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예배
„목회자의 예배를 위한 준비는 설교본문을 선택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본회퍼는 설교가 예배가운데 위치함을
명심한다. 설교는 예배안에서 이루어진다. 설교는 예배안에 속해있다. 전체적인 예배와 설교는 함께 어우러져야한다. 따로 따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설교가 훌륭하면서 예배는 그렇지못할수없고 예배가 훌륭하면서 설교가 그렇지못할수없다. 예배와 설교는 하나로 준비되어 실행되어야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예배와 설교의 하나됨을 진지하게 인식하지못하고 예배와 설교가 전혀 다른 주제로 분리되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본회퍼는 예배의 준비는 설교본문을 선택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체 예배의 중심주제를 설교본문 선택에서부터
찾아야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우산아래 모든 다양한 예배의 요소들이 비를 피하여 들어가는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난후
전체 예배의 요소들이 하나의 통일성과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낀다. 찬송가, 기도, 설교, 성찬, 고백, 참회, 축복 등의
예배요소들이 그날 설교의 본문과 주제를 가지고 하나로 흘러갔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가 거룩한 설득이라면 단 하나의 예배요소로
회중을 설득하는것이 아니고 겹겹이 예배안에서 회중들을 다양한 요소로 설득하게 되는것이다. 찬송을 부름으로서, 설교를 함으로서, 기도를
드림으로서, 고백을 함으로서 등등 다양한 설득이 동일한 초점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설교의 본문이 주는 주제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조율되고 어우러지면서 회중들을 설득하는가? 이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예배의
찬송가들과 다양한 예배의 요소들은 마지막날 모아져서는 안된다. 설교작성 과정을 마치기전에 선택된 찬송들은 설교작성에 커다란 도움이 될수있다.
때때로 노래들은 메시지들을 더 분명히 보이게 하고 더 단순히 말해지도록 한다. 찬송들의 선택을 일찍함으로서 찬송을 부르는것을 예배를 통한 교훈의
중요한 부분이 되게 할수있다. 회중들은 전체 예배를 통하여 찬송과 예배요소들이 잘 준비되었음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본회퍼는 예배의
찬송선택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예배시 부르는 찬송들이 전체 예배의 메시지를 설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됨을 말하고 있다. 우리 예배에서 찬송들은
설교의 주제와 어우러지며 다른 형태의 설득을 하고 있는가? 찬송만이아니고 다른 예배의 요소들도 그날 메시지의 주제와 함께 어우러져야함을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예배의 시간들은 잘 준비되지 못하여 발생하는 서두름과 불편함에서 벗어나야한다. 주일은 목회자에게 기쁨의 날이
되어야하지 피곤하고 지치는 날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드리는 오전은 설교자와 회중들 자신에게 조용한 묵상의 시간을 줄수있어야
한다.“
설교는 예배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설교와 예배는 뗄수없는 관계에 있다. 전체 예배와 설교는 하나로 묶여있다. 좋은
설교사역을 위해서 좋은 예배준비는 필수적이다. 설교자는 대부분이 예배인도자이기때문에 전체 예배를 설교와 함께 잘 준비하는 책임이 있다. 예배
순서 담당자들과 긴밀한 소통도 필수적인 요소일것이고 예배 담당자들과의 만남과 훈련도 필요할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주일 설교시간 전에 이루어져서는
안될것이다. 미리미리 이러한 소통이 이루어짐으로서 주일예배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고 목회자는 설교에 집중해야할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예배요소들을 다른 사역자나 성도들과 함께 나눌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배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예배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가 금주의 설교의 주제들을 미리 한주전에 제시하여 줌으로서 전체 예배 담당자들이 그 주제를 가지고 함께
어우러지며 예배를 구성하는것이 좋을것이다. 심지어 대표기도까지도 함께 설교의 주제와 함께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
서구 교회들은
대표기도라는 순서가 없다. 목회자인 설교자가 거의 모든 예배 순서를 진행하여 나간다. 설교후에 목회기도라는 시간이 있어서 목회자가 성도들과 함께
중보기도를 하는 순서가 있다. 이것도 역시 목회자가 진행한다. 누가 기도를 인도하든, 어떤 찬송을 부르든, 어떤 성가대의 찬송이 선택되든,
설교자의 메시지 주제를 미리 나눔으로서 전체 예배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것이 중요할것이다.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위해
교회에 모여들때 목회자는 더이상 다른 준비를 위해 분주해서는 안되고 회중들과 함께 기도실이던 혹 다른 장소에서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해야한다.
목회자는 지난주 회중들과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전했던 말씀들을 묵상해야하며 다시 한번 복음을 선포할수있게 됨을
감사드려야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설교자와 목회자들을 위한 가르침일것이다. 이미 본회퍼가 설교전에 목회자들은 설교를 위한 기도를
골방에서 드려야한다고 강조한바 있다. 여기에서는 설교자가 예배시작전의 태도를 말해준다. 예배가 시작되기전 목회자는 회중들과 함께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서 예배를 더 잘 준비할수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예배전 분주하게 자신들을 만듬으로서 정작 중요한 예배와 설교에 더
집중하지못한다. 예배시작전 너무 많은 일들과 사람들과 관계하기보다 조용히 회중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또한
본회퍼는 지난주 설교했던 메시지를 다시한번 기억할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지난주에 선포했던 말씀들이 어떻게 한주간 성도들의 삶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매주 매주의 설교와 예배사역의 지속성이다. 매주 매주의 예배와 설교사역이 따로 따로 떼어지는것이
아니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지게 하는것이다. 그리고 본회퍼는 다시한번 목회자가 예배전에 자신이 복음을 선포할수있게 됨을 감사드리는 기도를
드리라고 충고한다. 예배와 설교는 항상 복음선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죄용서와 은혜의 복음선포가 예배와 설교의 항상 핵심주제여야하는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우리의 예배와 설교가 복음과 은혜의 주제에서 벗어나 일탈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아주 슬픈일이다.
목회자는 회중들을 교육하여 예배전에 교회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하도록 훈련해야한다.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지난주에 들은 말씀들을 되새기고
그리고 금주에 들을 말씀을 기대하며 설교자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교회와 세상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자신들의 삶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간들을 예배전에
가질수있다.
어떤 교회는 예배전에 다른 장소에서 소수의 중보기도자들이 예배와 설교를 위해 중보기도하는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체
회중이 예배전에 일찍 나아와 기도하고 묵상하며 예배를 준비하도록 훈련하는것은 전체 회중으로 하여금 예배사역과 설교사역에 참여하게 하는 효과가
있을것이다. 이 예배전 기도시간에 음악을 사용할수도 있고 음악없이 침묵속에 고요히 예배를 준비하게 할수도 있을것이다.
„예배는
오르간 전주로부터 시작된다. 예배에서의 오르간은 오르간 연주자나 음악 자체의 뛰어남을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다. 반면 오르간은 찬양하는것을
도와야하고 설교된 말씀을 회중이 듣도록 돕는역할을 해야한다. 목회자는 오르간 연주자로 하여금 단순한 찬송 전주를 연주하도록 설득해야하고 각
찬송구절 사이의 간주나, 화려한 변주나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삼가하도록 요청해야한다. 주기도나 축도시 배경음악이 연주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는 본회퍼의 예배와 음악에 대한 견해를 볼수있다. 본회퍼는 예배에서 음악이 지나치게 전체 예배를 지배해서는 안됨을
교훈한다. 오르간 음악이 한 개인 음악가를 드러내거나 음악자체를 지나치게 드러나게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예배에서의 음악은 단순하며 설교말씀을
회중들이 잘 듣도록 돕는 역활을 해야한다. 예배안에서의 음악사용의 적절성을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예배전 전주는 오르간음악의 기교를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므로 찬송 오르간 음악을 연주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다양한 교회음악사용에 응용하여 이해할수있다. 지나친 음악의 테크닉을
드러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전 회중의 찬송을 돕는 역활을 음악이 해야하고 음악자체가 드러나고 화려하게 연주됨으로써 말씀보다
음악이 더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목회자는 여기에서 음악사역자들과 조율하며 전체 예배음악의 방향을 지도해야하는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첨가할것은 독일교회는 오르간을 주 예배를 위한 악기로 사용하지만 모든 세계의 교회들이 똑같은 오르간을 사용하지는않는다. 악기는 어떤 악기가 더
거룩하고 어떤 악기는 세속적인것이 아니고 중립적이다. 이것은 마치 수사학적 방법론이 하나의 도구로서 어거스틴이 중립적이라고 한것과 같다. 따라서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교회에서는 현대악기에 대한 본회퍼의 견해를 응용하여 적용하면 될것이다.
때로 고전악기인 오르간이건 현대악기이건
예배에서 지나친 음악의 사용을 볼수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연주로인해 예배인지 음악회인지 분간을 못할만큼 되는것은 바람직하지않을것이다. 역시
현대음악과 현대찬송을 사용하는교회에서도 설교자인 목회자는 미리 설교의 주제를 음악가들과 나누고 그들의 찬양선택과 찬양인도를 위한 음악위원회같은
모임을 통해 지도해야할것이다. 예배전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위해서 오르간이든 현대악기이건 조용히 찬양을 연주하는것도
좋은 방법일것이다.
„첫 개회찬송을 선택하는것은 좀더 넓은 여지를 허락한다. 이 첫번째 찬송은 전체 예배를 고려해서
이루어져야한다. 이 찬송선택은 설교후 부르는 결론적인 찬송[설교찬송:Predigthymn] 보다 더 넓은 적용을 가져야한다. 소위 주된 찬송처럼
그 찬송은 설교말씀을 너무 자세히 암시해서는 안된다. 오직 설교후 부르는 결론적인 설교찬송만이 설교의 주제를 절정으로 가져오고 그날 한 설교의
메시지를 요약할 수 있을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회퍼의 찬송 선택에 대한 견해를 볼수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찬송선택을
직접하지않고 행정직원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예배에서의 찬송선택이 설교자에 의해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첫번째
부르는 찬송과 설교후부르는 찬송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설교후부르는 찬송은 독일에서는 ‚설교찬송‘이라고 부른다. 설교의
메시지를 반영하고 요약하고 결단하게 하는 설교의 메시지와 동일한 흐름을 갖는 찬송을 설교후부르기때문이다. 우리의 예배에서 설교후 찬송이 이러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는가?
본회퍼와 독일교회에서는 설교후 찬송의 선택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설교 메시지를 정리하고,
요약하고, 확인하
고, 회중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름으로서 결단하게 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다른 찬송들, 예를 들어 첫번째 부르는 찬송들은
지나치게 설교주제를 자세히 암시할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좀 더 넓은 예배의 주제아래 선택될수있다.
„목회자는 너무 빨리 강단에서
움직여서는 안되나 자연스럽게 움직여야한다. 회중들이 목회자의 강단에서의 움직임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또한 충분한 시간이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이 진행되기전에 침묵기도를 위해 주어져야한다. 예배는 단지 급하게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이 침묵기도의 요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나온다.“
본회퍼는 아주 영적인 설교자이며 설교학자였다. 그의 설교사역과 설교에 대한 가르침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스스로 역사하심에 대한 신본적인 가르침이 나타난다. 그 하나님앞에서 설교자와 회중 전체가 겸손히
귀기울이고 겸손히 기다려야한다는 사상이 흐른다. 여기에서도 본회퍼는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이 진행되기 전에 침묵기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한다고 가르친다. 예배가 급하게 정신없이 진행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예배는 어떤가? 우리의 예배시간에 성도들은 충분히
기도할수있고 묵상할수있는 침묵의 시간이 주어지고 있는가? 이러한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성도들은 예배시간에 충분히 기도하고 묵상하고 설교메시지를
가지고 적용하며 기도할수있는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갖게 된다. 지나치게 급하게 예배의 요소요소를 진행함으로써 회중들을 바쁘고 피곤하게 만드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것은 예배를 지루하게 만들라는것은 아니다. 예배진행을 침묵기도의 요소를 곳곳에 가능하게 하면서 진행하라는것이다.
예배시간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보고 들을수있도록, 단지 설교시간만이 아니고 예배 전체의 시간을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앞에서 그들의 영혼이 나아갈수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예배시간이 성도들로 하여금 고요히 하나님앞에 나가가지 못하게
하는경우를 발견한다. 많은 말들, 많은 순서들, 많은 음악들, 많은 메시지들이 시끄럽게 울려 펴졌지만 정작 회중들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때
그들의 영혼에 고요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이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갖게 하는것이다. 이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예배의 요소 요소들은 그
자체가 주가 아니다. 심지어 설교까지도 주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앞에 경배하는 시간이다. 예배의 모든 요소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한다.
예배의 요소 요소들은 이일을 돕는 역활을 하는 보조일뿐이다. 이것은 반드시
오르간을 사용하는 예배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것은 아니다. 현대악기와 현대찬양음악을 사용하는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없이 음악이 시끄럽게
연주되고 불러지고 많은 말들이 외쳐졌지만 회중들의 영혼은 예배에서 하나님앞에서의 쉼을 갖지 못한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수있는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바로 이 중요한 요소가 본회퍼가 여기에서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간구하고 대면하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한다. 오직
사람들이 움직이고 연주하고 외치고 말하면서 전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여지를 갖지못한 예배는 아무리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설교가 뛰어나도 성도들의
영혼을 충분히 채우지못하는 고갈을 갖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이 성도들의 갈급한 영혼을 만족시킬수있다. 또한 여기서 침묵기도가 예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서도 안된다. 부자연스러운 침묵기도를 말하는것이 아니고 성도들로 하여금 고요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임재를 향할수있도록 돕는
편안하게 흘러가는 침묵기도를 말한다.
„예배안에 참회의 기도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회개로서의 일반적인 요청이서만은
안된다. 참회의 기도가 성서적 표현들을 사용하기보다 오늘날 회중의 표현을 사용하는것이 더 바람직할것이다. 성서의 단어들은 오직 성서봉독시간에만
단 한번 주어져야한다. 대충 세가지의 죄의 고백들이 예배를 위해 충분하고 그 죄의 고백들은 반복해서 사용될수있다. 마찬가지의 사실이 은혜와
은총의 표현에도 적용된다. 참회의 기도는 용서에 대한 간구로 마쳐진다.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하지않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화답한다. 죄의 용서는 설교말씀과 성찬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배안에 참회의 기도시간을 갖는것은 전통적인 예배의
한 요소였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이 참회의 기도시간을 잃어버렸으나 일부 교회들은 이 참회의 기도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여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 참회의 기도를 사용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중에 이 참회의 기도후에 회중들로 하여금 ‚아멘‘으로 화답하고 기도를 마무리하도록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에 반대한다. 이 참회의 기도는 ‚아멘‘으로 화답되어서는 안되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로
화답되어야한다고 가르친다. 왜 그럴까? 참회의 기도도 기도라면 회중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함께 기도를 마쳐야하지않을까?
왜
본회퍼는 ‚아멘‘으로 참회의 기도를 화답하면 안된다고 했을까? 여기 본회퍼가 가르치는 대로 참회의 기도는 본회퍼에게 있어서 우리의 죄의 고백과
용서에 대한 간구로 마쳐져야한다고 말한다. 참회의 기도시간에 목회자가 죄에 대한 용서를 기도할수없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죄의 용서는 설교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찬에 참여함을 통해서 죄에 대한 용서가 선포되어야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예배와 설교의 상호작용에 대한 견해이다.
설교가 전체적인 예배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설교는 이 견해에 따르면 용서의 선포가 되어야한다. 예배안에서
설교의 위치는 바로 죄의 고백에 대한 용서와 은총의 선포의 시간이어야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적 설교자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설교가 은총과 용서의 선포시간이기보다 율법과 정죄의 시간이 되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용서의 선포시간이 설교와 성찬을
통해 울려펴져야한다. 매주 매주 세상속에서 죄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영혼들이 매주 매주 교회에 나아와 고요히 주님을 만나고 죄용서를 간구하고
그리고 죄용서의 선언을 설교와 성찬을 통해 듣는것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가르친 참된 예배의 모델인것이다. 또한 본회퍼는 이 참회의 기도는 성서의
언어와 성서의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회중의 언어와 표현을 사용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참회의기도의 표현이 회중의 표현이어야한다는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참회의 시간이 죄많은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는 자백의 시간이기때문일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고백할때 보다더 우리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는것이 성서의 표현과 성서에서의 인용으로 참회의기도를 드리는것보다
나을것이다. 본회퍼는 이 참회의 기도가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회중의 화답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역시 동일한
선상이다. 죄용서를 참회의 기도시간에 선포하는것이 아니고 참회의 기도는 여전히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죄를 고백하고 함께 주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총을 기다리고 간구하는 시간이기때문이다. 어떤 교회는 바로 이 참회의 기도시간 후에 목회자가 하나님편에 서서의 용서의 선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성서의 표현을 사용하여 용서의 선포를 한다. 이것 또한 본회퍼가 가르치는 예배와 차이가 있다. 본회퍼는 죄의 용서는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된다고 가르친다. 참회의기도후에 바로 목회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용서를 선포할수있다고 가르치지않는다.
„예배안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부터, 혹 서신서와 복음서로부터의 두가지의 성경봉독이 있어야한다. 이 두 성경봉독은 미리 주의깊게 연구되어야한다. 이 성경봉독시간에는
오직 장만이 언급되고 절이 언급될 필요는없다. 이 두 성경본문을 연결하는 첨가는 불필요하다. 설교본문은 이 두 성경본문중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을수 있다.“
본회퍼는 예배안에 두가지의 성경봉독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본회퍼는 두가지 가능성을 말하는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혹은 서신서와 복음서로 두가지 성경봉독이 예배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봉독자는 몇절 몇절인지 언급할 필요는없고 오직 어느 장인지를
언급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날 설교할 본문이 이 두 성경봉독안에 포함될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 주목할것은 ‚포함될수도있다‘라는
표현이다. ‚포함되어야한다‘가 아니다. 항상 반드시 이 두 성경봉독에 설교본문이 포함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설교본문이외에 다른 성서봉독이
설교본문과 함께 예배에 사용될수있다는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항상 설교본문이 이 성경봉독시간에 봉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두
성경봉독을 바로 이어서 할 경우 어떤 낭독자가 하듯이 이 두 성경봉독을 연결하는 첨언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회중들로 하여금 성서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한다. 성서를 성서말씀대로 인간의 첨가없이 듣게 해야한다고 말하는것이다.
„다른
교회들은 더 자주 니케아 신조를 사도신경과 함께 예배에서 고백한다. 니케아신조는 비록 회중에게 낯설지라도 더 자주 예배안에서
고백되어야한다.“
본회퍼는 예배안에 믿음의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통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니케아신조를 통한 믿음의 고백도 더욱 자주 할것을 권고한다.
„강단에서의 인사와 축도는 성서적 표현들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첨가나 일탈을 위한 기회가 아니다. 설교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요‘와 같은 명령형으로 선포되어야한다.
‚어느 어느 성경 구절로부터의 말씀을 들으십시요‘라고 해서는 안된다.“
본회퍼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전에 인사하는것과 축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표현들을 사용하기보다 성서적 표현들을 사용해서 인사과 축도를 할것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도 그날의 설교말씀과
설교본문을 사용해서 인사와 축도를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두가지의 성경봉독이 설교본문과 다를경우 설교자는 설교전에 그날
설교본문을 낭독할수 있다. 이 경우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요‘라고 해야하지 ‚어느 성경구절로부터의 말씀을 들으십시요‘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간접적 표현에서 직접적 표현으로의 전환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것에 대한 초청인것이다. 어느
다른 인간 저자가 기록한 성경책으로부터 낭독을 듣는것이 아니고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라는것이다.
„강단에서의 기도가 설교전이나 후에 드려져야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개혁교회나 영국교회는 그렇게 한다.
강단에서 무릎꿇는것 역시 의심스러운 가치가 있다. 그런 행동은 미리 행해져야한다. 만약 기도가 강단에서 드려져야한다면 가능한 짧게 그리고
자유롭게 표현되게 하라. 예를 들어 ‚주님, 저의 입술을 열어주소서,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도록 그들의 성도들의 마음과 귀를
열어주소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전과 후에 기도를 드린다. 본회퍼는 설교전이나 후에 기도드리는것의 타당성이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기도가 드려져야한다면 가능한 짧게 그리고 자유로운 기도의 형태로 드려지라고 말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전이나 설교후에
기도를 드린다. 본회퍼의 이 대목은 고려해볼만한 대목이다. 설교가 용서와 복음과 은혜의 선포라면 굳이 설교전후에 기도가 드려질 필요가
없을것이다. 또한 참회의 기도가 있고 설교후 목회의 중보기도가 있는경우에 더욱 그럴것이고 설교를 위한 기도는 본회퍼에 의하면 미리 설교자
개인적으로 또는 회중들이 예배전에 드릴수 있을것이다. 그는 예배순서의 요소들이 불필요하게 반복되고 중복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강단에서의 광고는 전 회중에게 중요한것이어야 한다. 이 광고를 위해 많은 노력이 있어야한다. 그
광고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회중의 생명이다. 교회의 장로가 이 책임을 맡을수있으나 반드시 이 광고는 영적인 문제들인지 분명히
해야한다.“
본회퍼는 강단에서의 광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강단에서의 광고는 전 회중을 위한것이어야한다. 일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전 회중을 위한 광고이어야한다. 이 점은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요소이다. 전회중과 상관없는 내용을 긴 시간 예배시간을 사용하여
광고하는것은 바람직하지않다. 그 목적을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수도 있을것이다. 또한 이 광고를 설교자인 목회자가 하지않고 장로가 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많은 교회에서 이 광고를 목회자가 직접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왜 본회퍼는 장로가 이 광고를 맡아야 한다고 했을까? 본회퍼는 이
광고의 시간을 위해 주의깊은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광고의 한문장 한문장을 미리 작성하고 목회자와 함께 장로가 상의하는것을
말할수 있을것이다.
아무 준비없는 즉각적인 광고를 해서는안된다. 치밀하게 잘 준비된 문장을 장로들이 목회자와의 상의를 거쳐서
읽을수있다. 본회퍼는 이 광고가 회중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드시 영적인 문제들을 광고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목회자는 예배에서
설교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설교와 예배인도의 전체적인 순서외에는 다른 사역자들과 짐을 나누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설교자가 모든 예배의
순서를 다 책임져야한다고 할때 설교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피로가 될것이다. 그리고 장로들이 광고를 맡음으로해서 교회의 여러 사역에 대한 상징적인
책임을 장로들과 함께 나누는것을 시각적으로 보일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것이다. 이와같이 가능한한 함께 예배의 짐을 다른 사역자들과 나눔으로서
설교에 더욱 전념하고 집중할수있을것이다. 예배와 설교전에 많은 행정적인 일로 인해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일도 막을수있을것이다.
„봉헌은 아주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봉헌을 중요하게 여길때 비로소 성도들도 봉헌을 중요하게 여길것이다. 때때로
설교자는 봉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야한다. 그것은 교회가 물질이 필요하기때문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을 위한것임을 설명해야한다. 설교자는 또한
봉헌이 순전한 제사가 되어야함을 설교해야한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뉴욕 할렘의 흑인이라 할지라도 주일 예배에서 1달러를
봉헌할수있다.“
본회퍼는 설교자가 봉헌에 대해서도 설교를 통해 가르쳐야함을 언급하고 있다. 목회자가 봉헌을 소중히 여길때 비로소
성도들도 봉헌을 소중히 여긴다는것이다. 봉헌이 순전한 제사가 되도록 설교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이 부분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어떤 설교자나
어떤 회중들은 설교자가 봉헌에 대해 설교하는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않는다. 그러나 여기 본회퍼는 설교자가 성서적 봉헌에 대해 그리고 예배에서의
봉헌의 의미에 대해 중요하게 가르치고 설교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본회퍼는 자신의 뉴욕 할렘의 경험을 통해 이 봉헌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로 바칠것을 소유하고 있다는것이다. 봉헌의 양이 설교하기보다 봉헌의 질을 설교할것을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여기에서 본회퍼의 예배에 대한 생각들을 설교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독일교회의 예배와 다른 지역의 예배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음으로 몇가지 언급들을 생략하고 다루지않았다. 그러나 지역교회 예배를 초월하여 전 교회들이 주목할수있는 공통된 생각들을 설교와 관련하여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