉬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을 때 바로 그 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죽음의 호흡을 물리치고 우리 가운데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이 시간 부활의 호흡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II. 갈릴리에서 만나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로마,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죽음의 영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온 땅에 퍼져 있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무덤문이 굴러져서 로마와 온 세계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음의 영을 KO패 시켰다. 악한 사탄을 KO패 시켰다.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뒤집기의 드라마입니다.

이 세상에 역전의 드라마가 많고 많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신 이 사건이야말로 역전 중에 역전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멋진 승리입니다.


지난 주간에 내내 TV에서는 우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다른 방송을 틀었더니 마침 류현진 선수가 야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7회까지 2-0으로 멋진 승리를 하는 가운데 불펜에게 공이 마운드가 넘겨졌습니다.

그 다음 허를 막기위해서 나온 불펜선수가 계속 안타 안타를 허용하더니 한점을 먹었습니다. 가슴이 졸이고 애간장이 타든지요. LA로 달려가고 싶던지요. 끝날때까지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생방송이 아니고 재방송이었습니다. 이미 류현진 선수가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알고 봤으면 제 마음이 얼마나 편안했을까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애간장이 녹았습니다.


이미 승리했다는 소식이 다 선포되어졌는데 여러분만 이 승리의 소식을 몰라서 애간장 녹이며 어둠에 갇혀 실패에 짓눌려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도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괌에 부흥회를 갔을 때에 요꼬이 동굴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버스를 타고가 깊은 산중에 내립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러면 험악한 골짜기로 케이블카가 지나갑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립니다. 언덕밑에는 케이블카가 도달하지 않아서 아슬아슬한 내리막길을 지나 요꼬이 동굴에 도달했습니다.

요꼬이는 세계 2차대전때 괌에 상륙했습니다.

일본이 완전히 패망하고 항복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요꼬이라는 병사 혼자만 동굴을 파고 있어서 전쟁이 끝난 줄 몰랐던 것입니다.

자그마치 28년동안 나무껍질 풀뿌리를 캐먹고 골짜기에 있는 작은 피라미 새끼를 잡아먹으면서 28년을 숨어살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아무도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도 인생의 동굴속에 갇혀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제가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사망과의 싸움은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을 지옥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악한 마귀와 예수님과 영적인 싸움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기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향유라도 발라드려야 되겠다 생각하고

향유를 준비하여 동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한 남자가 빛난 얼굴을 하고 옆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예수님을 어디로 옮기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로 감춘 것입니까? 예수님 못 보셨습니까?

이 남자가 얘기합니다. 그 분은 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32)

오늘 설교제목이 「부활하신 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III. 왜? ① - 절망이 있는 곳


첫 번째,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절망가운데 빠져있기에.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고 있기에. 그를 믿고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길래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렇게 능력 많으신 분이 로마를 하루 아침에 물리치고 자기 나라에 독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든 꿈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이 되시면 제자들은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고 오른편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동안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배고픈 민초들은 도시락 하나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분이 왕이 되시면 우리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저들은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요?


갈릴리는 한숨소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절망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기쁜 희망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 없어 보일 때 오직 예수만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 막다른 골목에 인생 종착점에 도달했을 때,

사랑했던 사람도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죄의 짐, 죽음의 짐, 구원의 짐을 모두다 맡아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개인, 공동체, 나라가 복이 됩니다.


전세계를 아무리 둘러 보아도 예수를 버린 나라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국가들은 모두 다 망했습니다.

선교사를 쫓아내고 성경책을 불태웠던 나라들은 모두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동남아 어디를 가보더라도 교회를 핍박한 나라 치고 잘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50년전까지만 해도 북한 땅은 우리보다 참 잘 살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땅은 세계적인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나라가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한 것이 무엇입니까? 땅이 넓습니까? 지하자원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민족을 살려달라고. 그리고 예수를 잘 믿은 것, 하나님을 소중히 높여 드린 것,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긴 것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민족 이 백성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IV. 왜? ② - 첫사랑이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나뉘어져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던 자리가 갈릴리였습니다.

복음의 산에 올라 복된 소식, 천국에 관한 귀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천국에서 보았던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장소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11:28)

이 세상에 지친 사람들을 다 불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주님과 만났던 첫사랑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심장을 열어 보이며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했던 자리,

내 생명 드리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자리,

주님을 만나서 울부짖던 행복한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 신앙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감사하고 찬송했던 입술 속에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의 언어가 내 입술에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 찾아오시면 여러분의 첫 사랑이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구원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미디안으로 혼자 숨어듭니다.

그곳에서 남의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름진 얼굴 흰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새끼 양을 품에 안고 어미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힘을 내라.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너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너희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는 그 꿈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애굽에 노예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을 구원하라.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역사는 다시 부름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실수가 덮여지고 인생의 제2모작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펼쳐졌던 역사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밑창에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발각이 나서 바다에 집어던져집니다. 무슨 물고기인지 모르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자기 몸이 녹아들어가는 고통가운데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육지에 가서 요나를 토해냅니다. 요나가 다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요나를 다시 쓰신 하나님, 한번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절대로 폐기처분하지 않습니다. 한번 사명으로 이끈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떠 던졌던 베드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통곡하고 가슴을 쥐어뜯어 보았지만 그 죄책감을 이길 수 없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도 다시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이슬 찬바람 헤치며 그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더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시오.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고기가 만선이 될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그 추억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그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폐기처분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또 찾아 오셨군요.

주님 앞에 다시 부름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실수했습니까? 넘어졌습니까? 인생에서 깨진 멍자국을 가지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 지금 이 자리를 갈릴리로 만들어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여러분의 실수는 덮여지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싸늘했던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불같은 사랑으로 회복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V. 왜? ③ - 회개가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제자들의 잃어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해 놓고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회개하면 용서하마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을 용서해 놓고 여러분을 기다리셨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한국 천주교 지도자 가운데 윤 모 신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천주교의 연옥교리를 변증하는 글에 개신교 교인 서창제라는 신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서창제 성도에게 신부님이 묻습니다.

당신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개신교 교리와 천주교 교리의 다른점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당신에게 가장 감동을 준 교리가 무엇입니까?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연옥교리입니다. 내가 개신교에 있을 때에 조용히 눈을 감고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니 내가 죽으면 천당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지옥갈 죄를 지었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생각해 보면 내 눈앞이 캄캄해져만 왔습니다. 천주교에 와서 보니 천당은 못가지만 지옥은 안가고 중간지대인 연옥에 가서

거기서 덕을 쌓아 천당 간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기독교 진리와는 성경에 있는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내면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종교입니다. 내가 지옥갈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도 공로도 덕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천당 갈 자신이 없다고요?

여러분 천국은 내 자신감에 의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오늘이라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구원 얻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 내 공로로 선행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사오니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이 시간에 진정으로 고백하면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여러분의 신분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지옥의 호적등본은 사라집니다. 천국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Ⅵ. 왜? ④  - 사명이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제자들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를 삼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구원얻은 백성들을 모두 다 살려내라.

세상을 구원해라. 사람들을 사랑해라. 내가 너희들에게 권세를 주노니 아픈자 마음상한 자 깨어진 가정을 회복시켜라. 천국을 건설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제자들은 이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 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자녀 삼은 목적이 있어. 6.25 빗발치는 총탄속에서 너를 지금까지 살려놓은 이유가 있는 거야.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젊을 때 자녀 삼은 이유가 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비극이 됩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갈릴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분 인생에 갈릴리가 되어져 삶의 목적이 비전이 꿈이 희망이 삶의 이유가 새로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초대교회 목사님 가운데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그를 죽이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설득을 합니다.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내 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황제의 회유의 말을 듣지 않자

“내가 너의 전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

“황제여 내 재산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작은 것을 빼앗기면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너희 가족을 너와 함께 죽일 수 있다.”

“황제여 이 땅에서 우리 가족이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만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너를 이 나라에서 추방해 버릴 수 있다.”

“황제여 이 나라도 내 나라가 있지만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내 나라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너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황제여 나의 영원한 목숨이 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당신은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당당함, 이 위엄, 이 멋 - 이게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상 가치에 매여 두려워 떨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낸 한 목사님(한신대 김정준)은 그의 젊은날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니 차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근심된 얼굴로 찌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얼굴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그때 붓을 들어 「내가 죽는 날」이란 시를 씁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내가 죽는 날 요한계시록 20장 21장 22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내가 죽은 다음 나의 묘비에 임마누엘 한 마디를 적어주오.

하나님이 함께했던 사람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는 사람이라 새겨주오.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소.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이리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소.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걸음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소.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에 광채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소. 그 어두움이 나의 죽음이라면 저 하늘에 영롱한 별빛들은 천국의 내 눈빛이 되어 줄 것이오.

이 시간이라도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할렐루야 하늘에 천군천사 손 붙들고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될 것이오. 이 세상에 살아왔던 근심 걱정, 이 세상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주님 품에서 영원히 편히 쉬게 될 것이오. 그 이후에 내 소식을 이 땅에서 묻지 마시오. 내 소식은 저 천국에서만 듣게 될 것이오. 시를 썼습니다.


Ⅶ. 맺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부활절 예배가 여러분의 인생에 새출발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여정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인생의 2모작을 시작하는 갈릴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패와 염려와 걱정 절망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여정이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만났던 그 첫사랑이 그 뜨거웠던 사랑이 주님 앞에 울며 감격했던 그 모든 신앙생활의 행복이 오늘 부활의 예배를 통하여 회복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 될 이유, 이 땅에 좀 더 잘 살아야 되는 이유,

좀 더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야 될 이유, 삶의 목적과 이유를 오늘 발견하는 귀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가두지 못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부활하여 주님 품에서 영생복락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영원한 천국에서 오늘 이 땅에서 여러분과 내내 함께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