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시선
성경 : 눅22:54-62
♦. 서
론
사람의 몸에서 쓸모없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들은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모든 것을 보는 기관입니다. 만약에 볼 수 없다면 참 힘들고 불편한 삶을 살아갑니다.
시선은 눈의 보는 길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것에 눈이 가는 것을 시선이 갔다라고 말합니다. 하루에도 수 만 가지의 것들을 눈을 통해서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므로 한 사람이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는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게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닭울음소리가 들리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봅니다. 그 닭소리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생각은 베드로자신이 비참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가서 통곡을 합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많은 시선을 받게 되고 또 시선을 주기도합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도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시선은 한
사람의 생을 바꾸는 아주 중요한 시선이었습니다.
♣. 멀찍이 따라 가니라.(54-55)
군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는 것은 당시 종교적인 면에서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마26:25에서“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고 하여 이곳에
이스라엘 지도층이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힘이란 당시 유대인사회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이들은 드디어
잡혀서 결박된 예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들과 정반대의 노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들을 대적하는 예수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 계획합니다. 마26:4에서“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라고 하여 벌써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이루어졌으며 요11:53에서“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하였던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발견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잡혔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현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 잡혀가신 예수님의 뒤를 멀찍이 따라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눅22:54에서는 그 사람을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놀랍게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려내며,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던 예수님이 그렇게 힘없이 잡히신 것에 대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점 때문에
예수님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이 어떻게 되며 종교재판에서 어떻게 판결이 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마26:56절에서“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는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마26:58을 보시면“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눅22:33에서“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결국을 알기 위해서 대제사장집의 뜰에 앉았습니다. 눅22:55을 보시면“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라고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더 이상 가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힌 상황에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자신도 잡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알지 못하노라.(56-60)
불을 쬐면서 예수님의 재판의 결과를 알기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베드로만은 지금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중요한 문제로 어떤 결과를 기다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잡혀서 법적인 문제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불안하기도하지만 그렇게 워낙에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 곧 풀려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이 불빛에 비취는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이“이 사람도 그 와
함께 있었느니라”(눅22:56)고 외칩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순간 반사적으로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외칩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베드로는 펄쩍뛰며 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해”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얼마나 놀랬습니까? 순간 자신의 생각의
두려움과 자신도 예수님처럼 잡히면 안된다는 자기보호본능에 의해서 나오는 말이 자신을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눅22:58을 보시면“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고 하여
예수님을 두 번째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마도 감람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이 사람은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자신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눅22:59을
보시면“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현대어번역에서는“한 시간쯤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이 강경하게 나는 이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다 알고 있소 둘다 갈릴리
사람이라 말이오”라고 확신에 찬 말을 하자 베드로는“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표현은“이 사람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네”라고 하여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생각합니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나 저나 여러분이나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위험에 처하면 우선 자신을 보호하려는
말이나 행동을 취합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므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곧 발견합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실수 안하고 완전한 것처럼 실수하거나 범죄한 사람을 정죄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누구나 연약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일만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 예수님의 시선.(61-62)
눅22:59을 보시면“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하여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있게 말합니다.
이 한사람은 누구인지를 요18:26으로 보면“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여 대제사장의 종‘말고’의 귀가 베드로에 의해 베어짐을 당할 때 함께 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는 ‘말고’의 친척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자기 친척의 귀가 베었는데 왜 베드로를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눅22:60에서“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고 하여
베드로의 부인이후 놀랍게도 닭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베드로는 눅22:61을 보시면“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도 잡혀 재판중이신 예수님과 시선을 마주쳤습니다. 인생이 살다가 보면 이런 마주침이 있습니다.
참으로 고약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눅22:33을 보시면“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하고 자신있게 자신의 결심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굳게 결심하였던 마음대로 예수님을 지켜주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의 행동이
바로 떠올랐고 또 예수님께서“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닭울음소리는 베드로의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닭울음소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닭울음소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알게
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소리였고 주체할 수없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눅22:62을 봅시다.“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하여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뛰쳐나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더불어 행동할 수 없는 일을 생각만으로 자신있게 장담하였던 자신이 한없이 한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살다가 보면 이런 경우를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이요 연약함이 아닙니까? 왜 통곡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심히’애끊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말씀이 역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베드로를 더욱 마음 아프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말한 것도 한마디도 지키지 못함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무능함을 인하여 자괴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행동을 우리는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의 약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자만하고 교만하며 거만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지요. 만만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때가 있고, 실망하여 넘어질 때가 있으며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베드로를 보시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단지 시선만 두실뿐입니다. 정죄하지도, 꾸짖지도 않으시고, 야단치시지도 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에 대하여 인자한 눈길로, 사랑의 눈길로, 긍휼의 눈길로 보시기만하십니다.
모든 잘못과 실수를 다 받아주시는 눈길로
그래나는 널 안다. 네가 그렇게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였어도 나는 널 받아주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눈길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 결 론
베드로의 통곡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요 말씀을 통한
깨우침이요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회개와 더불어 예수님을 향한 새로운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새로운 삶을 향한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요 신뢰였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마음의 전부였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베드로를 보시기만 하였습니다. 아무런 말씀이나 질책이나 꾸중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보시기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이렇게 부드럽게 우리를 향하여 있습니다. 요1:42에서“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하시므로 이미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면만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심령까지도 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모든
것을 보시고 고치시고 싸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눅22:31-32을 보시면“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시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지라도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앞으로 형제들을 굳게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시선을 마주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보십니다. 사랑의 눈으로, 긍휼의 눈으로 보시고 인자하신 눈으로 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하시는 눈으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역대하16:9에서“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고 하시어 하나님도 우리를 보고 계시며 잠15:3에서도“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보고 계심을 알게 하십니다.
나를 보시는 예수님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요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