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신학(37) 부활과 영생
5. 죽음과 부활과 영생
1)성경적 증거
구약 성경 가운데는 영생에 대한 암시뿐만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을 말하는 구절도 있다. 이사야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라고 하였고, 다니엘도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단12:2)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구약 가운데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직접적 묘사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주 발견된다.
신약 성경은 영혼의 영생뿐만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의 육체가 썩지 아니할 육체로 부활할 것도 여러 번 예언하고 있다(눅20:35,요5:25-29,살전4:16). 즉 성도들은 영혼과 더불어 새 몸까지 입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생에 동참할 것이며 악한 자 역시 부활하여 육체를 입고 사단과 더불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게 될 것임이 명시적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계20:12-1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2)부활의 준비
기독교는 신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부활 예언과 그 성취 사실 속에서 사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해 주고(시16:8-10), 신약은 그 예언이 사실대로 성취되었음을 증언한다(고전15장).
성경은 수천 년 동안 각기 다른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기록된 것인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사도들이 꾸며냈다면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벌써 그 사실을 밝혀냈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세계는 기독교의 출현에 당혹하고 놀라워하며 극심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늘 모함했고 로마제국은 황제 신격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기독교를 말살하려 했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 신앙 근거의 핵심 되는 요소가 허구임을 밝힐 수 있었다면 유대교나 로마제국이 손쉽게 기독교회를 파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기반으로 순교까지도 겁내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언약하신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세계 최대의 사기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 그리스도를 믿었고 또 믿는 사람들은 그 같은 사기 행각에 놀아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그의 부활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임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영원한 시작임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부활의 준비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며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 부활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좀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6. 영생
1)영생의 뜻
성경에서 영생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다나시아(ἀδαναsία)’는 문자적으로 ‘죽지 아니함’, ‘불멸함’이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영생(Immortality)이란 용어는 성경 가운데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영생은 오직 초월적 자존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도 ‘오직 그 곧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6:16).’라고 묘사하였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과 달리 피조물의 영생은 시작의 시점이 있으며 영생의 힘을 본래부터 자체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물려받은 것이므로 상대적 영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영성을 지닌 천사, 마귀, 인간은 바로 이러한 상대적 의미의 영생을 소유한 존재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목적은 영생, 즉 영원히 사는 축복을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영생의 기본적인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한 후에 주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요3:16). 영생의 유일한 주재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생의 유일한 근거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 영생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 결코 자신의 말을 식언치 않으시며 어떠한 변화도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약속은 즉흥적인 발상이나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있었기에(딛1:2) 더욱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확실한 보장이 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날 육체의 한계와 부패성을 벗고 비로소 참 자유와 영생을 누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부활하는 날 결코 썩지 않을 신령한 형상을 입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2)영생의 조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말씀과 같이, 영생의 조건은 믿음과 그 근거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믿음의 실제적인 표현인 성령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선택’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선택과 구원이 영원 전부터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 때 우리는 결코 취소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의 보장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는 말씀같이 영생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의 축복을 얻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많은 선행과 공로를 쌓는다 할지라도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주체적인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곧 영생하신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것이다. 주님을 단순한 성자나 예언자가 아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전능자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3)영생의 내용
영생의 내용이란 영생이 가져다주는 축복 또는 영생의 성격을 뜻한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영생의 축복은 너무나도 크고 다양한데,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가운데 성도들은 이 땅에서 깨달아 믿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고전13:12), 영원토록 그와 함께 기쁨 중에 거하고 세세 무궁토록 여호와를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의심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픔과 고통이 없고, 육신의 연약함과 죽음이 없다(계21:4). 온전하고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복락만 있다.
7. 중간기 상태
1)중간기 상태의 뜻
성경에 의하면 개인의 죽음과 역사 전체의 대종말과 함께 경험할 부활 사이에 소위 ‘중간기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눅16:22-23). 그래서 그동안 중간기와 관련된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중간기’의 개념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이를 ‘낙원’과 ‘음부’로 보고 있으며, ‘낙원’은 의인(신자)의 영혼이, ‘음부’는 악인(불신자)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또는 천년왕국이 끝나는 때 부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부시대부터 있어 왔던 다양한 견해들을 수용함으로써 상당히 복잡한 중간기 처소관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들어가는 중간기 처소로 대종말 이후에 본격 도래할 공간으로서의 ‘천국’ 및 ‘지옥’과는 구분되는 중간기 처소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위시하여 천국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볼 때 ‘천국, 선조 림보, 유아 림보, 연옥, 지옥’ 5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에서는 생전에 완전히 성화된 성도는 죽으면 즉시 천국으로 가고, 불신자는 죽은 후 즉시 지옥으로 간다고 본다. 즉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처소로서 교회의 지배권 아래 있으므로 교황은 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해방시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 헌금, 미사 등이 연옥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력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정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구원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서 인간은 아무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진리에 위배되는 허황된 주장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인간적 사유에 의해 조작된 교리일 뿐이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사후의 상태는 이러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4).”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간청하던 회개한 강도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운명 후에 계실 곳을 ‘낙원’이라 하셨다. 한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가 사후에 가 있는 곳을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하고 있다(눅16:19-24). ‘낙원’과 ‘음부’는 3차원 세계의 공간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세계의 장소로서, 사후의 영혼들이 부활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중간 장소이다.
* 림보(Limbus)란 ‘가장자리’란 뜻이 있으며 가톨릭교회에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 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으로서 이들의 변방에 따로 위치한 중간기 처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선조 림보(Limbus Patrum)’는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이전의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이 일단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던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천국으로 자신들을 옮길 때까지 머물렀던 대기 장소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품, 낙원으로도 불리워지는 곳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 중에 잠시 이곳에 내려가셔서 이곳에 갇힌 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끌어올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선조 림보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천국이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음은 물론 천국의 열쇠는 오직 가톨릭교회에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적 교리 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지상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의 구약교회 성도들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또 다른 사후 영혼의 대기 장소를 상정해야만 하였고 그에 부응하여 추론된 것이 바로 이 ‘선조 림보’이다.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는 유아 때 사망하여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할, 죄는 직접 짓지는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못하였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유아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처소로 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아들의 영혼은 극심한 형벌을 받지도 그렇다고 천국의 온전한 축복을 누리지도 않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자연적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연옥이나 선조 림보에 있는 영혼은 장차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반면 유아 림보에 있는 영혼은 영원히 완전한 천국 구원을 받을 희망이 없이 이곳에 머물게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아 림보는 중간기 처소가 아니라 영원히 고정된 곳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가톨릭에서 말하는 중간기 처소는 엄밀하게 말해서 연옥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가톨릭교회의 중간기 처소관은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모순을 갖고 있는 총체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분야의 교리를 수립하면서 모든 교리의 확실하고도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적 입장과 고대인들의 신화적 사고 등 인간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기준인 성경과 위배되며 성경에서 정당히 추론된 다른 건전한 교리와도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의인과 악인의 중간기 상태
‘죽음’ 이후에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가 있으며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물음에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는 의인의 영혼은 죽어서 낙원으로 가고(눅23:43), 악인의 영혼은 음부로 간다는 사실이다(눅16:23). 의인의 영혼이 가는 ‘낙원’을 천국으로 보고, 악인이 가는 ‘음부’를 지옥으로 보아, 죽음 이후의 영혼의 중간 상태는 인정하지만 중간 처소는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눅16:19-31) 보듯이 영혼들이 거하는 처소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질 부활 이전의 상태이므로 장차 부활체들이 거하는 ‘천국’이나 ‘지옥’과는 다르다. 음부가 종내는 지옥으로 던져지듯(계20:14), 낙원은 천국으로 흡수될 것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이것은 예수의 비유 속에 나타나는 부자가 죽은 후에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음부’는 ‘낙원’과 대조되는 곳으로서 ‘낙원’이 의인의 영혼이 가는 중간 처소인 데 비해, ‘음부’는 악인의 영혼이 가는 중간 처소이다. ‘낙원’이 안식과 위로의 처소인 데 비해, ‘음부’는 고통과 형벌의 처소이다.
‘음부’는 구약에서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로 되어 있는데, 구약과 신약이 다 사후의 영혼들이 거하는 중간 처소를 뜻한다. 그러나 구약의 스올은 선악의 구별 없이 주로 인간의 죽음과 무덤을 가리킨 데 비해, 신약의 하데스는 형벌의 처소인 음부와 낙원으로 분리, 발전되었고, 음부는 악인의 영혼이, 낙원은 의인의 영혼이 가는 중간 처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스올’은 ‘하늘’과 대조되고, 신약의 ‘하데스(음부)’는 ‘파라다이스(낙원)’와 대조된다. 그리고 이 하데스는 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지옥’과도 구별된다.
각자의 죽음 이후 그리고 역사 전체의 대종말보다 정확히는 예수의 재림에 이은 전인류의 부활 사이의 중간기 상태 동안의 인간 영혼의 의식에 대해서는 성경의 계시가 충분치 않아서 그 완전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그 의식이 이 지상에서와 같이 명확하지는 않다 해도 즐거움과 고통은 뚜렷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 입장이다.(눅16장)
이처럼 성경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육체가 부활하기 이전가지 영혼이 의식을 가지며 활동을 하지만 각각 낙원과 음부 안에만 머물며 현 세상이나 세상 끝날 도래할 천국 및 지옥 등에서와 달리 상대적으로 덜 활발한 활동에 그치고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사후 영혼의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 난제 해설 / 벧전3:19~20은 예수님의 ‘지옥(연옥) 강하설’을 말하는가?
1. 문제 제기
본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예수의 ‘지옥(연옥) 강하설’을 주장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 구절로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본문이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머무신 3일간의 기간 동안에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중간기 처소인 음부에 내려가셔서 구약 시대에 불의를 행하여 그곳에 온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문제 해결
카톨릭의 이같은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지옥 강하설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사후에도 구원 얻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어긋나는 자신들의 교리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결국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하고, 지금도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 헌금, 교회봉사를 합리화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을 벗어난 억지 주장이며 불교나 기타 기복종교와 다를 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예수께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실 이유가 없다. 복음 전파는 이생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의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한번 죽은 영들에게 제2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했다. 그리고 본문에 대해서도 벧후2:5에 보면 ‘옛 세상을 용서치 하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제2의 구원의 기회가 있다면 예수께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행1:8)’와 같은 지상명령을 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중에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땅에서의 구별된 삶은 또 무엇이겠는가? 또 벧전4:4-6을 보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이미 죽어 음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았을 때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현재는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사람의 육신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인생이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의미하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육신은 죽으나 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맥상 의미는, 육신은 심판받을지라도 영은 살기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본문에서 ‘전파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케루소’로서 이는 공적으로 어떤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뜻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유앙겔리조)과는 다른 의미이다. 따라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께서 그곳으로 내려가셨다는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2)예수께서 영으로 직접 지옥에 내려가신 적이 없다. 엡4:9에 보면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래서 마치 예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승천을 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땅 아래 내려가심’은 천상에 계시던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본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난해한 구절인데, 신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①예수님은 부활 승천을 통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다. ②‘전파’를 복음전파로 보았을 때,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 성령으로 노아를 통하여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 경우 ‘옥’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로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잠17:8,마16:17-) 문맥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문맥상으로 볼 때,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베드로는 본문에 이르러, 성도들이 고난에 직면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면서, 본보기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 고난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영으로는 불순종하며 패역한 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던 분으로,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다(22절)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권면한다(4:13). 특히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베드로는 노아 홍수를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노아 여덟 식구가 방주를 통해 물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음과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세례를 통해 옛사람은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새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좇는 선한 양심의 사람으로 변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라(4:2)는 뜻이다.
3. 의의
본절을 근거로 한 카톨릭 교회의 예수의 지옥(연옥) 강하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에게 성경을 볼 때 자신의 편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의 통일성 속에서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한번 일깨워 준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