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간고를 많이 겪으신 분
성경: 사 53:3
지난 번 태풍 루사가 남기고 간 상처는 매우 큽니다. 인명피해가 200여명이 넘었고 재산피해도 4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무주 산골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주군 금평면 산골에 ‘주님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태풍 루사가 전국을 강타한 지난달 31일 밤 7시 교회 뒤의 야산이 무너져내리면서 교회가 통째로 흙탕물에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박효심 사모님은 종탑 사이에 쓰러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홍칠만 목사님과 기쁨양(8) 평강군(4) 두 아이는 이튿날에야 100m 떨어진 진흙더미 속에 파묻힌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일 친구 집에 가 있던 큰딸 찬미양(12)만 무사했습니다.
사모님은 이틀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하반신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합니다. 남편 홍목사님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3일에도 충남대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현재 사모님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신경이 회복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모님을 간호하고 있는 올케 한명순 권사(47)는 㰡찬미가 충격 때문인지 계속 울기만 하고 엄마와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㰡며 㰡무주의 학교도 폐교된 상태나 다름없어 이곳으로 전학을 시킬 생각㰡이라고 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목회하다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무주 산골에 와서 20여명의 성도를 돌보면 목회하여 왔는데 이런 슬픔을 만난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중심으로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2)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돕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1.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에 앉아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영광스런 하늘 나라를 떠나셔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바 되셨던 그분은 천군 천사들에게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천지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그분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1)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시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도 우리처럼 때로는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기쁨과 슬픔을 아신 분이셨습니다. 그의 몸은 손으로 만질 수 있었고,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리는 인간과 동일한 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유령과 같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잠을 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곤하여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도 배에 고물을 베고 주무시기까지 피곤을 느끼셨습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때로는 병에 걸려 아프기도 하고 병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우리의 몸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분은 결코 죄로 물든 적이 없는, 죄로 부패될 수 없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점 외에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셨습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의 슬픔과 질고를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조차도 “내가 인간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겠나이다”라고 말할 능력이 없습니다. 천사의 고난은 인간의 죄를 보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오시므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2)그분은 겸손한 분이시기에 우리와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수고가 있습니까? 어떤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분은 지금도 두 팔을 벌리시고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중국 북경에 가면 자금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천안문을 통과하여 그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옛날 중국의 황제들이 살던 궁궐입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크던지 성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샅샅이 구경하려면 3일 정도는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황제만이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황제가 다니는 길은 중앙통로입니다. 거대한 돌을 옮겨서 용의 그림을 새겨 놓은 길입니다. 이런 지체가 높은 황제를 일반 서민들이 평생 한번이라도 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평생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감히 황제를 알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시면서 30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삼년 동안도 시골뜨기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세리나 죄인들을 만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헤롯의 궁전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갈릴리바다 어부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이 겸손의 왕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만나 뵈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3)그분은 우리처럼 시험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옛말에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부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사정을 알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와 똑 같은 시험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물질에 대한 시험도 받으셨고, 명예에 대한 시험도 받으셨으며, 정욕에 대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험에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승리하였듯이 예수님도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험받는 우리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생활을 보면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의 가난이 어떤 것인지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기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그분은 간고를 많이 겪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신 분”이십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다는 말을 흠정역에서는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s)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슬퍼하는 사람이 아닌 “슬픔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기쁨의 사람도 있고 풍요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슬픔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슬픔과 서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좋을 것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를 본 사람은 슬픔을 본 자이고, 슬픔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애 1:12)
1)간고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특별히 ‘간고를 많이 겪은 자’라고 불립니다. 그것이 그의 특별한 징표요, 특별한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거룩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수고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아버지의 일을 전심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를 ‘달변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처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합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불타올랐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고 놀랄만한 특성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그의 간고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사 52: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눈물은 그의 가슴에 붙은 훈장이었고 십자가는 그의 방패였습니다.
그제 우리 성도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지에서 하관을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옆에 있는 묘에 찾아와서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내용을 들어보니 “보고 싶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으시면 그렇게 묘비를 붙들고 보고 싶다고 소리내어 우실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단순히 간고를 겪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많이 겪으신 분이십니다. 가장 순종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혹독한 매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의 간고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죄는 간고를 낳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영혼을 단단하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기 때문에 슬픔의 고통을 무디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간고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강도에게 감옥은 집처럼 편안하고 감옥에서 주는 음식은 너무나 익숙하고 맛있지만, 죄 없는 자에게 감옥은 비참한 그 자체이고 감옥과 관련한 모든 것은 낯설고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가 없는데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간고를 많이 겪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3)최고의 간고는 우리를 대신한 징계였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지옥의 목마름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슬픔이 있습니까? 간고를 많이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간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3.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질고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도 이름도 모르는 질병들이 수가 없고, 치료 불가능한 질병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그 질병이 어떤 이유 때문에 생겼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병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미국 안에는 약4천만 명의 만성 두통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과학 천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에 왜 그토록 많은 만성 두통환자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욕구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의사인 그레이스와 그래함팀이 128명의 외래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가 있습니다.
두드러기 때문에 찾아온 31명의 환자들-자신이 멸시, 천대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두드러기가 생긴다고 합니다.
27명의 습진 환자-심한 간섭이나 방해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습진이 일어났고,
10명의 비염 환자-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염이 일어났고,
7명의 천식 환자-어떤 절망감을 가졌을 때 천식이 일어났고,
9명의 십이지장 궤양 환자들-증오심을 품고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만나는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38년된 병자도 고쳐주셨고, 12해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을 고쳐 주셨으며, 앉은뱅이,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으며 가장 무서운 질병인 죽음에서도 살려주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아시기에 채찍에 친히 맞으셨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간고를 많이 겪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슬픔과 질병을 맡기시지 않으시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만이 우리들에게 참된 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맡겨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