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평가

본회퍼는 설교평가의 기준을 8가지로 가르치고 있다.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어떤 설교가 바람직한 설교인가? 때로는 우리가 잘못된 설교평가기준을 가지고 설교를 평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참 설교는 무엇인가? 우스운 일이 설교평가 교실에서 발생할수있다. 어떻게 설교를 해야 바로 하는것인가? 무엇이 시급한 설교의 장점인가? 우리는 설교를 평가할때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설교를 바라보아야한다.

설교자들은 또한 올바르지않은 설교비판과 평가앞에서 담대할수도 있어야하고 설교후 안식하고 주님께 맡기고 쉴수있어야한다. 최선을 다했다면. 잘못된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쇠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본회퍼가 보는 올바른 설교는 무엇인가? 본회퍼는 우선 다섯가지 부분에 있어서 설교는 충실해야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성서에 충실해야하고 둘째는 설교본문에 충실해야하면 세째는 신앙고백에 충실해야하고 네째는 회중에 충실해야하며 다섯째는 사명에 충실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설교본문이 없는 설교도 전체로서의 성서의 중심 메시지에 기초함으로서 성서에 충실할수있다. 루터는 아주 자주 설교본문이 없는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적이었다.“

설교본문으로서 하나의 성서본문이 없는 설교, 그 설교도 본회퍼는 루터의 예를 들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 설교 역시 성서적이 설교이어야 한다. 아마도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여러개의 성서본문을 가진 설교라고도 할수있을것이다. 단 하나의 성서본문만을 가지고 항상 설교해야한다는 법칙은 없다. 때로 다양한 성서본문을 가지고 혹 다양한 성서의 주제를 가지고 설교할수도 있을것이다. 여기에서 본회퍼가 말하고자하는것은 설교가 성서적이어야한다는것이다. 하나의 설교본문을 갖든 여러개를 갖든 아예 없더라도 설교는 전체로서의 성서의 메시지에 근거해야한다는것이다. 오늘날 설교를 일반적인 지식강의처럼 하는 경우도 있고 성서에 대한 언급이나 혹 성서의 전체적 메시지에 근거하지않고 일반적인 예화나 설교자 자신의 생각을 단지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도 있다. 설교는 성서에 충실하여야한다. 이어서 본회퍼는 설교는 본문에 충실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설교가 목회자의 주석적 연구에 어떻게 관련되어있는가? 본문의 각 부분은 적절하게 본문의 다른 부분과 관련되는가? 중요한 것이 묵과되지는 않았는가? 본문의 중심 의미가 분명한가?“

본회퍼는 설교자가 설교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하여야할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너무 쉽게 설교준비에 뛰어들고 너무 빨리 메시지를 발견하기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차분히 서재에 앉아 성서본문을 놓고 읽고 연구하며 주석적인 작업을 한단어 한단어 한문장 한문장씩 본문중심으로 해나갈때, 그리고 기도와 묵상과 질문과 함께 시간을 보낼때, 그리고 회중을 마음에 두고 메시지를 기다릴때 본문은 반드시 설교자에게 말씀할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진지하게 설교본문을 연구하지않고 쉽게 설교하려고 함으로써 오히려 설교사역을 더 어렵게 하고 지치게 된다. 성실한 설교자의 모습으로 설교본문을 매주 연구하는 자세를 갖어야한다.

„설교는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해석을 가지고 설교되었는가? 혹 그렇지 않은가?  즉, 성서 오직 믿음(solar fide)이라는 신앙고백에 따라 읽혀졌는가? 설교는 교리적으로 정돈되어있는가?“

우리는 아주 자주 개개의 성서본문을 설교하면서 우리가 믿는 전체적인 교리에 어긋나는 신학을 가지고 설교하는경우가 있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기본 교리에 우리의 설교가 밑에 서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한다. 마치 우산아래 서있는것 처럼 우리는 성서전체에 대한 우리의 중요한 기본 신앙고백과 교리밑에 서있어야한다. 때로 설교자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각기 본문을 따라 설교하다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기본교리를 벗어나는 설교를 하는경우가 많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종교개혁의 기본 교리를 설교자들은 잊지말아야한다.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은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에서 본회퍼는 설교자들이 한주간에 단 몇페이지라도 지속적으로 신학서적을 읽고 공부할것을 권한다. 신학교를 졸업한후 신학서적읽기를 멈춘 수많은 설교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교리와 신학은 일종의 설교의 뼈대와 같다. 이 중요한 뼈대가 견고히 서지못한 설교자들은 매번의 설교에서 마치 흐르는 액체처럼 형태없이 견고히 서지못한다. 그러나 신학과 교리에 정통한 설교자들은 매주 다른 본문을 읽고 설교하면서도 전체적인 그의 설교의 사상에서 기본 골격과 구조를 갖게 된다. 그런 설교자밑에서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수년간 설교를 들을후에 설교를 통한 신학적 사상과 교리에 굳건히 서는 혜택을 볼수있다. 모든 교리와 신학은 설교될수있어야한다. 반대로 성서는 교리와 신학적으로 설교될수 있어야 한다. 설교는 회중이 알아듣기 쉽게 성서를 전달하는것이므로 단순히 단편적이고 분리적인 설교를 할것이 아니고 조직적인 신학과 교리의 기초위에서 설교를 하도록 설교자들은 노력해야한다.

계속해서 본회퍼는 설교의 평가기준으로 설교가 회중에게 충실했는가를 묻는다. 회중에게 충실한 설교! 이것이 본회퍼가 보는 올바른 설교이다.

„언어와 표현 전달에서의 단순성.  본문의 이미지가 충분히 사용되었는가? 한 문장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는가? 한문장에서 너무 많은 관계절을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너무 많은 문학적이고 수사적인 방해요소가 사용되지는 않았는가?“

초대교부들은 설교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어떤 설교자들의 설교는 너무 듣기 어렵다. 회중에게 충실하지 못한 설교이다.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서 설교회중을 고려하지않는 잘못이다. 본회퍼는 설교가 언어와 표현 전달에서 단순해야함으로 가르치고 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설교는 단순해야한다. 또한 본회퍼는 설교본문에 나오는 이미지를 충분히 설교에서도 사용할것을 권하고 있다. 설교본문에 수많은 이미지가 있는데 어떤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에서는 그 많은 성서본문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논증만을 하는 경우가 있다. 회중의 상상력을 초대하는 면에서 성서본문의 이미지를 설교에서도 충분히 사용할것을 권하고 있는것이다.

또한 설교의 한문장 한문장이 너무 길거나 어렵거나 복잡해서는 안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친 문학적, 수사적인 표현들이 설교를 오히려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를 한편의 문학으로 이해할경우 설교평가가 달라지게 된다. 내용보다 표현자체에 더많은 관심을 둠으로서 주객이 전도되는 우가 발생할수있다. 설교는 문학이 아니다. 설교는 수사학도 아니다. 문학과 수사학의 도움을 받을수는 있지만 설교는 그 자체로 독창적이다. 설교는 귀를 자극하거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것이 목적이 아닌 영혼을 말씀으로 교화하는것이 목적이기때문에 독창적이다.

„설교구조에 있어서 선명성. 비록 짧은 설교라 할지라도 문단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자이크가 되어서는 안된다. 본문의 해석이 중심 사상에 놓여있는가? 샛길로 빠지는것이 주석적 작업을  위해서 적절할수도 있지만 설교를 위해서는 아니다. 설교가 얼마나 잘 기억되게 하고 반복되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많은 설교형태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본회퍼는 그러나 여기서 아주 간단한 원리를 요구하고 있다. 설교형태, 즉 설교구조가 선명한가? 투명한가? 회중이 쉽게 설교를 간파할수있는가? 문학과 수사학 자체가 설교의 목적이 아닌것처럼 설교형태론 자체도 설교의 목적이 될수없다. 설교는 문학과 수사학을 위해 존재하지않는다. 또한 설교형태를 위해 설교가 존재하지않는다. 설교는 설교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설교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회중에게 잘 전달하는것이 주된 목적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설교형태를 사용함으로서 회중을 오히려 혼란하게 만드는것은 좋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의 구조는 선명해야한다. 회중이 쉽게 설교구조를 따라 갈수있는가? 여기에서 본회퍼는 또한 회중이 설교를 잘 기억하도록 설교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설교안에서 얼마나 반복되었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반복함으로서 설교를 지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복은 문학에서의 중요한 강조 기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회중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내용을 회중에게 퍼부움으로서 회중이 메시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우가 있다. 한편의 설교에서 선명한 구조로 회중이 언어전달로서의 설교 메시지를 잘 기억할수있도록 반복하며 설교를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새로운 설교학운동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많은 새로운 설교형태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것은 본회퍼의 지적처럼 설교구조가 선명해야한다. 회중이 쉽게 따라 들을수 있도록 하는 설교형태여야한다. 본회퍼는 또한 여기에서 짧은 설교라 할지라도 문단(paragraph)의 도움을 받아야한다고 강조한다.  

논문쓰는 방법을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발견하는 사실은 수많은 학생들이 글쓰기에서의 가장 기본인 문단작성법을 모르고 있다는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문단들로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것은 인문교육의 허실을 보여주는듯하다. 글쓰기를 따로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운적이 없는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문단은 주제문장으로 시작하여 그 주제를 설명하는 문장들 그리고 그 주제를 증명하거나 강조하거나 예를 드는 문장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문장에서 그 문단의 주제를 반복하고 요약한다.

한편의 설교는 여러개의 문단들로 구성된다. 설교개요라고 할때 우리는 이 문단들을 요약하여 나열하는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글쓰기를 할수없는 설교자들은 올바른 설교도 할수없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서로 연관된것이다. 올바른 문단쓰기와 문단 말하기를 훈련해야한다. 어떤 이들은 문단쓰기와 말하기의 문법와 어법을 사용하지않고 한편의 글에서 혹 설교에서 수많은 문장을 질서없이, 상호 논리적 연관성없이 표현한다. 그것은 글이 아니고 말이아니다. 그리고 설교도 아니다. 한편의 글, 한편의 설교안에는 이런 내부 구조가 형성되어 있어야한다. 흔히 대지와 소지라고 말하는 개요쓰기를 한후 그 대지와 소지 역지 이 문단 구조로 뒷받침되어야한다. 아마도 본회퍼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본회퍼의 표현에 의하면 글이나 설교는 ‚모자이크‘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주 모자이크 설교를 듣는다. 도대체 무슨 중심사상을 가지고 무슨 논리적 구조를 가진 설교인지 알수가 없는 설교를 일컫는다.

설교는 모자이크가 되어서는 안된다. 조각 조각 나누어진 구조가 아니고 질서정연한 문단 문법과 어법을 기초로 한 개요를 가진 구조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논증적 설교형태에서만 적용되는것은 아니다. 이야기체 설교에서라 할지라도 문학적 설교형태를 사용할지라도 역시 모든 글은 문단으로 이루어지기때문에 문단문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한다. 아마도 설교를 어렵게 생각하는 노련한 설교자들 역시 설교의 어려움을 논하기전에 먼저 글과 말의 기본 문단문법을 알고 있는지 물어야한다. 설교가 창조적 작업이기때문에 창조작업에 따르는 긴장은 있을수있어도 일단 본문주석과 연구 그리고 기도와 묵상과 질문들을 사용하면서 설교 내용을 만들기 시작한 설교자들은 설교역시 문단구조를 갖어야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뼈대를 가지고 만들기 시작한다면 설교작업은 그렇게 긴장하거나 어려운 작업은 아닐것이다. 물론 대단한 감동을 주는 설교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매번의 설교작업이 설교문작성의 글쓰기 과정을 통과하여 설교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의 구체적인 목표를 주기때문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회중에게 설교가 충실해야한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설교의 방향이다.

„설교의 방향 (설교가 공격하고자하는 바라고 할수도 있음)이 분명한가? 설교는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사탄과의 싸움이 어디에서 연결되었는가? 설교안에서 모든것이 그저 본문에 대한 재진술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회중에게 충실해야하는 설교의 세번째 논의는 설교의 방향이 분명한가이다. 설교의 목적이 분명한가? 이 설교를 통해 설교자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회중에게 설득하고자 하는가? 이 방향이 분명해야한다는것이다. 그럴때 그 설교는 회중에게 충실한 설교이다. 자주 회중은 도대체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회중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방향과 목적을 분명하게 간파하지 못할때가 많다.

설교자들은 단지 설교본문을 재진술하면서 회중에게 뚜렷한 요구를 하지못하고 스스로들이 방향을 잃는 경우가 많다. 한편의 설교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가 뚜렷해야함으로 본회퍼는 설교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현대설교학에 있어서 어떤 설교학 방법은 회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설교도 있다. 설사 이 방법을 사용하여 회중을 스스로 결단하도록 초대할지라도 설교자는 그 목적인 회중들로 하여금 결론을 찾게 하는 방향에 있어서 분명해야할것이다. 설교가 회중에게 충실하지 못할때 설교는 애매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러울것이다.

다섯번째의 설교의 충실함은 사명에의 충실이다. 이것을 본회퍼는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성서와 교회가 단지 설교자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는가? 종교적 인물로서 설교자는 말하고 있는가? 혹 그리스도의 사명에 헌신한 자로 설교하는가?“

설교자들은 때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전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설교에서 피력하는 일에 더 열성을 내는 경우가 많다. 회중에게 충실하여야하는 이유로 본회퍼는 설교자가 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사명에 더욱 촛점을 맞출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중심 진리에 헌신할것을 요구하는것이다. 이 객관성과 함께 주관성으로 본회퍼는 설교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진리에의 참여를 평가한다. 설교자가 스스로 말하는바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공식적으로만 외치고 있는가?를 묻는다. 때로 설교자들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믿지않는것을 외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는 주관성이 없는것이다. 그리스도가 명령하셨기에 설교자는 설교해야한다. 그러나 그 객관성과 함께 주관성으로 자신의 믿음에서 설교가 선포되어야한다. 껍데기분이 외침이어서는 안된다.

본회퍼는 이에 더하여 두가지의 관계를 설교평가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는 새것과 옛것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이다.

„옛것이 새로운 방법으로 말해졌는가? 회중들로 하여금 그 본문을 다시한번 들여다 보게 만드는가? 설교가 해석과 증거를 회중에게 적절한 관계에서 포함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거에 기록된 성서를 설교한다. 그러나 그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어야한다. 과거의 것이 새롭게 말해져야한다. 성서본문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서 회중들로 하여금 성서본문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해야한다. 성서본문을 회중과 관련하여 해석하고 증거하여야한다.

„모든것이 율법주의로 귀결되지는않았는가? 복음이 선포됨으로서 하나님의 자유케하시는 능력이 들려지는가?“
설교는 율법주의로 귀결되기 쉽다. 왜냐하면 설교에서 설교자는 회중에게 요구해야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그 설교에서 복음이 선포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유케하시는 능력, 은총의 능력이 선포되게 해야한다. 설사 설교가 회중에게 변화와 행동을 요구하는것일지라도 설교는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여야한다. 이것이 본회퍼가 보는 설교 평가의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