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구원하고 시대를 이끈 명문가_모르드개와 에스더.
(에스더 2 : 5 ~ 18)
¶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15년 동안 1-2인 가구의 수가 무려 452만 가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같은 기간 증가한 전체 438만 가구보다 14만 가구나 많은 수치입니다.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한 부모 한 자녀로 구성된 2인 가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결손가정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런 결손가정이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가정을 들여다보면 결손가정이나 다름없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일명 ‘부재가정’입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그저 돈 벌어 오는 사람일 뿐 집 안에서의 존재감이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자녀들의 학업에만 신경을 쓸 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심리학자들은 이런 부재가정이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손가정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재가족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결손은 몇몇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가정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 일명 ‘부림절’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축제의 기원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벨론에 이어 바사, 즉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고 유대인들을 다스릴 때였습니다. 가장 높은 대신이었던 하만에게 일개 대궐 문지기였던 유대인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자 유대인을 멸절할 계획을 세우고 날짜를 잡기 위해 ‘부르’ 곧 제비를 뽑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잡힌 날에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을 멸절하려던 하만과 그의 모든 대적들을 진멸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손가정,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가정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결손가정, 아니 부재가족시대를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시대를 이끄는 리더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Ⅰ. 그렇다면 우리 가정이 어떻게 민족을 구원하고 시대를 이끄는 명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 - 얼마 전에 상담심리전문가인 한기연씨가 쓴 책,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라는 읽은 적이 있습니다. 충격적인 제목이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현대인들에게 가족은 사랑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구속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니까 하면서 쉽게 내뱉는 한마디가 자녀들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상황을 예로 들어 주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말은 행복, 따뜻함, 돌봄과 비슷한 말이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런 기분 좋은 말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가족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환상 속 가족과 현실 속 가족의 모습이 같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며 괴로워한다.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이상과 현실과의 차이는 결손가정 아닌 양부모가 있는 가정속에서도 쉽게 경험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사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야 하는 믿음의 가족 안에서도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가족이든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이든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바람을 피는 아빠와 끝없는 넋두리를 해대는 엄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던 한기연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가족은 존재하지 않고 내 가족도 수많은 불완전한 가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더욱 힘들었던 이유가 가족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 사실 결손가정이나 부재가정은 물론 대부분의 가정에서 우리가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족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문제가 있어. 이건 가족이 아니야’라는 잘못된 가족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닐까요? 아니요. 완벽한 가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며 조율해 가는 것이 믿음의 가족이 아닐까요?
- 생각해 보십시오. 모르드개와 에스더,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모르드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에스더 2장 5-6절 보세요.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 성경학자들은 여기에 모르드개는 모르드개의 부친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르드개 집안은 베냐민 자손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베냐민 자손입니다. 다시 말해서 포로로 잡혀온 왕족이었습니다. 한 때 왕족이었던 집안이 포로로 끌려와 대궐을 지키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모르드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왕의 혙통이 이방인의 왕이 있는 대궐을 지키는 노예가 되었다.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술로 인생을 탕진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어떻게 합니까? 에스더 2장 7절 보세요.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 그런 비참한 상황에 있었던 모르드개가 부모를 잃은 고아 에스더를 어떻게 양육했다고요? 에스더를 양딸로 삼아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둘 다 상처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갖고 있을 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자신의 신세를 서로 한탄하며 상처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르드개가 딸 같이 에스더를 양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생각해 보세요. 왜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저도 사람이잖아요. 기억하십시오. 이 사람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포로로 끌려와 인생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바로 모르드개의 신실한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신실한 사랑이 모르드개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 결손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 가난과 역경은 문제가 안입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 말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 우리 가정이 어떻게 민족을 구원하고 시대를 이끄는 명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 자녀를 양육하면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만 맹목적 사랑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지난 23년간 주일학교 사역을 해 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자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자녀들이 잘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다보면 자녀들이 이기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 요즘은 대부분의 가정에 자녀가 한 둘이다 보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해 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손이나 부재가정에서는 그 마음이 더 합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마음 때문에 자녀가 원하면 할 수 있는 한 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녀를 망치는 길입니다. 자연주의 교육자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책 “에밀”에서 말합니다.
“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주는 일이다”
- 모르드개가 볼 때 에스더는 얼마나 안쓰러웠을까요?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된 에스더를 볼 때마다 무엇이든 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자신만을 아는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면서 에스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하여 살아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에스더 4장 8절 보세요.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 무엇을 하라고요? 위기에 빠진 민족을 위해 왕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자녀에게 목숨을 담보로 해서 타인을 구하라고 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오히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자, 에스더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에스더 4장 11절 보세요.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 무슨 말이에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목숨만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그래, 그러니 애비가 잘 몰랐구나.’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에스더의 반응에 모르드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에스더 4장 13-14절 보세요.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 아버지 맞아요? 협박하는 걸까요? 아니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에스더의 반응입니다. 자, 협박과 같은 이런 모르드개의 말에 에스더가 어떻게 답합니까? 에스더는 4장 16절 보세요.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 뭐라고요?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선교지에 가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녀가 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붙들고 사는 삶의 가치를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양딸로 삼아 늘 이렇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겨 포로로 끌려와 페르시아의 밑바닥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꺼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나님이 포로를 돌려보내신 것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지, 그러기에 에스더야 잊지 말아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용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린다면 목숨이라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르드개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에스더에게 심어주었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치를 자녀들에게 심어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 가정이 어떻게 민족을 구원하고 시대를 이끄는 명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 - 지식이 어떤 정보에 대한 인식이라면 지혜는 그 정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에스더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 앞에서 섣불리 나가 민족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왕이 흡족하게 에스더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든 것입니다.
천국에 가신 하용조 목사님을 섬기던 비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목사님은 하목사님이 컨디션이 가장 좋을 때 들어가 사역에 대한 칭찬을 듣고 나오는데 지혜롭지 못한 목사님은 목사님이 가장 힘들어할 때 들어가 야단만 맞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다고 왕을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함부로 처리해 분노를 사서 폐위된 상황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폈습니다. 과연 그런지 에스더는 4장 16절 보세요.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 무엇을 부탁하고 있습니까? 금식을 부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탁월한 신약학자인 스캇 맥나이트는 “금식”이라는 책에서 금식의 핵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서 엄숙한 때를 맞을 때 금식은 불가피한 행동이다.. 어떤 순간이나 직면한 문제의 엄숙한 성격 때문에 육체를 지닌 인간이 일정 기간 육체적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 금식의 핵심이다.
- 무슨 말이에요? 금식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건의 표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가 금식한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그녀는 인생의 가정 절박하고 엄숙한 상황 앞에서, 아니 자신은 물론 자신의 민족의 운명이 걸린 현실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얻은 지혜로 이후 어려운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금식할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요? 확신하건대 그것은 모르드개에서 배운 것입니다. 에스더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모르드개를 떠올렸습니다. 에스더 2장 10절 보세요.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인 에스더가 왕후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에스더는 모르드개를 떠올리며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15절 보세요.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 모든 자에게 사랑을 받는 지혜로운 여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여기서도 에스더를 설명하면서 누구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르드개입니다. 왜요? 에스더의 지혜는 지혜로운 아비, 모르드개의 양육과 삶을 통해 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이 위대한 결손가정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결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랑 없는 가정, 믿음으로 사는 삶이 없는 가정, 지식은 가르치나 지혜가 없는 가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지난 5월 24일 조선일보에 6․25직후 고아들을 위해 직업학교를 세운 미국 선교사님 30명이 방한했습니다. 전쟁 직후 한국에서 20여 년간 전쟁고아들에게 직업교육을 해주며 그들을 보살펴주었던 선교사님들이 제자들과 50여 년 만에 다시 상봉한 것입니다.
경북 상주시 성동동에서 태어난 은씨는 6․25전쟁때 군무원이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지만 네 남매를 키울 형편이 안 되어 고아원에 맡겨진 그는 머리가 희끗해지도록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님들의 양육을 받는 그때 천국이 따로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양친을 잃고 중1 때 결핵에 걸렸던 김씨는 65세이 되어서도 트와일라 부부를 만나자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1 때, 결핵에 걸린 나를 매일 간호해준 투알라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분, 그래서 그때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당시 20대였던 투알라 선생님께 실례가 될까봐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그분은 나의 어머니였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돈이 없는 것이 결손이 아닙니다. 학원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결손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결손, 그것은 사랑과 믿음과 지혜의 부재한 가정입니다. 맹목적인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지 못한 부모,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하는 부모, 지혜보다 지식을 앞세워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 그 부모에게서 자라는 아이들이야말로 결손가정보다 더 심각한 결손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우리는 어떤 가정이 되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