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할렐루야! 주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특이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제 1회 멍 때리기 대회’입니다. ‘멍 때린다’는 말은 시퍼렇게 멍이 들게 만든다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있을 때 ‘멍 때린다’고 합니다. 대회 주최 측에 따르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열었다고 합니다. 대회에 참가한 50여명의 참가자들은 낮 12시부터 3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누가 더 ‘잘 멍 때리는지’를 겨뤘습니다. 이날 우승자는 9살 초등학생 여자 아이로 선정되었습니다. 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멍한 상태로 있어서 자주 혼났는데 대회 소식을 듣고 참가하여 1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승 트로피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조각이 주어졌습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바쁘게 … 정신없이 살아가면 이런 대회가 열릴까 … 생각하게 됩니다. 바쁜 것은 좋지만 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안식하셨고 십계명에서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와서 지금 멍 때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집중하여 … 세상이 줄 수 없는 … 놀라운 평안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옆의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11월이 복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연한 감사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신16:1-17)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 유월절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하신 구속의 은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 칠칠절은 오순절이라고도 하는데 십계명을 받은 것과 연결되어 있고 - 초막절은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절기는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절기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절기들은 절묘하게도 농사의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칠칠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하여 보리 추수의 첫 열매를 기념하여 곡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초막절은 올리브와 포도 등 모든 추수가 끝난 다음 드리는 감사절기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거나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절기는 과거에 인도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둥교회가에도 이런 내용의 가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길 인도하신 하나님 2.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길 인도하시는 하나님 3.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길 인도하실 하나님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함께 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노래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작사자가 기도 많이 하고 깊이 생각하여 만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요즘의 추수감사주일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신대륙을 찾아간 청교도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먹을 것이 없어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그 때 인디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작물들을 재배하게 되었고, 수확을 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인도하시고 작물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 때부터 현재의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적 근거는 이스라엘의 절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막절이 가을 추수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여러분 중에 농사짓지 않으니 추수할 것이 없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저 오늘 있을 찬양 잔치만 잘 끝나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추수감사절은 1년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농사의 추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해를 돌아보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하신(창 1:1) 영역을 벗어나는 곳이 없습니다. 밤새 잘 자고 아무 문제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 맛있게 아침밥을 먹고 … 아무사고 없이 교회까지 차를 타고 오고 … 고장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 예배실에 들어온 것 … 이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일들입니다.
농부는 1년의 결실을 추수하여 곡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어진 삶을 통해 결실을 합니다. - 사업이나 직장생활을 통해서 얻은 소득 … -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 … -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갑자기 받게 된 혜택 … 등이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것들이 결실로 얻어졌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참새 한 마리의 가치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찮은 미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목회와신학 편집부,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 두란노아카데미, 2003) p.232 >
즉, 이 세상의 지극히 작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희노애락(喜怒哀樂)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처음 브라질에 이민을 갔던 우리 교민들은 빈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 근처는 빈민가였습니다. 빈민가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깨 버리기도 하고, 못으로 차를 긁어 놓기도 했습니다. 유리창을 깨기도 했고 차를 훔쳐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탁아소를 경영했습니다. 여러 교인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120여명의 빼빼 말라 죽어 가는 아이들, 아편 중독자 아이들, 도둑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이 6개월이 되니 화색이 돌고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탁아소를 반대하던 장로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리가 왜 이런 사랑을 받아야 합니까? 당신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 줍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보고 너무 좋아서 그냥 하늘에 대고 감사를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감사드립니다.”라고 …!!! < 홍정길, 『홍정길목사의 301가지 감동 스토리1』, (서울 : 프리셉트, 2003), p. 71. 참조. >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고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셔서 피흘리셨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는 감사의 조건이 차고 넘칩니다.
은혜라는 뜻을 가진 신약성경에 나오는 ‘카리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즉 은혜와 감사가 같은 의미라는 것을 뜻합니다. 영어에서도 감사를 뜻하는 ‘gratitude’의 어원은 라틴어‘gratus’입니다. 그런데 ‘gratus’에서 은혜를 뜻하는 ‘grace’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은혜와 감사는 어원이 같습니다. [ 임효주, <감사 그 놀라운 이야기들>, KMC, p. 34. 참조. ]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N. P. Willis는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일 뿐 아니라 마음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 죄 값을 치루시려고(롬 6:23)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는 알면 알수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인 오늘, 우리가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천국백성으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구원 받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의 감사
그러나 이 세상에 살다보면 …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감사하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 불치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기적 같은 고침 받은 사람 보다 훨씬 많습니다. 넉넉한 부자들보다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가정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마음의 상처로 눈물 흘리고, 자녀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 이런 저런 이유로 눈물 흘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라면 전화기에 이름이 뜨지만 모르는 번호라서 … 받을까 말까 하다가 전화벨이 계속 울리기에 받았습니다. ‘여보세요’라고 했는데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무슨 일이시냐고 천천히 얘기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참동안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더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는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때 그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울었다는 것에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고통가운데 있을 때, 슬픔가운데 있을 때 무조건 참고 견디며 억지로라도 감사해야할까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 5:4) 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고, 슬퍼하는 것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습니다. ‘울지마. 남자는 그런 일에 우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 덧붙여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저는 생각해 보니 많이 울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슬픈 일이 있으면 우세요. 때로는 눈물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번역하여 출판한 책 중에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마음 아픈 이들을 위하여> 라는 긴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눈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슬플 때 울어야 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애통하는 것이 복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위로를 받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픈/슬픈 우리를 기억해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애통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움츠러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옛말에 ‘척확지굴이구신야(尺蠖之屈以求信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다시 펴기 위해서이다’라는 뜻입니다.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로, 꽁무니를 머리 쪽으로 끌어당겨 움츠렸다가 몸을 길게 늘이는 동작을 반복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척확지굴이구신야 [尺蠖之屈以求信也] (두산백과) >
이 말은 움츠리고 구부러져야 앞으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개구리도 더 높이, 더 멀리 뛰기 위해서는 더 많이 몸을 움츠립니다. 우리는 고난과 슬픔이 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감사의 과학적 변화를 확인했습니다. 연구의 요지는 <감사하면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reset(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설명했습니다. UC데이비스의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룹에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들에는 그냥 아무 사건이나 적도록 했습니다.
한 달 후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는데,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입니다.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사랑과 공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범사에 감사하라” 왜? 실제로 뇌가… , 2011. 11. 24. 기사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감사의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우리가 감사할 때 나옵니다.
<지선아 사랑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이지선’씨를 여러분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몸의 절반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40번이 넘는 대 수술을 견뎌내서 화상을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엄마, 나 희망이 없는 것 같아’라고 탄식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던 엄마는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몸 속 장기는 괜찮으니 밥 많이 먹으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상으로 병원에만 누워있는데 감사할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억지로라도 감사할 것을 찾다보니 진짜로 감사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화장실까지 걸어간 일, 처음으로 환자복 단추를 내 힘으로 채운 일 등 사소한 것들에도 감사하다 보니 어느 날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고 결국은 퇴원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은 동굴이 아닌 터널이라고 말하며 출구가 있는 터널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2014.06.06. 조선일보, 참조>
감사할 것이 없는 게 아닙니다. 감사할 것을 찾지 않기 때문이고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 있더라도 감사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감사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 성경은 ‘육체에 가시’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 was given the gift of a handicap”(메세지성경) ‘육체에 가시’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인 어려움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고난이 선물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어떻게 고난이 선물이 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육체에 가시를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육체에 가시’가 힘들었던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9)
바울은 이미 충분한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약함이 곧 ‘은혜’라는 것입니다. 약함 자체가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우리가 약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빌리 그래함(Dr. Billy Graham) 목사님은 라는 작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hen we come to the end of ourselves,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을 때 we come to the beginning of God.” 우리는 하나님의 시작점에 도달 한 것이다.
내 생각에 ‘끝이구나’라고 느꼈을 때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의 시작점임을 믿고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 세상의 어떠한 능력도 부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약한 것 / 능욕 / 궁핍 / 박해 / 곤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당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도 발전시킬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하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신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 슬픔 중에도 더 크게 위로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 약함과 고난까지도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보청기를 하려고 합니다. 안경은 6학년 때부터 꼈고 이제 보청기도 끼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불편했지만 보청기를 끼지 않았습니다. 감독을 지내면서 수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제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나,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잘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보청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제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해 봤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잘 들리는 것에 대해 그동안 한 번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슬픔과 고통, 애통함이 감사가 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디까지, 무슨 일까지 감사해 보셨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절이라고 1년의 삶을 감사하며 예물을 준비해 오셨을 텐데 정말 최선을 다한 감사입니까? 어디까지, 무엇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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