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예수

  성경 : 눅23:13-25

          ♦. 서     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재판 중에 있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는 그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거라는 소식이 들리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시는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적어도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법과 세상의 제도 아래서 예수님이 사형을 언도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이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기까지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 사실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하고 죄용서 받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언도는 내가 받아야 옳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도 내가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모든 수모와 희롱과 업신여김 당하시는 것도 내가 당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셨으니 고후5:14-15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당하시고 사형수가 되셨습니다.

          ♣. 이 사람은 죄가 없다(13-17)

   예수님을 만난 헤롯은 자기 생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으로 왔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조사하고 또 들어봐도 사형을 당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온 것은 재판이 헤롯에 의해 끝나지 않았고 다시 빌라도에게 그 권한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풀어줄 수 있었지만 무리들이 고소하였기에 고소자 들을 모아서 재판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려고 무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눅23:14에서“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심문의 정당성과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헤롯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눅23:15에서“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헤롯도 그냥 보내었다면 예수님이 정말 죽일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눅23:15절의 후반 절에서“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 이름대로 사람을 사랑하신 일이고 구원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아버지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예수님은 눅19:10을 보시면“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막10:45에서“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셔서 섬기려 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 물로 우리를 위해 주려고 오셨다 하십니다.

   마11:5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또 나오는데“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심은 침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이신가를 물을 때 답하신 것입니다.

   마9:35에서도“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서 하신일이 이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일입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때려서 석방시키겠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죄 없으심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죄 있으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고소하지 않아도 그들이 고함치지 않아도 죄가 있다면 먼저 로마정부당국에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 무리의 요구(18-21)

   빌라도의 판결에 대하여 무리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눅23:18에서“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이 사람을 없이하고”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사람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셨기에 모함 받으셨고, 고발당하셨으며 참소당하시고, 무시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는데 이 바라바는 누굽니까? 눅23:19에서“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고 하여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줍니다. 아마도 바라바는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을 위해 로마군과 싸우다 잡힌 자로 알려집니다.

    그 백성들이 볼 때에 오히려 바라바가 실제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눈에 보이고 로마와 싸운 사람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바라바는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였기에 더 친근감이 있고 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바라바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추종했다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독립이나 로마정부로부터 해방에 대한 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제 예수님을 향하여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무리들이 외침 속에서도 빌라도의 끊임없는 생각에는 바로 예수님을 석방시켜야한다는 중심이었습니다. 눅23:20을 보시면“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라고 하는 표현은 빌라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21절에서 무리들은“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계속에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사형시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율법아래서 율법으로 세워진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늘 그렇게 요구합니다. 지금도 율법의 사람들이 마음에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십니다. 아들 예수님을 사형수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하십니다.

          ♣♣♣. 예수를 넘겨주어(22-25)

   빌라도는 헤롯에 의해서 자신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바르게 재판하고자합니다. 두 번째 재판의 현장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재판에서 눅23:22을 보시면“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여 재판을 끝내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들이 사형에 해당할 만한 무거운 중한 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나?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을 만한 죄목이나 그 악한 일이나 어떤 증거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고함만 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들은 큰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대로 자기주장대로 나갔다가는 큰 폭동이 일어날 것을 감지했습니다. 만약이 이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빌라도는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황제에 의하여 면책을 당할 것이고 직위 해제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눅23:23을 보시면“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하여“저희소리가 이긴지라”는 표현은 빌라도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무리들은 계속해서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바라바는 석방시켜라하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맙니다. 눅23:24을 보시면“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하므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입니까?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무리들이었습니다. 병 고침의 현장에서 함께 보았고, 귀신을 좇아내는 현장에도 있었고,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또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순식간에 돌변해서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대세의 움직여 버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군중들은 어떤 목표의식도 없이 일부 이끄는 무리들에 의해 조종을 받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의하여 사형의 형장으로 인도되어져 갑니다. 눅23:25을 보시면“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벌써 죽었어야할 바라바는 석방을 받고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일이란 이렇게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위해 일 하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아주 냉정합니다. 세상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결     론

   빌라도는 이제 더 이상의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 무리들을 대적하기에는 자신에게 너무 큰 문제로 닦아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연약함이었습니다.“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결국 예수님을 사형에 집행하도록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죄는 더 크다는 것을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요19:11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어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쓰지만 요19:12에서“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여 만약에 자신이 예수님을 석방하면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에 빌라도는 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최종언도를 하는 자리에서“보라 너희 왕이다”라고 소개할 때 유대인들은 요19:15에서“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라고 하여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라고 외칩니다.

   자신들의 왕이신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순간에 왕을 가이사로 바꿔버리는 유대인의 행위는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을 사형시키려하는 의도입니다. 그들은 바라바의 삶이나 행위가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바라바라고 믿었기에 바라바를 구출하려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는 것 위주의 믿음생활하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다 쉽고 편하게 믿음생활하려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신자들은 바라바를 추구합니다. 금방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잘 되기를 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신비한 사상과 말이나 현상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씀과 영적인 삶과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서는 이스라엘이 로마정부로부터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이 빼앗기고 현 위치가 위협이 되는 것을 알게 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신들이 심판과 벌을 받게 됨을 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살며, 말씀으로 살며, 오직 예수님을 소망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을 동일합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형수가 되신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면 지금도 사형수로 예수님을 만들지만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의지하는 이들은 빌3:20처럼“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 함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삽니다.
사형수 예수

  성경 : 눅23:13-25

          ♦. 서     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재판 중에 있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는 그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거라는 소식이 들리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시는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적어도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법과 세상의 제도 아래서 예수님이 사형을 언도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이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기까지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 사실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하고 죄용서 받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언도는 내가 받아야 옳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도 내가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모든 수모와 희롱과 업신여김 당하시는 것도 내가 당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셨으니 고후5:14-15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당하시고 사형수가 되셨습니다.

          ♣. 이 사람은 죄가 없다(13-17)

   예수님을 만난 헤롯은 자기 생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으로 왔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조사하고 또 들어봐도 사형을 당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온 것은 재판이 헤롯에 의해 끝나지 않았고 다시 빌라도에게 그 권한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풀어줄 수 있었지만 무리들이 고소하였기에 고소자 들을 모아서 재판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려고 무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눅23:14에서“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심문의 정당성과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헤롯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눅23:15에서“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헤롯도 그냥 보내었다면 예수님이 정말 죽일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눅23:15절의 후반 절에서“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 이름대로 사람을 사랑하신 일이고 구원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아버지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예수님은 눅19:10을 보시면“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막10:45에서“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셔서 섬기려 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 물로 우리를 위해 주려고 오셨다 하십니다.

   마11:5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또 나오는데“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심은 침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이신가를 물을 때 답하신 것입니다.

   마9:35에서도“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서 하신일이 이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일입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때려서 석방시키겠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죄 없으심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죄 있으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고소하지 않아도 그들이 고함치지 않아도 죄가 있다면 먼저 로마정부당국에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 무리의 요구(18-21)

   빌라도의 판결에 대하여 무리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눅23:18에서“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이 사람을 없이하고”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사람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셨기에 모함 받으셨고, 고발당하셨으며 참소당하시고, 무시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는데 이 바라바는 누굽니까? 눅23:19에서“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고 하여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줍니다. 아마도 바라바는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을 위해 로마군과 싸우다 잡힌 자로 알려집니다.

    그 백성들이 볼 때에 오히려 바라바가 실제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눈에 보이고 로마와 싸운 사람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바라바는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였기에 더 친근감이 있고 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바라바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추종했다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독립이나 로마정부로부터 해방에 대한 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제 예수님을 향하여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무리들이 외침 속에서도 빌라도의 끊임없는 생각에는 바로 예수님을 석방시켜야한다는 중심이었습니다. 눅23:20을 보시면“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라고 하는 표현은 빌라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21절에서 무리들은“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계속에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사형시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율법아래서 율법으로 세워진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늘 그렇게 요구합니다. 지금도 율법의 사람들이 마음에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십니다. 아들 예수님을 사형수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하십니다.

          ♣♣♣. 예수를 넘겨주어(22-25)

   빌라도는 헤롯에 의해서 자신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바르게 재판하고자합니다. 두 번째 재판의 현장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재판에서 눅23:22을 보시면“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여 재판을 끝내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들이 사형에 해당할 만한 무거운 중한 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나?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을 만한 죄목이나 그 악한 일이나 어떤 증거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고함만 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들은 큰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대로 자기주장대로 나갔다가는 큰 폭동이 일어날 것을 감지했습니다. 만약이 이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빌라도는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황제에 의하여 면책을 당할 것이고 직위 해제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눅23:23을 보시면“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하여“저희소리가 이긴지라”는 표현은 빌라도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무리들은 계속해서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바라바는 석방시켜라하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맙니다. 눅23:24을 보시면“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하므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입니까?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무리들이었습니다. 병 고침의 현장에서 함께 보았고, 귀신을 좇아내는 현장에도 있었고,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또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순식간에 돌변해서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대세의 움직여 버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군중들은 어떤 목표의식도 없이 일부 이끄는 무리들에 의해 조종을 받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의하여 사형의 형장으로 인도되어져 갑니다. 눅23:25을 보시면“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벌써 죽었어야할 바라바는 석방을 받고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일이란 이렇게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위해 일 하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아주 냉정합니다. 세상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결     론

   빌라도는 이제 더 이상의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 무리들을 대적하기에는 자신에게 너무 큰 문제로 닦아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연약함이었습니다.“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결국 예수님을 사형에 집행하도록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죄는 더 크다는 것을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요19:11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어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쓰지만 요19:12에서“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여 만약에 자신이 예수님을 석방하면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에 빌라도는 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최종언도를 하는 자리에서“보라 너희 왕이다”라고 소개할 때 유대인들은 요19:15에서“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라고 하여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라고 외칩니다.

   자신들의 왕이신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순간에 왕을 가이사로 바꿔버리는 유대인의 행위는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을 사형시키려하는 의도입니다. 그들은 바라바의 삶이나 행위가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바라바라고 믿었기에 바라바를 구출하려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는 것 위주의 믿음생활하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다 쉽고 편하게 믿음생활하려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신자들은 바라바를 추구합니다. 금방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잘 되기를 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신비한 사상과 말이나 현상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씀과 영적인 삶과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서는 이스라엘이 로마정부로부터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이 빼앗기고 현 위치가 위협이 되는 것을 알게 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신들이 심판과 벌을 받게 됨을 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살며, 말씀으로 살며, 오직 예수님을 소망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을 동일합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형수가 되신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면 지금도 사형수로 예수님을 만들지만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의지하는 이들은 빌3:20처럼“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 함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삽니다.
제목 : 사형수 예수

  성경 : 눅23:13-25

          ♦. 서     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재판 중에 있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는 그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거라는 소식이 들리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시는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적어도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법과 세상의 제도 아래서 예수님이 사형을 언도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이십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기까지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 사실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하고 죄용서 받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언도는 내가 받아야 옳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도 내가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모든 수모와 희롱과 업신여김 당하시는 것도 내가 당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셨으니 고후5:14-15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당하시고 사형수가 되셨습니다.

          ♣. 이 사람은 죄가 없다(13-17)

   예수님을 만난 헤롯은 자기 생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으로 왔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조사하고 또 들어봐도 사형을 당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온 것은 재판이 헤롯에 의해 끝나지 않았고 다시 빌라도에게 그 권한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풀어줄 수 있었지만 무리들이 고소하였기에 고소자 들을 모아서 재판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려고 무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눅23:14에서“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심문의 정당성과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헤롯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눅23:15에서“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헤롯도 그냥 보내었다면 예수님이 정말 죽일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눅23:15절의 후반 절에서“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 이름대로 사람을 사랑하신 일이고 구원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아버지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예수님은 눅19:10을 보시면“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막10:45에서“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셔서 섬기려 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 물로 우리를 위해 주려고 오셨다 하십니다.

   마11:5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또 나오는데“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심은 침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이신가를 물을 때 답하신 것입니다.

   마9:35에서도“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서 하신일이 이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일입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때려서 석방시키겠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죄 없으심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죄 있으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고소하지 않아도 그들이 고함치지 않아도 죄가 있다면 먼저 로마정부당국에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 무리의 요구(18-21)

   빌라도의 판결에 대하여 무리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눅23:18에서“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이 사람을 없이하고”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사람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셨기에 모함 받으셨고, 고발당하셨으며 참소당하시고, 무시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는데 이 바라바는 누굽니까? 눅23:19에서“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고 하여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줍니다. 아마도 바라바는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을 위해 로마군과 싸우다 잡힌 자로 알려집니다.

    그 백성들이 볼 때에 오히려 바라바가 실제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눈에 보이고 로마와 싸운 사람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바라바는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였기에 더 친근감이 있고 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바라바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추종했다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독립이나 로마정부로부터 해방에 대한 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제 예수님을 향하여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무리들이 외침 속에서도 빌라도의 끊임없는 생각에는 바로 예수님을 석방시켜야한다는 중심이었습니다. 눅23:20을 보시면“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라고 하는 표현은 빌라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21절에서 무리들은“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계속에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을 사형시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율법아래서 율법으로 세워진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늘 그렇게 요구합니다. 지금도 율법의 사람들이 마음에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십니다. 아들 예수님을 사형수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하십니다.

          ♣♣♣. 예수를 넘겨주어(22-25)

   빌라도는 헤롯에 의해서 자신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바르게 재판하고자합니다. 두 번째 재판의 현장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재판에서 눅23:22을 보시면“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여 재판을 끝내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들이 사형에 해당할 만한 무거운 중한 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나?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을 만한 죄목이나 그 악한 일이나 어떤 증거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고함만 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들은 큰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대로 자기주장대로 나갔다가는 큰 폭동이 일어날 것을 감지했습니다. 만약이 이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빌라도는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황제에 의하여 면책을 당할 것이고 직위 해제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눅23:23을 보시면“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하여“저희소리가 이긴지라”는 표현은 빌라도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무리들은 계속해서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바라바는 석방시켜라하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고 맙니다. 눅23:24을 보시면“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하므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입니까?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무리들이었습니다. 병 고침의 현장에서 함께 보았고, 귀신을 좇아내는 현장에도 있었고,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도 함께하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또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순식간에 돌변해서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대세의 움직여 버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군중들은 어떤 목표의식도 없이 일부 이끄는 무리들에 의해 조종을 받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의하여 사형의 형장으로 인도되어져 갑니다. 눅23:25을 보시면“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벌써 죽었어야할 바라바는 석방을 받고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일이란 이렇게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위해 일 하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아주 냉정합니다. 세상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결     론

   빌라도는 이제 더 이상의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 무리들을 대적하기에는 자신에게 너무 큰 문제로 닦아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연약함이었습니다.“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고 하여 결국 예수님을 사형에 집행하도록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죄는 더 크다는 것을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요19:11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없어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쓰지만 요19:12에서“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여 만약에 자신이 예수님을 석방하면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에 빌라도는 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최종언도를 하는 자리에서“보라 너희 왕이다”라고 소개할 때 유대인들은 요19:15에서“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라고 하여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라고 외칩니다.

   자신들의 왕이신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순간에 왕을 가이사로 바꿔버리는 유대인의 행위는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을 사형시키려하는 의도입니다. 그들은 바라바의 삶이나 행위가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바라바라고 믿었기에 바라바를 구출하려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는 것 위주의 믿음생활하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다 쉽고 편하게 믿음생활하려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신자들은 바라바를 추구합니다. 금방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잘 되기를 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신비한 사상과 말이나 현상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따르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씀과 영적인 삶과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서는 이스라엘이 로마정부로부터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이 빼앗기고 현 위치가 위협이 되는 것을 알게 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신들이 심판과 벌을 받게 됨을 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살며, 말씀으로 살며, 오직 예수님을 소망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을 동일합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형수가 되신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면 지금도 사형수로 예수님을 만들지만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의지하는 이들은 빌3:20처럼“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 함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