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⑥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Navigation) / 신30:11-16

 몇 년 전에 노회 목사 장로님들과 함께 금산에 있는 KT위성지구국을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20여개의 대형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안테나는 직경 32m, 무게 200톤, 크기가 250평이나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태평양과 인도양 방향의 위성전파를 수신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저는 인간 기술문명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이 안테나 안에 전 세계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 않아도 안방에서 생생하게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까요.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자동차에는 자동항법장치라 불리는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전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주로 사용하던 것을 이제는 실생활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전파를 발사하여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어디에 터널이 있고, 교량이 있고, 속도감시 카메라가 있는지 안내합니다. 지금 현재 속도가 몇 Km인지, 내가 지금 어느 지역을 가고 있는지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초행길이나 정확한 위치를 모를 때 참으로 유용한 도구입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이 돼서 지역이 바뀔 때마다 안내하는 멘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에 들어서면 “여기는 충청도뒨디요 안전운행 하셔야겠꾸만유!” 전라도에 가면 “거시기 전라돈데 겁나게 안전운행 해부러!” 강원도에 가면 “여기 감자바위래요 길이 위험하니 안전운행 하시래요!”
 그런데 어떤 분은 절대로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집에서도 부인 잔소리 듣기 지겨운데 차 속에서까지 여자가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것이 정말 싫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분이 없는 줄 믿습니다.

 암튼 이 모든 것이 바로 위성안테나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항법장치인 네비게이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물건의 위치추적이나 속도조절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위치를 알려주고, 속도를 깨닫게 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가를 안내해 주는 인생 네비게이션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네비게이션이 정확하게 위치를 알려주고, 목적지를 안내한다 해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가까운 길을 더 멀리 돌아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엔 밤길에 네비게이션을 믿고 무작정 따라가다가 갑자기 도로가 끊어져있는 바람에 자동차가 추락하여 목숨을 잃은 뻔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위치와 가야할 길을 가장 안전하게, 정확하게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 장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업그레이드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를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믿음으로 새기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성경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입니다. 매년 4천 4백만 권이 팔리고 있습니다. 영국연합성서협회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6,500여개의 언어 중에서 약 2,5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95%는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약 3억 정도,  5%인 소수 민족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말 성경번역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은 1882년 존 로스 목사가 만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낱권 번역으로 출판됐습니다. 지난해가 성경반포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습니다. 1938년에 최초로 신구약을 우리말로 번역한 <셩경전셔>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1952년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고쳐 만든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1961년에 번역내용을 수정하고, 본분비평의 결과를 반영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개역의 최종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어려운 고어와 한자어를 쉬운 말로 수정하고, 문법이 맞지 않거나 어색한 문장을 다듬고, 장애인 차별 용어도 고쳐서 만든 <성경전서 개역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바로 개역 개정판입니다. 그리고 새번역이나 표준 새번역, 쉬운 우리말 성경 등은 개역 개정판을 근간으로 더 읽기 쉽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출판되고, 팔리고,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성경은 가장 능력 있는 책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방탕아로 살았던 어거스틴이 로마서 말씀을 읽고 변화되어 성자가 됐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오직 성경으로’ 라는 모토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수많은 위인들은 한결같이 성경을 읽다가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경을 읽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능력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성경은 가장 소중한 책입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나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는다. 구세주의 모든 선한 것은 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고백합니다.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성경은 지금까지 인쇄된 다른 모든 책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영생을 얻게 하고, 진리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책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책입니다.

3. 성경은 모든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첫 번째 신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약 1600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맨 첫 권인 창세기는 B. C 1500년경에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 권인 요한 계시록은 A. D 100년경에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 되었습니다.
 성경 66권을 기록한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선지자, 목자, 군인, 의사, 어부 등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헬라어로 ‘데오푸뉴스토스 theopneustos’로 ‘하나님의 숨결로 만들어진’ 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은 비록 사람의 언어로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세계명작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몇 번을 거듭 읽지 못합니다. 읽을수록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한 작품을 평생 곁에 두고 열 번, 스무 번씩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매일 읽어도, 평생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읽을수록 오히려 새로운 감동과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성령님께서 지금도 말씀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한 설교 내용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너희들이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너희가 번성하고,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배반하면 망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가 올라가서 가져다가 그대로 살라고 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 밖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행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말씀을 가지고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14절 말씀을 읽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4)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이나 바다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입술에 있고,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 말씀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능력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데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흔들리는 것일까요? 우리의 기준이 사람이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의 말씀을 내 신앙과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면 결코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사람을 믿고, 내가 가진 것을 믿고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배신을 당하거나, 가진 것을 잃으면 신앙과 삶마저도 흔들거립니다.
 이 시간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닫고, 그 말씀 앞에 아멘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첫째, 부르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면서 어떤 고용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어떤 지위를 주고, 연봉을 얼마 줄 것인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직업과 가족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들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나 대단한 결단력이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는 용기 있는 자들이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부르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핍박자였던 사울을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의 부르심 앞에 사울은 고꾸라지고 맙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일 정도로 종교적 열심이 있었던 사울이 주님의 한 마디 말씀에 완전히 새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 속에 ‘부르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도를 부르시고, 사울을 부르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지가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치유하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향하여 손을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 명하시면 병이 떠납니다.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일어나 걸어 나오라” 명하시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자에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명할 때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입니다.

 <당신의 날개로 날으리라> 책에 보면 인도 최상류층의 자녀인 마리 버기스 라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녀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습니다. 젊은 처녀가 두 다리를 잃었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의 세월을 뛰어넘어 불쌍한 나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됩니다. 수많은 인도인들의 존경을 받는 믿음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두 다리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날개를 주셨습니다.”
 만약 그녀가 두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결코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다리를 잃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두 날개를 통해 천상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음에도 병이 낫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치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거나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그 병속에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은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습니다. 오히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깨달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약함의 자리에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십니다. 내가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 속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 이상 병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건강이 내 삶의 우상이 되는 오류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산다면 우리는 주님의 치유하시는 능력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말씀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덧입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모든 죽어 가는 것들에게 말씀이 임하면 소성케 됩니다. 불의한 자가 의롭게 되고, 세상에 속한 자가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불의한 세리장입니다. 그의 모든 재산은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삭개오를 저주하며 비난합니다. 세상의 지위와 돈은 가졌지만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겠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삭개오는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자신이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불의를 지적하신 것도 아니요, 재산을 나눠주라고 명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선 삭개오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놀라운 변화는 바로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곧 포기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만약 삭개오가 포기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불의한 재물을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살다가 불행한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포기케 하시는 말씀의 능력 앞에서 과감하게 포기했을 때 그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즉석에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한 조각가가 예수상을 완성했습니다. 얼마나 조각이 완벽했던지 마치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는 듯 했습니다. 평소에 예수상을 조각하려다 여러 번  실패한 다른 친구가 묻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명력 있는 예수상을 만들었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예수상을 조각하려다가 늘 실패했네. 그래서 이번에는 대리석을 갖다 놓고, 그 대리석이 예수상으로 바뀌는 데에 불필요한 부분을 계속 떼냈지. 그랬더니 저런 예수님상이 남았다네.”

 우리 안에 아직도 떼어 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 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주인 삼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에 그는 새 생명을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아직도 붙잡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내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떼어 낼 때에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모든 것 내려놓고 순종할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요 교과서입니다. 항해를 하는 배가 나침반이 고장 났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험한 세상길을 항해하는 인생 여정 속에서 성경 말씀은 나침반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생노병사의 해법을 알려주는 교과서입니다. 우리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우리 인생을 올바른 목적지로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식욕은 건강의 시금석입니다. 식욕이 떨어진다는 것은 건강의 적신호가 켜진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내가 성경말씀에서 멀어져 있다면 영적 건강의 적신호가 켜진 것입니다. 무디는 ‘성경은 당신이 죄를 멀리하게 하고, 죄는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을 멀리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헐떡입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어느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읽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먹으면 하루가 평안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모든 길로 행하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생존케 하십니다. 번성케 하십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고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탁월한 네비게이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보십시오. 새로운 인생의 문이 열립니다. 새로운 축복의 길이 보입니다. 아직 내 안에 진리의 네비게이션이 꺼져있다면 다시 켜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이 진리의 네비게이션을 갖지 못한자들(VIP)에게 선물로 전하십시오. 더불어 누리는 행복한 세상, 행복한 길이 활짝 열려집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복 있는 자일까요? 다윗은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1:1-2)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바로 복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입니다. 내 인생의 설계도요 길을 비추어 주는 등불입니다. 내 인생의 영원한 네비게이션-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