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섬긴 여인들 ②

 

< 본문 - 누가복음 8:1-3 >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은 ‘20세기 동양의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 중 한 분입니다. 한자이름인 하천풍언(賀川豊彥, 1888-1960)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가와 도요히꼬는 일본의 고위 공직자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다섯 살 때 어머니마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첩의 자식이었던 그는 아버지 없이 아버지의 본부인 집에 들어가 의붓 형제들 사이에 얹혀살게 됩니다. 아버지 없이 의붓형제들 사이에 얹혀사는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12살 되는 해, 외로이 담장 밑에 쪼그려 앉아서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던 그의 앞으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지나가는 전도행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전도대의 외침을 듣는 순간 그는 몇 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나 같은 기생의 자식도, 첩의 자식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는 그 길로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이름은 가가와 도요히꼬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이제 기생의 자식도 아니고 첩의 자식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 2학년이던 19살 때에 그는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당시 폐결핵은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가 폐결핵에 걸리자 가족도 교회도 모두 그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 교회의 모습인가?’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그는 어느 수요일 저녁,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길을 가다가 허름한 한 교회를 발견하고는 마지막으로 기도라도 해 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교인이라곤 한 명도 없던 그 교회에 한 청년이 오자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에 그는 각혈을 하게 되었지만, 그 교회 목사님은 그 피를 손으로 직접 닦아내고는 새로운 음식을 내다 주었습니다. 가가와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그는 그 목사님의 집에서 얼마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기적적으로 폐결핵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고베신학교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가가와는 고베의 빈민굴에 들어가 인생의 막장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빈민굴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복음을 전하면서 중국의 빈민굴에 들어가 동일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이런 가가와 목사님의 희생적인 삶에 크게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장개석 총통과 그의 부인입니다.

  1945년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을 맺었습니다. 그 때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은 포고령 1호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철수하는 일본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는 일본군인과 일본 민간인들이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200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있었지만, 장개석 총통의 포고령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고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내 민족의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지금도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가가와 목사를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다.” 장개석 총통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2년 전부터 1년에 두 번씩 대만에 있는 신학원에 가서 강의를 합니다. 대만에 가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는 대만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은데, 대만은 일본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입니다. ‘왜 대만 사람들은 50년 동안이나 식민통치를 받았는데도 일본 사람들을 좋아할까?’ 그 이유가 궁금하던 중에 그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더 긴 50년 동안이나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우호적인 이유는 그 바탕에 중국에서 대만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던 장개석 총통이 있었습니다. 그 장개석 총통을 감동시킨 일본인 목사님 때문입니다. 바로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 말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워 희생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시아를 전부 집어삼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복음을 들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목사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일본 사람들은 테러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 한 사람이 대만이라는 한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섬김은 그렇습니다. 비록 그것이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때로 그 영향력은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기생의 자식’이라는 부끄러운 과거, 첩의 자식으로 멸시 받고 자란 부끄러운 과거, 페결핵으로 인생의 사형선고를 받은 부끄러운 과거, 그 모든 부끄러운 과거가 그를 복음으로 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부끄러운 과거가 그로 섬김의 삶을 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막달라 마리아 역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사람’이라는 그 부끄러운 과거가 예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는 감추고 싶은 과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교회 때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요한을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만이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가장 먼저 무덤을 찾아간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고,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면, 그 핵심적인 사건의 산 증인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라는 말이 별명처럼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할 때 굳이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과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부끄러운 과거보다도 더 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긴 또 다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이름이 언급된 다른 두 사람이 있는데 요안나와 수산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을 수식하는 공통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나와 있는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악귀를 쫓아냈셨다’는 말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적용된 말이라면, ‘병고침을 받은 여자들’이라는 말은 요안나와 수산나를 수식하는 말일 것입니다.

  요안나를 수식하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라는 말입니다. 요안나의 남편은 헤롯 왕의 청지기였습니다. ‘헤롯의 청지기’라는 말은 헤롯 왕의 재산 관리를 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왕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왕이 얼마나 신임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 왕들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경호책임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경호책임을 맡겼습니다. 두 번째가 음식 책임자입니다. 왕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타서 왕을 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 수 있는 사람에게 음식을 맡깁니다. 그 다음으로 신임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맡깁니다. 우리도 그런 것처럼 돈을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철저하게 신뢰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안나의 남편 구사가 그렇게 헤롯 왕에게 신임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안나의 남편 구사는 헤롯 왕궁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요안나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추정해 보건대, 요안나는 심한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주님을 만났고, 주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고침을 받고 난 이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요안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는 은총을 경험한 사람입니다.(누가복음 24:10) 이로 보건대 성경에서 종종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라는 말 속에 이 요안나가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안나 역시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 현장에서 친히 예수님을 보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오늘 본문에서 이 요안나를 소개하면서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면 헤롯 왕궁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헤롯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귀족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가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아내 요안나 역시 왕궁에서 기거하던 귀부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왕궁에 기거하던 귀부인이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자 함입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모든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약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의 이력에 내세울만한 것들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갈릴리 출신입니다.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은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먹을 것도 없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들녘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 모인 5천 명 가운데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 사람은 어린아이 한 명 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섬기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촌놈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당시 사회에서 내세울 만한 이력은 없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갈릴리에서 자라난 ‘갈릴리 사람’입니다. 남들처럼 그럴듯한 학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 요셉마저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사회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을만한 어떤 조건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궁에 기거하는 귀부인이 그런 천민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왕궁의 귀족 출신의 여인까지도 마음을 움직여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천민 같은 사람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게 만들었습니까? 그게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신분의 귀천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그 능력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그렇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헬라인은 이방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이방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쉽게 말입니다. 거꾸로 헬라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야만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런 교만을 꺾고 모두를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3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3:1절에 안디옥 교회를 섬기던 지도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그리고 사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사람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입니다. 시므온은 ‘니게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니게르라는 말은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좋게 표현해서 ‘흑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말씀드립니다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해서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검둥이’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루기오 역시 구레네 출신의 검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루기오’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 로마식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는 로마의 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양아들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루기오’라는 이름은 당시 노예들에게 붙여진 가장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루기오’는 흑인 노예였을 것입니다.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나엔은 헤롯과 함께 자랐던 왕족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학식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 때 교회를 핍박하는데 열을 올리던 사람입니다.

  이렇듯 안디옥 교회에는 정통적인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도 있었고, 마나엔과 같은 왕족 출신도 있는가 하면 노예출신도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교회에 헌금했던 모범적인 신앙인도 있는가 하면 한 때 교회를 핍박하는데 열을 올리던 박해자도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교회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데 빈부귀천이 없이 모두가 교회를 함께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을 가졌든, 그리고 지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힘을 모아 사역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내가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네’ 하고 내세우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은 지난날 자신의 자랑 거리가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 신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삶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요즘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주말극 가운데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라는 말을 유행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것도 아니고 예선에서 떨어진 것을 가지고도 마치 유세를 부리듯 걸핏하면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를 외쳐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요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신분이나 현재의 신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 짓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모든 화려했던 과거를 내려놓을 때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그런 우리를 통해서 천국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인 귀부인 요안나가 예수님을 섬겼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는 모든 지난날의 과거 허물을 덮어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당시 헤롯 왕은 윤리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던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여버렸습니다. 그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그런 헤롯을 예수님께서는 ‘여우’라고 불렀습니다.(누가복음 13:31-32) ‘교활하고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해치려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런 헤롯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이 요안나의 남편입니다. 그렇다면 요안나의 남편 역시 귀족이라는 권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결코 옳은 일을 하려 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요안나는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저런 헤롯을 섬겨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제자들 입장에서도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헤롯을 가까이 섬기는 구사의 아내가 자기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성경은 과감하게 ‘요안나는 그런 헤롯 왕의 청지기였던 구사의 아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일곱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또 요안나는 병들었다가 고침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헤롯의 청지기인 남편의 권력으로 보거내 당대 유명한 의사들을 다 만나 치료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에게서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치료받지 못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요안나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불치병으로 고생했다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병고침을 받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지난날 어떤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고 다 덮어줄 수 있는 곳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안디옥 교회는 노예라는 부끄러운 과거나 교회를 핍박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런 과거를 따지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게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해내려 합니다. 그런 못된 습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부끄러운 과거는 감춰지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과거나 허물은 자꾸만 들춰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납하시며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내지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뿐입니다.

 

  미국 구세군에 ‘성결의 교사’(Teacher of holiness)라고 불리던 사무엘 브랭글(Samuel Logan Brengle)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예수님의 멋진 제자’가 되는 것을 꿈꾸며 목사가 되려고 하다가, 때마침 미국을 방문한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 사령관에게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군세군의 사관이 되기 위해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윌리엄 부스가 처음으로 그에게 준 임무는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런 임무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브랭글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무식한 어부들의 발위로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지난날의 허물까지도 용납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오늘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찾으시는 내 이름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