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엡 5:15-21)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은 오직 한번뿐인 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두 번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번뿐인 이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바로 이점을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그 구성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전반부는 바로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그
‘믿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믿는 우리 크리스찬은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윤리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윤리는 이런 일반적 윤리와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일반적인 윤리란
‘가치관’을 말하고 ‘유익’을 말하며, ‘화평’을 말하고 ‘의’를 말하며, 혹은 ‘상호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겠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윤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란 이런 것과는 그 근본에서부터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말이 공자님의 말씀에도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그래서 화평하고 하나 되고……’ 이런 것들은 성경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만 가지고서는 기독교의 윤리를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근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그 거룩한 뜻 안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기독교윤리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랑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서—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하니라!!’ ―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바로 이런 삶―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바로 이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혜! ―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이
지혜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로부터 주신 지혜’, 그리고 ‘땅에서 오는 지혜’ ―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같은 ‘지혜’라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고 사람들이 땅에서 만들어내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지혜’라고 ― 둘 다를 같은
‘지혜’라는 말로 지칭하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지혜이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소위 지혜라는 것은
‘지혜’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재주’인 것입니다.
이 ‘지혜’에
대하여 ‘라인홀드 니버’라고 하는 분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영어 그대로 읽어드린다면 이렇습니다.
“Oh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오 하나님, 저에게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함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둘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여기 보면,
하나님께 ‘내게 이런 것을 주옵소서’하고 세 가지를 구합니다. 바로 겸허함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serenity’, 이것은 ‘겸허, 침착, 또는
냉정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the serenity to accept’ ― 내가 할 수 없는 것,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함, 냉정함, 침착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이제 받아들여야지요! 누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은 아이 자꾸 들춰보면서 울기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the courage to change’ ―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고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뻔히 할 수 있는 일인데 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왜요? ― 용기가 없어서입니다. 그런고로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 이제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참으로 중요한 기도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관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 시편
90편 12절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날 수를 모르는 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위에서 중한 병으로 입원하여서 “내가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을 그거 막연하게만 생각하였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구체적으로 온다는 것을 심각하게
알았더라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는 다른 생을 살았을 것이다”―이렇게 후회하듯 말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당신 지금 나이가 얼마요?
앞으로 얼마나 살 것 같소? 가진 것이 얼마정도면 될 것 같소?’ 하고 물어보십시오. 혹 어떤 사람은 ‘얼마만 가지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런 사람! ― 미련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다 쓰고 죽어라” 하는 그런 책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정말 옳은 말입니다. 다 쓰지 못하고 죽으면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오늘이라도 죽었다고 할 때, 재산이 남았습니다. 누가 가질는지를 모르는 그런 재산이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약간의 재산이 있는데, 이것을 놓고 자녀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형제간의 화목은 벌써 옛날에 금이 갔고, 서로들
‘으르렁’ 다투기만 하고 있습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저 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인 채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것 모으느라고 착한 일 한 번도 못해보고, 헌금도
한번 크게 해보지도 못하고,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러고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거든요.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입니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주세요. 내 나이를 알게 해 주세요’ 라는 말씀은 ‘내 나이에 걸맞게 살도록 해 주세요. 나잇값을 하게 해 주세요’ 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라고 했을 때, 이 시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Real Time이 있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우리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흘러가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real time—실제시간’이 우리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는 ‘physical ti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시간입니다. 시간과 함께 우리는 자꾸 늙어가지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앞으로 몇 시간 남은 것
같습니까?
바로 그 시간! ― 이것이 physical
time입니다.
다음은
‘psychological time’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적 시간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대단히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과 같이 있으면 왜 그리도 시간이 더디 가는지, 지겨운지, 그렇지 않습디까?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합니다. 같은 시간이라도 힘들게 일하면 길고, 아픈 시간은 길고, 반면에
행복한 시간은 짧습니다. 하룻밤이 단 한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불과 3분이 30분처럼, 세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계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psychological time’입니다. 십년이 하루 같을 수도 있고, 하루가 백년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시간이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중생할 때 ‘시간의 개념’이 확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가?
오늘 본문대로 말하면 ‘때가 가까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용한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시지 않습니까? 주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가 가까울 때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그 징조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때가
가까웠습니다. 주의 재림이 분명히 가까웠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인테림’이라고 하는데, 중간기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하신 다음부터
재림하시기까지의 그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구원의 기간이요, 전도의 기간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셨고, 그리고 이제 재림하시는 그날! ―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문 닫힌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끝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서 사정할 것입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보아도 이것은 ‘인테림’입니다. 지금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숨넘어갈 때까지, 이제부터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까지, 그때까지가 딱
주어진 것입니다. 계산하자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 시간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그 안에서 최선의 시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은 항상
있는 줄 압니다. 계속 주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지가 않습니다! 건강할 때의 시간과
젊었을 때의 시간, 늙어서의 시간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구별하고 낭비하지 않는 것! ―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참되게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내 편에서 생각하지를 않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이것을 생각하라
하십니다!
여러분, 주의 뜻을 생각하는―주의 뜻 안에서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일에만 집착합니다. 자기 뜻대로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닌 것입니다! 주의 뜻 안에 내가 있는 것이지, 내 뜻대로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전도사님에게 부축을 받아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내가 삼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삼 개월밖에 못살게 하였습니까? 왜 나를 곧 불러가려는 것입니까?
이렇게 원망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런 다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젊어서 죽은 사람이 참으로
많더군요. 나는 할머니거든요. 지금 죽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많이 산거예요. 그래서 곧바로 원망하는 기도를 취소한다고
기도드렸습니다. ‘잘못된 기도 같다, 내 시간은 넉넉했다’ 하고 생각했지요. 삼 개월 남은 것, 그 시간도 많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이해가 되었는데, 그 다음이 또
문제였습니다. 고통스러워요. 자꾸 아프고 쑤셔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고야만 자게 되는데, 이러니 또 머리가
아파요. 그래서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십니까?’하고 또 원망을
하였는데, 그런 다음 또 생각해보니, 오늘까지는 좋았거든요. 늘 건강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건강한 시간에 ‘건강에 대한 감사’를 드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아프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참으로 많다, 내가 아픈 경험이 없었다가 오늘에 와서 이렇게 경험을 하는구나!’ 그래서 또다시 생각을
돌렸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 앞에 아주 단순한 기도를 했어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오래 살게 해 주세요,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뭘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딱 한 가지
‘하나님, 오늘밤 편히 자게 해 주세요.’ 이것만이 내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왔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떠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 이 할머니는 이렇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고민도 많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래서
복잡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할머니처럼 인간의 소원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 소화 잘 되게 해 주세요, 맛있게 먹게 해 주세요. ―
이런 소원이면 사실 그만이지 않습니까?
아주 소박한,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주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소박한 소원을 말씀드리면, 그처럼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성령에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성령에 충만해가지고, 다시 말하면 영성이 살아 역사하는 시간만이 지혜로운 자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 사람을 보십시오. 영이
지배하는 때가 있고 육이 지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영에 속해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육에 속한 일을 하게 됩니다. 휘청거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입니까? 이 비율을 물어야 합니다.
얼마만큼 영에 충만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세상근심에 매여 살았는지 걱정하며 살았는지 ― 육의 욕망에, 육신적 욕망에 끌려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혜로운 자에게는 성령 충만한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에 찬 시간이 더 많습니다. 영에 속한 시간으로서의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오늘 본문에 보듯이, 술 취하고 방탕한 시간이 많습니다. 맑은 정신을 술 취함으로 몽롱하게
만들었습니다.
술 취해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 시간은 버려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렸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래서 한마디로 “세월을 아끼라” 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소중한 시간이니 아끼라 하십니다. 여러분,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서 ‘아낀다’는 말은 성경 원어로는 ‘엑사고라조메노이’라고 하는 말인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redeem'이라는 말입니다. Redemption, redeem―바로 속량한다는 뜻입니다. 구원한다, 대속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가운데 어떤 번역은 이렇게 의역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Make your time the best.” “Making the most of the time.” ― ‘네가 가진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뜻은 이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대가를 지불해서, 그래서 좋은 시간으로
만들어라 하시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좋게 만들려고 하면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냥 되지 않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꽃꽂이 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렇게 강단을 장식하기 위해서 금요일에 꽃꽂이 팀이 하루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쁜 꽃꽂이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정성을 지불합니까? 연구하고 노력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들에 있는 꽃 한 송이, 그냥 거기에 두면 그대로 있겠지요. 그러나 이걸 가져다가 꽃꽂이를
해서 많은 사람이 보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작품 하나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쳐져서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지요. 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얼마나 수고합니까?
그 하나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내게 주어진
시간! ― 한 시간 한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으로, 가장 귀한 시간으로 만들어라!! ―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으로, 가장 귀한 시간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로 20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하십니다! 왜요? 그것만이 시간을 높이는 길이요 얻는 길이니까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시간! ― 이것은 빼앗기는 시간이 아닙니다. 부득이한 시간도 아닙니다. 창조적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얻는 길은 바로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왜요? 감사하는 것은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은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감사할 때 내 마음이 기쁩니다. 기뻐지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더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이 자기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에 감사 대신에 원망을 한다고
해보십시오.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창조력도 줍니다. 상상력도 줍니다. 지혜도 줍니다.
또 내가 원망을 했으니까 원망 듣는 그 사람이 또한 나를 미워하느라고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도 그 사람대로 또한 비생산적이 됩니다. 마음이 어두워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만이 시간을 높은 가치로 창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하시는데, 여러분은 언제 이렇게 찬송하게
되십니까? 구체적으로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울면서, 가슴 치며, 원망하며, 그러는 동안에 찬송하게 되십디까?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으셨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할 때, 우리는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기쁘게 마음으로 노래하며 찬송할 때, 우리에게는 창의력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쟙스란 사람이 ‘인문학(Liberal Arts)’를 강조한 것은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컴퓨터와 같은 첨단 과학적 기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단순히 과학적인 기술이나 훈련이나 숙련보다도, 인문학적인 창의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애플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데서 우리가 보듯이,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참으로 아름답고 보람된 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에,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우리는 찬송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창의력이 넘치는 값진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절, 7절 말씀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셨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셨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 깃듭니다. 그래서 생각도 맑아지고,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몸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11월을 맞이했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이제 두 주 후엔 일년의 모든 삶을 묶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우리는 쌓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을 값진 인생, 보람된 인생, 우리의
모든 시간을 극대화 하여 아름답게 살기 위한 비결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데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골로새서 2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자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항상 부르게 되며, 그 노래들은 우리에게 창의력을 불러 일으켜주고, 삶의 원동력이 되며, 또한 그 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드리는 그 감사의 그릇에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은혜를 넘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자입니까?
제가 서두에, 우리 기독교의 윤리란 ‘마땅하니라’하는 것으로 설명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혜로운 자, 참 은혜를 깨달으며 참되고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범사에 항상 감사하십시오! 진정한 감사―넘치는 감사로서 참되게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항상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아름답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진군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