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도
 
 말 씀 : 욥기 14:12-14, 히브리서 12:1-2



  미국 뉴욕의 랜드 마크의 하나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증한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자유의 여신상’에 있는 여인은 바르톨디 자신의 어머니가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인 여신상 모델을 찾아 나섰지만 흡족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로 이 표정이다”라고 하여 어머니를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우개입니다. 어떤 고통과 슬픔도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깨끗하게 지워집니다. 어머니는 회초리로 자녀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속으로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는 반딧불 같은 희망만 있어도 참고 기다리는 인내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머니가 그들 곁을 떠난 후에야 이 사랑을 깨닫습니다. 어머니들은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중요한 인간의 덕목입니다. 참을 ‘인’(忍)자는 칼 ‘도’(刀)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를 씁니다. 가슴 위에 칼을 두는 것이 참는 것입니다. 옛말에는 “마음 심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인간의 비극이 인내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을 보면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인간의 삶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 사회에서 ‘우발적’, ‘충동적’이란 말을 듣게 되는데 이 모두가 다 인내하지 못한 단어들입니다.
  베드로후서 1:5-7에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쌓아야 할 중요한 덕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신앙의 한 내용이며 모습입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하며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참을성 없는 사람을 ‘환자’(patientia)라 부릅니다. 인내란 말과 환자란 말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인내(patience)란 말은 ‘고통당하다’라는 뜻인 ‘patior’라는 고어에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참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참지 못하는 자가 환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4절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합니다. 7절에는 “모든 것을 참으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합니다. 사랑의 중요한 덕목은 참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랑이 시간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는 말은 사랑이 내용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무한한 것입니다. 만일 유한하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한 사랑이기에 무한한 인내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길이 참으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앞에 있는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 앞에 있는 십자가가 기쁨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라고 하셨는데 십자가가 어떻게 기쁨일 수가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나 생각으로는 십자가는 도저히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떻게 십자가를 참으셨을까요? 참혹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합니다. “앞에 있는 기쁨”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기쁨이란 십자가 너머에 있는 기쁨을 말합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삶의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 너머에 기쁨이 있고,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십자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해산하는 어머니는 해산이 끝이 아님을 압니다. 해산 후에 있을 자녀를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 해산의 고통은 참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가 끝이 아님을 압니다. 공부 후에 있을 성공과 성취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부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 후의 광야생활은 불평이 많은 삶이었습니다. 고통스런 여정이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소망을 강조하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나 특히 베드로 서신에 이 개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였을 때 이미 로마황제의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현실만 바라보면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란 앞에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순교자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같은 죽음을 참고 죽을 수 있는 것은 죽음 뒤에 있을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앞에 있는 것을 알면 기쁨을 가지며 넉넉히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6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근심은 잠깐이지만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이라는 또 다른 믿음입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을 성공한 리더의㰡위기탈출㰡‘교과서라고 합니다. 1914년 대원 27명과 함께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한 섀클턴은 대륙횡단에 실패하고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한의 고난을 극복하고 전원생환이라는 기적을 낳고 성공합니다. 그는 남극해에 진입하자말자 얼음 사이에 갇혀 배가 파괴되었습니다. 섭씨 영하 80도가 되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음과 싸웠습니다. 남극에서 2,000킬로미터를 헤맨 다음 2년 뒤에 전원이 생환했습니다.
  섀클턴의 일기에는 “인내”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와 모든 대원들이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인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을성’(patience)이란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뜻하며, ‘인내’(endurance)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과 얼음과 싸우면서 고통을 인내한 것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인내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그들이 극한 고통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다시 영국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고통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았기에 인내가 가능했습니다.
  스데반은 잠시 후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15에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곧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돌에 맞는 것도, 죽는 것도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현재의 십자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가 수고와 인내로 기다리므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합니다. 비록 눈물로 씨를 뿌리고, 땀 흘리는 농사의 수고가 있지만 농부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은 앞에 있을 추수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풍년을 생각하면 땀과 수고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일을 많이 하여 손마디가 굵고 늙었지만 얼굴만큼은 늘 웃음꽃으로 활짝 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머니를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동네 사람이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늘 그렇게 싱글벙글 하세요?” 할머니는 “이 나이에 어찌 늘 좋은 일만 있겠어요? 행복을 지키는 한 가지 비결이 있지요.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속삭인답니다. ‘사흘만 기다리자! 믿음으로 삼일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인내할 수 있고, 기쁨이 충만해진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삼일만 참으면 된다면 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참으심의 의미를 아셨습니다. 삼일 후에는 부활하실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 앞에서도 앞을 아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앞에 있을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면서 사흘만 참읍시다. 고난을 넘어 있을 새 생명을 알고 기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를 참으신 결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하반절에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인내와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의 인내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그 보상은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훗날 우리에게 주어질 최고의 보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보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의 보상입니다. 하나님과 한 상에 앉게 되는 것이 최고의 보상입니다.
  요한계시록 3:21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에 함께 계시고, 우리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 우편은 최고의 영광의 자리입니다. 이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은 결과로 얻는 영광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는 표현은 즉위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의 인용이라고 합니다. “앉으셨느니라”라는 말은 ‘케카디켄’이란 단어로 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 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른 편이란 사람의 고상한 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른 손 또는 오른 뺨이라는 말은 좋은 쪽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른 편은 또 신의 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편이란 좋은 편이며, 옳은 편이며, 힘이 있는 편이며, 구원의 편이며, 하나님의 편입니다. 우편은 십자가로 얻는 편입니다.
  오른편은 좋은 편이며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에 양의 편이기에 기독교인들은 오른 쪽에 민감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부탁하여 낙원에 들어간 강도가 한 편의 강도라고 하지만 어떤 이는 오른편의 강도라고 우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은 결과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성공적 스포츠 에이전트인 마이크 맥코믹은 성공의 90%는 어떠한 형태로든 인내를 요구하고 있으며 실패의 90%는 상당 부분 인내의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인내는 성공을 가져다주며 특히 신앙의 인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성공을 얻게 합니다.
  전 헤비급 챔피언 제임스 J. 코벳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는지 묻자 그는 “한 라운드를 더 싸우면 이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싸우면, 조금만 더 참으면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옛날에 어떤 노인에게 젊은 무사가 찾아와 괜히 시비를 걸며 싸움을 걸었습니다. 무사는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지만 노인은 그저 묵묵히 참고만 있었습니다. 무사는 한참 동안 욕을 하더니 실망을 했는지 떠나가 버렸습니다. 스승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노인에게 왜 모욕을 참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스승은 제자들에게 되물었습니다. “누군가 너희들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받지 않았다고 하자. 그럼 그것은 누구의 것이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것을 주려던 사람의 것이지요.” 스승은 “분노와 미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분노와 미움을 준 그 사람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참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신앙세계의 이치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그 자체가 승리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대가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뛰어난 협상가들에게 기다림이 무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곡식이 다 익을 때까지 참고 일하는 사람만이 익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결론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시험 시간이 새벽 4시라고 하였습니다. 이른 시간이지만 취직이 어려운 때라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회사 문 은 잠겨 있었습니다. 문이 잠긴 것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기다리다 실망하여 불평하면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몇 사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9시가 되자 회사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시험관은 “이름은 무엇이지요?”, “1더하기 1은 얼마이지요?”, “사람의 팔이 몇 개이지요?”라는 식의 엉뚱한 질문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끝났으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며칠 후 끝까지 남아 있던 몇 사람에게 합격통지서가 왔습니다. “우리 회사 시험에 합격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시간을 지키는데 합격하였습니다. 4시 정각에 온 것을 보았습니다. 인내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격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평범하고 짜증내기 쉬운 질문에 화내지 않고 온화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회사가 필요로 하는 시간시키기, 인내, 원만한 성격, 세 가지를 다 충족하여 합격하였습니다.”
  인내는 중요한 성경적 덕목인데 예수님은 이 덕목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9에는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참으심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모진 고통을 참으시고 이루신 우리의 구원을 감사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날마다 우리 구원을 감사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