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생활을 함에 있어서 늘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를 나의 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나의 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면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특별히 오늘 본문 6절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의 삶의 뿌리를 박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또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넘치는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참된 믿음의 사람이란 바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감사함을 넘치게 한다’는 말은, 성경 원어의 뜻으로 보면 ‘감사가 철철 넘쳐흐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고통도 있고, 불평도 있고, 짜증도 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고통의 선에서도 그 위로 감사가 넘치고, 불평스러운 마음의 선에서도 감사가 넘치고, 짜증스러운 마음도 삼켜버리는,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주일을 기키고 있습니다.  이 감사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이 감사주일을 있게 하였던 청교도들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였습니까?
   그것은 과연 우리 인간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과 원망과 한숨을 다 덮어버리는, 정말이지 모든 것 위로 넘쳐흐르는 그런 감사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하였던 청교도는 모두 146명이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제 막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한 이들은 시편 100편에 나오는 감사의 찬송을 외치면서, 나무와 바위를 끌어안고, 눈물과 환희로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들이 이때 드린 기도의 내용들이 항해일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기도는 정말이지 감사가 넘치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평탄한 중’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180톤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배였습니다.  그 같은 배로서 대서양을 횡단한다는 것은 처음부터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배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또 그 배의 항해속도는 시속 2마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보통으로 걷는 속도가 시속 3마일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걸어가는 속도보다도 느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17일간이나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또한 항해하는 이 기간 중 두 사람이 죽었지만, 이들은 한 아기가 탄생하였음을 감사하였습니다.
   폭풍을 만나서 중심 되는 큰 돛대가 부러졌으나, 그날 일지에 보면 이들은 배가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서 여자들이 바다 속으로 말려들어갔던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자연히 배가 파손된 것, 사람이 다친 것, 이런 괴로운 사실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사실 이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바다로 나가서 상륙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한 달 동안이나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고 초조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플리머스에 상륙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최고의 감사는, 이 고통스러웠던 3개월여의 항해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영국으로 되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고, 146명 전원이 바다위에서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가자고 주장하는 ‘그 믿음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감사주일의 첫 시작입니다.  물론 추수감사는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있어온 것입니다만, 오늘 이 현대에 있어서 이렇게 11월 셋째주일에 ‘감사주일’로 지키게 된 것은, 바로 이 청교도들의 감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플리머스 해변에서 드려진 감사의 제단은 결코 평탄한 속에서 부르는 그런 감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문자 그대로 넘쳐흐르는 감사!―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감사를 우리가 드려야 한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넘쳐흐르는 감사! ― 그것은 어떠한 감사를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통해서 세 가지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넘쳐흐르는 감사란 ‘후속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적’인 감사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일’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에”―다시 말해서 ‘감사기도하신 후에’라고 특별히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남자 어른만 해도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겨우 한 어린아이가 먹을 정도의 양에 불과한 물고기 두 마리와 초라한 다섯 개의 보리떡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는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감사’가 먼저 가고 있었고, 그리고 이와 같은 먼저 가는—선행하는 이 감사에 ‘기적’이 뒤따르게 되더라 하는 바로 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감사를 할 때는, 먼저 무슨 일이 잘 되면 ― 또는 어떤 감사할만한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 그런 다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떡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 축복을 보고서, 그래서 후속적으로 감사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오병이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 또한 자기의 요구와 비교하기 전에 ― 무조건 그 몇 개의 보리떡을 놓고도 감사하는 바로 그 정신에 ‘기적과 축복이 뒤따르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어집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해주시는 진리입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내 생각에 맞지 않고, 짜증나고, 불만스러운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부터 감사로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짜증과 불만에 짓눌려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신문에 한 재미있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자기 남편을 팔겠다는 어떤 여자 분의 광고였는데, 그 내용은 사냥과 골프 등의 자기 취미에만 남편이 몰두해 있는 것이 미워서 반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에다가 “남편을 양도함, 사냥과 골프도구 및 개는 덤으로 드림”이라고 광고를 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재미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후 약 60통이나 되는 전화를 받았는데, 어떤 내용이었을 것 같습니까?
   그 전화 중에서 그 남편을 구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도 남편이 살아있는 그것이 다행인줄 알아라’ 하고 충고하는 과부들의 충고와, ‘남편과 헤어진 뒤에 아이들 양육하는 데 큰 고생을 겪었다’는 이혼한 여자들의 충고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말고, 사냥도구와 개만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전화가 세통 있었다고 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반사나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란 말은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셨으니, 거기에 대해 반응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선행하는 감사! ― 바로 이것이 축복을 열고, 또한 행복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꼭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넘치는 감사’란 바로 우리의 믿음의 표현임을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고 무덤에 장사된 후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서서 무덤의 돌문을 열라고 하시니까,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옆에 있다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데 무덤을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만류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시고는, 무덤이 열리자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난 후에 감사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아직 살아나기 전에, 시체를 앞에 놓고 “감사하나이다”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이것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면 그 믿음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감사한다는 것은 바로 확고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로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그대로, 하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정말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맡기고 계십니까?

   피카소의 일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번은 피카소가 여행을 하던 중, 어느 농가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집 딸아이가 너무나 귀여워서 이렇게 말을 겁니다. “얘야, 네 손수건에다가 내가 그림을 하나 그려줄까?”
   그랬더니 이 딸아이가 손수건을 움켜쥐고는 엄마에게로 도망을 치며 소리를 질러대었습니다.  “엄마, 엄마, 오늘 저녁에 온 사람, 미친사람인가봐.  내 이 비단 수건에다가 물감을 뿌린다고 그래!”
   만약 이 사람이 피카소인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그림 한 장의 값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인지를 알았더라면, 손수건만이 아니라 자기의 블라우스까지도 벗어드렸을 것입니다.  “선생님, 마음대로 그려주세요.  무엇이나 다 좋아요”하고 그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농가의 소녀와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정말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 위대한 그림을 나의 마음과 나의 생애 속에 그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나가다가 사랑채에서 하룻밤을 쉬어가는 허룩한 영감 정도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도 부족하고, 기쁨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나에게 엄청난 걸작을 남겨주실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찌 지금 우리에게 감사가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16장에는 출애굽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름진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없다, 없다’고만 말하니 결국 그들은 영원한 가난뱅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의 눈에는 이튿날 아침부터 날아올 메추라기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보고 미리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또 민수가 2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에는 파종할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이들은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음으로 감사가 없었고, 불신의 입에서는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그저 ‘없다, 없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바위를 칩니다.  물이 쏟아져 나왔지요.  모세는 바위 속에서 생수를 믿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기사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감사가 없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이며, 신앙을 가질 때에는 감사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악의 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 곧 감사하지 않는 것임을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분명히 말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넘치는 감사로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금년 일년 동안의 모든 삶을 묶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  감사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이 세상에서의 그 모든 축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넘치는 감사는 바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최후의 만찬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러니까 유언을 하는 자리, 엄숙하고도 심각한 그와 같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서 기자는,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실 때에도, 잔을 돌리실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는 마당에 무엇을 감사하셨을까?’ ―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대답은 그 감사기도를 하신 다음에 이어서 하신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떡을 떼어 감사하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한 나의 몸이다” 하셨습니다.  또 잔을 드시고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전히 드리고 있으며, 또한 그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Thank you’라고 하는 말을 그저 인사하듯 자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감사를 하되 ‘어떻게 감사하는가?’ 하는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지요.

   선교일화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중국 농촌에 들어갔던 미국 선교사가 중국 농민들이 큰 감자는 먹고 작은 감자는 먹을 게 별로 없으니까 별도로 골라서 씨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미국에서는 외와 반대로 농사를 합니다.  미국에서는 가장 큰 것을 씨로 사용합니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대로 해 보았습니다.  어떤 결과가 생겼겠습니까?  정말로 큰 감자를 씨로 해보았더니, 다음부터는 큰 것이 계속 열리며, 수확을 많이 하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가장 귀하고 큰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때, 우린 또한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넘치는 감사란 언제나 가장 큰, 최고의 것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최고의 감사를 하는 자는 언제나 이 인생에서 가장 큰 감사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그 사람은 인생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며, 희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라고 하는 유명한 성경주석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감사’에 대하여 이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감사는 자동차를 탄 것 같고, 불평은 흔들의자에 앉은 것과 같다!”
   무슨 말인고 하면, 둘 다 몸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앞으로 전진할 수 있고, 불평 속에 사는 사람은 그저 제자리에서 흔들리기만 할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섭씨 0도를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결빙점―얼음이 어는 Freezing point’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0도를 ‘해빙점―얼음이 녹는 Melting point’라고 부릅니다.
   똑 같은 0도가 어떤 이에게는 ‘결빙점’으로, 또한 어떤 이에게는 ‘해빙점’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넘치는 감사를 드리는 자는, 오늘의 이 현실을 언제나 ‘해빙점’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은 이렇게 이 세상을 보는 눈도, 삶의 자세도, 달라지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자의 삶에 어찌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감사가 있는 곳에 참 믿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우리 인간의 유일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다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를 할 때에야 그 축복이 축복으로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을 때에는 그 받은 것이 축복인줄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감사의 생활이며, 넘치는 감사는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넘치는 감사의 생활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