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비유(사48:17-19)

 

● 여러분은 ‘바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바다!’ 바다는 지구표면적의 약 3/4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해수, 즉 소금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온통 푸른 바다 빛으로 보여질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바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무엇이 매우 많을 경우, 혹은 매우 넓거나 깊은 것을 과장해서 비유할 때 사용된다.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되면, ‘눈물바다가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대전천변에 유채꽃이 사방에 가득 핀 것을 보고는 ‘온통 유채꽃 바다’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극에서 많이 나오지만,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성은이 하해(河海)와 같사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임금의 은혜가 바다와 같다는 뜻이다. 또 ‘바다와 같은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넓고 깊다는 뜻이다. 또 이런 속담도 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 그만큼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바다를 과학적으로는 주로 ‘해양(海洋)’이라고 하는데, 해와 양은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은 ‘양’이라고 하고, 동해, 서해, 남해, 지중해, 홍해, 카리브해 등은 ‘해’라고 한다. 이로 볼 때, 아주 큰 바다를 가리킬 때는 ‘양’, 그곳보다 좁은 바다를 가리킬 때는 ‘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이라고 불리는 ‘대양(大洋)’은 그 넓이도 넓거니와 독자적인 해류나 조류를 갖고 있는 바다인데, 흔히 ‘오대양’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양을 영어로는 ‘Ocean’이라고 한다. 그리고 ‘해’라고 불리는 ‘부속해’는 영어로 ‘Sea’라고 하는데, 대양에 비해 좁고 인접된 대양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인 조류를 가지지 않는다.

 

● 바다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예로부터 여러 가지 설이 제창되고 또 많은 과학자들이 그동안 연구해 왔지만, 각종 설만 있을 뿐 어느 것 한 가지도 분명한 학설은 없으며, 현재의 인간의 과학지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지금 학교에서는 진화론만을 과학으로 인정하고 가르치고 있으나,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의술이 얼마나 한정적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우주과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인간이 현재 날아갈 수 있는 공간은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바다는 셋째 날에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으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는데,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다. 성경은 과학책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기록한 책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인간의 과학지식이 부족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을 비롯 언젠가는 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진실임을 밝히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이 바다의 존재가 얼마나 지구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모른다. 바닷물의 열용량은 공기의 약 3천배 이상이다. 그러므로 바닷물은 공기에 비해 쉽게 데워지거나 냉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다는 지구에 마구 쏟아지는 태양에너지를 저축하는 은행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몸의 비강과 같은 구실을 한다. 우리 얼굴에 코가 거저 붙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코의 생김새를 잘 보라. 일단 코는 아래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 비가 와도 물이 몸 안으로 흘러들 염려가 없다. 코 안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코털인데, 코털은 먼지들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코털을 너무 많이 잘라내면 호흡기에 좋지 않다. 다음으로 코 안에는 끈끈한 점액이 있는데, 이 점액에 코털에서 걸러지지 않은 미세한 먼지들이 들러붙는다. 그리고 바깥의 건조한 공기는 바로 이 코 안에서 적당한 습도를 제공받는다. 만일 코 안에서 습도가 조절되지 않은 채 바로 호흡기로 넘어가게 될 경우, 자칫하면 감기에 걸기게 되는 것이다. 또 겨울에는 차가운 바깥공기가 코 안을 통과하면서 따뜻하게 데워지며, 여름에는 뜨거운 바깥공기가 코 안을 통과하면서 서늘하게 식혀진다. 그래서 코 안과 불과 40여cm의 호흡기를 통과하면서,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적절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게 되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솜씨가 오묘한지 모른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바다는 열을 보관했다가 천천히 돌려주기 때문에 더위를 식혀주고 또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바다가 없었더라면 지구상의 기후 ·기상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뜨거워서 살 수가 없는 황무지와,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인 빙하지대만이 이 땅에 남았을 것이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염분은 바다마다 조금씩 다른데, 해수 1ℓ 속에 30∼35g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나라 서해 바닷가에서는 천일염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소금이 중요한 것은,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해도 해롭지만, 우리 몸은 염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금을 화학적으로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바다에서 나는 천일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바다는 곳 생명의 원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여튼 이밖에도 바다와 관련된 지식들은 끝이 없으며, 인류와 바다와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태고부터 인류는 바다를 이용해 왔고, 교통로로서, 자원으로서 중요하다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인류가 바다 그 자체를 과학적인 흥미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오늘날 조직적이며 대규모적으로 해양관측을 실시하고 있으나, 바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도 미흡하다. 그래서 바다에 관한 지식의 증대는 오늘날 인류에게 절실한 문제가 되고 있다.

 

지구상의 인구는 매년 약 1억씩 늘고 있다. 앞으로 이 팽대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육지 상의 경지에서 현재의 농법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식량원을 다른 데서 구해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다이며, 개략적인 계산이기는 하지만 1ha의 바다가 가지는 잠재 식량생산 능력은 육상의 밀밭이 가지는 잠재 식량 생산능력의 2배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식량원으로서의 바다를 더 개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바다가 가진 여러 가지 성질, 행동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식견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 해양학은 우주과학, 원자물리학과 나란히 거대과학(big science)으로 간주되고 있다. 바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바다가 내일을, 21세기를 연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 성경에서 바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바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yam’은 구약성경에서 ①‘물들의 모임’ 곧 큰 바다(창1:10, 신30:13, 왕상10:22, 시24:2, 욥26:8,12, 38:8), ②팔레스타인 주변의 바다 곧 지중해(신11:24, 34:2, 민34:6,7, 수15:47, 겔47:10, 욜2:20), ③홍해(출14:22, 왕상9:26), ④갈릴리 호수(민34:11, 수13:27), ⑤사해(민34:12, 신3:17, 겔47:8), ⑥나일강(사19:5, 암8:8), ⑦유프라테스강(렘51:36) 등, 다양한 대상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다를 가리키는 헬라어 ‘θάλασσα’는 구약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주로 ‘큰 바다’(sea)나 ‘갈릴리 호수’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면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바다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앞서 언급했듯, 흔히 어떤 대상이 무척 많거나 매우 넓고 깊거나 넓게 퍼져있는 것을 비유할 때 ‘바다’라고 표현하듯, 성경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크심은 땅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11:9).’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시36:6).’

 

본문 18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받지 않아도 될 고난을 당하는 남유다 백성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바다 물결 같은 한결같은 사랑(18절에서 ‘공의’란 사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도우심을 경험함을 뜻한다. 다시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표현한 것이다.)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자손을 이어가게 하셨다고 밝히신다.

 

그리고 이사야는 악인을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표현했으며(사57:20-21), 야고보도 의심하는 자를 요동하는 바다 물결로 묘사했다(약1:6). 바다는 또한 상징적으로 악의 세력이 나오는 곳으로 기록되기도 했다(단7:2, 계13:1, 21:1).

 

한편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으며(계7:3, 18:17),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거나(계4:6, 15:2) 악한 짐승의 거처(13:1)로 인용되기도 했다.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계21:1).

 

신약의 경우,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보내셨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갑자기 불어 닥친 광풍으로 바다 물결이 흉용할 때, 배 안에서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바다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장면(눅8:22-25)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주기에 충분하다.

 

불교에서도 인생살이를 고해(苦海)에 비유하듯,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은 온갖 시험과 환난과 고생으로 넘실대는 바다와 같다. 다시 말해 바다는 고난으로 넘실대는 인간의 삶을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 미친 듯 날뛰는 바다 물결을 고요히 잠재우신다.

 

이처럼 성경에는 ‘바다’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실로 ‘바다’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