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러나 아직(빌 2:12~18)

홍문수 목사


너무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다니십니까? 너무 쉬운가요? 아니면 뜬금없나요? 네,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다른 유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또 한 번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왜, 자신이 없으신가요?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자신 있게 대답하시는 분도 있지만, 왠지 대답하기가 머뭇거려지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어서 다시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믿으시나요? 네, 이건 좀 대답하기 쉽네요.

 

우리가 분명히 예수를 믿는데도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때에 그렇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살다 보니까 자꾸 실수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맞나?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이럴 때도 있습니다. 언제냐 하면, 고난이 닥쳐올 때입니다. 세상 사람도 당하지 않는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지 않으셨나?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은 구원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순간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해도 정확히 말하면 아직 구원받지 않은 겁니다.

 

본문 12절(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거죠?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죠. 믿으면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미 구원받은 게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겁니다. 그런데 아직 받을 구원도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재림의 날 부활할 때 이뤄집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신학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이라 부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구원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나 자신의 구원을 분명히 이해하고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1] 구원의 과정 : 이미, 그러나 아직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전 생애에 걸쳐 진행되는 긴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구원의 과정을 잘 설명해 주는 게 있는데, 구원의 서정(The Order of Salvation)이라고 합니다. 서정(序程)이란 말은 요즘 잘 쓰지만 않지만, 순서와 과정이란 뜻입니다. 이 구원의 서정은 교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합니다.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교파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관점에서는 9개의 긴 과정이 있습니다. “소명(召命) → 중생(重生) → 회심(回心) → 신앙(信仰) → 칭의(稱義) → 수양(收養) →성화(聖化) → 견인(堅忍) → 영화(榮化)” 소명은 부르심, 중생은 영혼의 거듭남, 회심은 회개 즉 죄를 뉘우치는 것, 신앙은 믿음,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 수양은 양자 삼으심 즉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을 이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까지는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성화가 있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로 현재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구원입니다. 견인은 중간에 탈락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꽉 잡아주심으로 성도가 끝까지 참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는 죽음을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서정을 살펴보면, 구원에 3시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원입니다.

 

이런 내용을 증거하는 성경구절들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중생) 성령님이 죄로 죽었던 영혼을 새 생명으로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다 혹은 거듭났다는 의미로 중생이라 부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칭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수양)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을 하나님이 자녀 삼으십니다. 이를 가리켜 양자 삼으심 즉 수양이라 부릅니다. 여기까지가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과정은 어떻게 될까요?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착한 일’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미 시작하신 구원의 과정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재림 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빌3:21 “그(=예수)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영화) 장차 우리의 임종 시 영혼이 천국이 들어가고, 재림 시에 육체조차 부활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이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받을 구원이며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현재의 성화 과정이 가장 큰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우리가 계속 구원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승리한 과정을 보면 두 단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합니다. 그 날은 결판의 날 즉 D-Day(Decision-Day)입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전쟁을 끝난 게 아닙니다. 마지막 연합군이 당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 비로소 종전된 것이고, 그 날이 완전한 승리의 날 즉 V-Day(Victory-Day)입니다. 그러니까 D-Day 이후 V-Day 이전까지는 국지적으로 저항하는 독일군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 이미 십자가상에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사탄이 결정타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꿈틀거리며 발악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 시에 완전히 패배하게 될 겁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죄와 사탄의 시험 가운데 영적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이게 바로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 즉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이미 칭의되었지만 여전히 죄성으로 흔들리고 갈등하는 가운데 영적 전투를 치르며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해지는 과정인데,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뜻입니다. 즉 차별성을 가리킵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모습과 구별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성화의 기준 :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성화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성화되어야 할지 몰라서 막연해 할 수 있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처럼 거룩해져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벧전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런데 그 거룩함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신 목적이 바로 그 거룩한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패밀리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맏아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동시에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아원에서 한 아이를 입양합니다. 그 때까지는 그 아이의 어떤 조건도 중요하지 않은 오직 선택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입양된 후에는 그 집안의 가풍을 익히게 하고 그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게 교육을 시킵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형상을 기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목표는 예수님의 수준까지 최대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이끌어 주십니다.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은 즉 성령으로 성령의 내주를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감화 감동의 역사로 자발적인 마음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열심히 노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과정 가운데 성화는 유일하게 성령의 역사와 나 자신의 노력이 어우러지는 과정입니다. 다른 과정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과 차이가 납니다.

 

[3] 성화의 방편 : 말씀, 기도, 고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성화를 이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 부부가 오래 동안 대화를 나누고, 고락을 함께 하면 서로 닮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며 말씀과 기도로 대화하고 고난을 경험하다 보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화의 방편입니다.

 

딤전4:5 보면, 말씀과 기도가 성화의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아직도 부족하고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고치고 또 고칩니다. 예수님도 기도 가운데 이런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요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기도를 통해서도 거룩해집니다. 기도 중에서도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고 고난이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마치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불에 넣었다가 두들김으로 단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고난은 비단 신앙의 영역에서만 사람을 단련시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영역에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한국인으로 기상을 드높인 투수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숱한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가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가 방출된 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오뚝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시련은 성장의 기회입니다. 기회는 또 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숱한 고난과 시련을 통해 성화됩니다.

 

[4] 성화의 유익 : 하나님께 영광, 우리의 기쁨, 이웃에게 증거

 

이렇게 성화되어 가면 어떤 좋은 결과가 나타날까요? 성화의 유익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우리에게 기쁨, 그리고 이웃에게 증거가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새 차를 뽑은 후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매일 차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새 차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차를 하느라 후진하다 장애물을 보지 못한 가운데 차가 긁히고 찌그러졌습니다. 마음이 쓰렸습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에 마음속에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차 때문에 네 마음이 쓰리냐? 나는 네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쓰리다.” 우리는 새 차를 간수할 줄은 알면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관리하고 성화되는 데에는 무심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은 교회의 좋은 성도들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 원망과 시비가 있다는 겁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17절~18절.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성화를 위해 수고하라고 하면서 그들의 서화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전제(제물 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제사)로 바쳐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마지막 남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성화될 수만 있다면 정말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심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울의 기대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외람되지만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바라볼 때의 마음도 비슷합니다. 성도들이 치열한 세상의 경쟁에서 당당히 이기고 성공하면 내 일처럼 기쁩니다. 그러나 더 기쁜 것은 시간을 쪼개가면서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쁜 것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성화되는 모습을 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사역이고,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화되면 그 모습이 이웃에게 증거가 됩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곳 어두운 곳입니다. 그 가운데서 빛이 됩니다. 15절~16절.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빛의 사명을 다하면 그들을 양육한 바울로서는 너무 기쁠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자랑스러울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할 때, 전도할 때 기본은 입술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격과 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메시지가 전달되려면 눈에 보이는 실물인 우리 자신의 인격에 생활 모습이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한번은 어느 모임에 갔다가 고급 실버타운의 총지배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제가 어르신들 모시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렸더니 그분은 어르신들을 모시는 게 귀한 일이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툭 뱉어버렸습니다. “믿는 분들 때문에 죽겠어요! 믿는 분들이 더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에서 성공했던 분들인데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까다롭고 드세고 교만하다는 겁니다. 몇 분이 그러신지 모르겠지만 듣는 제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반면에 이런 간증도 있습니다. 어느 새신자가 교회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하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시는 권사님이 있는데, 본래 경제 사정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아드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 일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위축될 만도 한데 성실하고 겸손하면서도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이 조심스럽게 교회에 한 번 가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 말씀에 즉시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바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케이스 중 어디에 해당됩니까? 우리는 물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이 구원의 중요한 부분임을 명심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걸어간다면 하나님께 영광, 나 자신에게 기쁨, 그리고 이웃에게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사순절에 다시 한 번 나 자신의 인격과 삶을 돌아보면서 성화의 과정을 더욱 진지하고 성실하게 걸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