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레암 골즈워디 / 성서유니온선교회
이 책은 설교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접근하도록 돕는다는 의미에서 좋은 지침서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성경, 성경신학, 설교 등을 검토하며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준비하는 것과 연결되는지를 보여 준다. 후반부에서는 성경신학적 방법을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문학 형태에 적용한다. 이 책에는 독자들이 성경 안에 있는 계시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여러 도표들이 들어있다. 저자는 성경 전체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해서 명쾌한 도해와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성경신학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을 위하여 구속사역 설교의 실제적인 암시와 탁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특별히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일에 도전을 주는 데 견고한 기여를 했다.
저자 그레엄 골즈워디는 미국 버지니아 리치몬드시 유니온 신학교에서 존 브라이트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주 시드니 무어신학교와 퀸즈랜드의 장로교 신학원에서 구약을 강의하며 현재 호주 브리스베인에 있는 성 스데반 교회(성공회)의 담임목사이다.
1부 설교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
1.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설교자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기독교 설교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성의 문제와 우리가 성경 본문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씨름해 왔다. 이것은 구약을 설교할 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신약을 설교할 때에도 좀더 미묘하기는 하지만 동일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만약 한 구절이나 단락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 사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다면, 어느 정도까지 연결해야 하는가? 진짜로 바울은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똑같이 상투적인 진부한 언급으로 끝맺는 설교를 하기를 원했는가? 구약은 복음과 연결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과 사건들 사이의 연관성이 신약의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결과 설교할 때에 몇 가지 중요한 잘못을 하게 된다. 구약의 사건들을 단순히 도덕화하거나 단순히 그저 본받아야 할 경건한 모범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구약의 성도에게서 따라야 할 본을 찾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선별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구약이 어떤 사람들이게는 얼마나 당혹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경건한 행위라고 간주하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의 기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 있는 도덕적인 문제들과 관련된 논의를 제기한다. 구약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사람들에게 구약은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의 근원이 된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본받을 만한 분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됨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중요한 차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신약의 가르침에서 중심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복음을 윤리적인 노력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사역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이나 죽으심에서 유일무이한 사역이며 우리는 그 사역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복음 사건을 흉내 낼 수도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복음 사건을 믿을 뿐이다. 도덕적인 노력으로 천국에 가는 길을 닦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사역을 의지할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대로 살거나 행하라고 명령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신약을 따라 사람들에게 복음이 의미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대로 살라고는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독특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복음과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맺는 열매를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윤리적인 모범으로 격하시키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생각들을 배격한다면,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사항들은 우리가 성경을 다루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신약의 메시지들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의 윤리적인 모범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우선적이며 유일무이하며 독특한 사역에 비해 부차적이며, 그 사역에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구원 사역의 중심에는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의 삶과 죽음이 있으며, 그의 영광의 부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올라가 좌정하심이 있다. 부활은 구약에 있는 모든 신학적인 주제들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성취하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을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에 대한 흔한 왜곡은 완전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성경적인 요소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분리함으로써 발생한다. 성경의 윤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우선적으로 주장될 때, 그것이 바로 올바른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거룩한 삶에 선행하는 동시에 그러한 삶의 기반이 된다.
2. 성경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적 성경관의 기본 전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며 이러한 유일성은 하나님의 유일성에서 나온다. 또한 성경은 유일한 구원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길에 대한 단 하나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3.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 설교자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신학은 성경 계시에 대한 큰 그림이나 전체적인 개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그것은 성경 계시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서, 성경 계시는 영구한 원리들을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물론 성경 계시에는 영구한 원리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추상적이지는 않다. 그 원리들은 점진적 계시라는 역사적 상황 가운데에 제시되었다. 만약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을 말하게 한다면, 그 전체가 일관성 있고 의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즉 성경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동시에 탁월한 통일성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부합하려면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 관점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4. 설교는 무엇인가?
신약 성경을 볼 때, 교회 성장의 주요 수단이 복음 선포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하면서, 설교에 대해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선포 혹은 설교 행위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옛날의 종교적 전통들을 새롭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어떤 형식으로 선포하든 그 내용은 예수의 복음이었다.
5. 예수님은 성경신학자였는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음주의 견해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명백한 태도에 의존해 왔다. 그리스도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함께 성립하든지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성경 권위에 대한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병행된다. 권위 있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려면 그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설교자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설교에 있어서 성경신학의 역할을 이해하고 계셨으리라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6. 성경은 어떤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가?
성경신학은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를 강화시킨다. 성경의 통일성이란 우선적으로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근거로 한 일종의 신학적 확신이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사용한 원칙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결과다. 복음의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 오는 한 길로 행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 됨이 성경에서 어떻게 발전하는지가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다.
성경에 있는 통일성의 본질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설교자가 계속 고수해야 하는 내용이다. 성경신학은 성경 안에 통일성과 구별성이란 두 특성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다.
7. 복음은 성경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복음은 해석학적 열쇠이며 성경신학적 중심이다. 그리고 복음은 역사와 종말론의 틀을 제공한다.
8. 성경 계시의 구조는 무엇인가?
성경신학자들은 간단히 연대기적 접근 방법을 통해서 점진적인 계시의 역사적 구조를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연대기적 접근방법은 가장 초기 사건인 창조와 타락에서 시작하여, 성경의 시간대를 따라 진행해 나가면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성격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의 기능을 경시하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연대기적인 방법론은 모든 성경 인물들과 저자들이 가지고 있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당연히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주장은 복음 사건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분명히 선지자의 계시는 복음 사건을 계시하므로 그 복음 사건은 당연히 구약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선지자들의 기대들이 성취되려면 또 다른 계시가 필요했다. 선지자적 기대들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성취로서 선포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자증적인 말씀이었다.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예상하던 하나님 나라 도래의 방식은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역에 비추어서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했다. 그 결과 우리는 복음에서 성취된 분명한 말씀과 더불어서 시작해야 하며, 이 성취된 말씀으로 구약 성경의 실질적인 구조와 의미를 보아야 한다.
9. 예수를 언급하지 않고 기독교적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성경에 있는 차원들은 우선 하나님과 창조 세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 세계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과 나머지 피조 세계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은 창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지만, 동시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죄는 이 질서에 대한 인간의 거부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반항이다. 구원은 실재의 모든 것을 바른 관계들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다. 성경에서 이 하나님 나라의 과거와 미래를 그리지 않는 부분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간의 타락이라는 현재의 맥락 가운데 비추지 않은 부분도 전혀 없다. 성경이 하나님과 창조 세계라는 기본 구조 아래서 실재를 제시하므로, 모든 본문은 실재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 부 : 설교에 대한 성경신학의 실제적인 적용
서론 : 모든 성경 안에 있는 그리스도
설교자가 장르를 정확히 정의를 내리거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르들에 대한 일람표를 작성하는 일은 덜 중요한 일이다. 더 중요한 일은 문학이 서로 다른 역할을 위해 각기 다르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이해하고, 본문들을 주해할 때에 그 본문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지배적인 장르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 상당히 큰 단위의 본문 안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부 장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본문의 장르와 기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반적으로 성경이 본질적으로 명료하다는 원칙과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을 믿는다.
10. 구약 성경의 역사 서술 본문 설교하기
역사를 서술하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두 개의 광범위하고 매우 상이한 접근을 먼저 구분해야 한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구약의 역사 서술 본문들은 구원사의 두 시기에 걸쳐 있다. 성경 역사의 시작에서 솔로몬 재위 첫 부분에까지 이르는 첫 시기에서 강조점은 구원의 길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의 이스라엘의 쇠퇴를 다루는 역사 서술 본문들은 대체로 매우 부정적인 초점을 제공한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구원의 길은 본질적으로 정해진 자리에 있다. 쇠퇴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들에 대한 주석일 뿐 아니라, 다윗의 통치에 영광이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 계획과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그의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 일이 잘못 진행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생각하셔서 나온 것이 복음인 것은 아니다. 창조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전에 생각하신 것이 복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기초가 서기 이전에 선택하셨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복음은 구약 성경에 있는 전체적인 역사 과정보다 전에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임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11. 구약 율법 설교하기
구약 성경의 율법에 대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사에 그 율법의 맥락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율법은 은혜로 택함을 받고 은혜로 먼저 구속함을 받은 백성에게 주어졌다. 율법이 행위로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서 기능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ꡒ율법ꡓ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ꡐ토라ꡑ라는 말의 통상적인 번역어라는 사실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것처럼 좁은 의미의 율법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엄격하게 말하면 ꡒ교훈ꡓ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시내산 율법에 호소하는 일이 구약 시대 내내 여러 방식으로 계속되는 반면, 신약에서는 그 시내산 율법을 어떤 식으로든지 기독교인의 행동을 주관하는 규범적인 표현으로 여긴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율법과 복음의 정확한 관계는 신약 시대 이후로 논쟁과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과 토론이 많지만, 확신할 수 있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복음 사건은 율법에 대한 거부가 아니며, 율법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12. 구약의 선지서 설교하기
각 선지서에는 독특한 메시지가 있으며, 그 메시지는 대개 그 선지자가 말해야 했던 역사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모든 선지서의 메시지에 포함된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1. 선지서들은 뼈아픈 비난과 고발의 말씀으로 그 백성의 언약 파기를 말한다.
2. 선지서들은 이미 왔으며 앞으로 임할 심판을 말하면서 이 어리석음의 결과들을 경고한다.
3. 선지서들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특정한 결론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실 것이다. 회복에 대한 이와 같은 신탁의 말씀들은 구약 종말론의 필수 요소들이다. 선지서들은 아브라함에서 다윗에 이르는 시기에 확립된 구원사의 패턴을 취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큰 날에 행동하실 때인 미래의 유례없는 영광과 광채 가운데로 비춘다. 그 날에 온 땅 위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빛을 보게 될 것이며, 그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복을 통하여 구원을 발견하는 무리가 나올 것이다.
설교자는 유의하여서 선지자들을 이 구속사적 틀 가운데 놓아야 한다.
13. 지혜 문학 설교하기
성경에는 두 가지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이방인의 지혜와 경건한 지혜로 구분할 수 있다. 경건한 지혜는 하나님이나 성령을 포함하며, 그저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에 넣어주거나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이나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이것은 여러 문제를 생각하거나 우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과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계시를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의 심리상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간이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지혜가 바로 성경 지혜 문학의 주제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결정을 내려준다면, 이 지혜 문학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지혜와 구원사의 주요 연결점은 솔로몬과 성전이다. 지혜 문학에는 사람이 선한 삶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인생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지만, 율법 준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완벽하게 이룰 수 없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지혜가 완전하게 만난다. 더 나아가, 성경의 여러 책과 인간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어리석은 일을 하기 쉽다. 지혜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인생과 현실을 이해하여 지혜로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죄가 물들이듯이, 우리의 어리석음도 물들인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 두 실패는 사실 하나의 실패이며, 그 두 실패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 처리된다. 그의 의가 우리 신자들에게 돌려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신다는 의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참으로 지혜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할 때도,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14. 시편 설교하기
시편을 설교할 때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시편의 중요성은 시편 작성 연대에 대한 의문에 거의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편들을 개별적으로 살펴서 각 시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경에 속하는 책으로서 전체 시편 가운데서 그 시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시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들과 인간의 실패를 보여준다. 서술된 역사서와 선지서들처럼, 시편들은 그 왕국의 분열과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동하실 그 날에 대한 소망을 기술한다. 구원사를 읊조리기도 하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기도 하고, 회복을 바라면서 비탄 중에서 외치기도 한다. 선지자적 종말론의 위대한 주제들은 역사서들의 중심적인 주제들과 더불어 시편에도 나온다.
시편 설교에는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설교할 때 채택해야 하는 기본적인 해석학적 원칙들이 동일하게 포함된다. 해석 과정에서 우리는 개별 시편의 독특한 측면들과 그 시편들이 정경적인 맥락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해당 구절을 해석할 때, 먼저 즉각적인 신학적 지평과 그 구절을,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를 발견하는 구속사적인 전체 패턴과 그 본문을 연결해야 할 것이다.
15. 묵시론적 본문 설교하기
묵시론이라는 장르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이 장르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문학 장르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설교자는 그 본문의 성격에 반응을 나타내야 하고 그 본문의 의도를 올바르게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묵시론적이라고 가리킨 본문들이 공유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특징은 선지자적 종말론의 일반적인 강조점을 넘어서는 종말론적 관점이다. 묵시론을 하나의 장르로 구별하여 칭할 경우, 그 장르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많이 모으려고 할수록 그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본문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특별한 이해력이 필요한 문학적 관용구가 담겨 있는 본문을 만난다면, 그 본문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묵시론적 본문들을 설교할 때, 중요한 점은 묵시론이 익숙하지 않거나 그러한 본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본문들의 신비를 벗겨내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묵시론적인 본문들에 나오는 용어의 기이함에 매료되거나 혹은 반대로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다. 다행히 묵시론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모든 성경 본문들이 좀더 넓은 맥락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맥락에 주목한다면, 이러한 본문들을 좀더 넓은 성경신학과 구원사의 관점과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늘 존재하는 유혹인 ꡒ재림ꡓ 전문가가 되려는 유혹을 저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중요한 교리가 자칭 예언자들과 현대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해석자들의 즐거운 사냥터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말론을 복음과 연결한다면, 이와 같은 종류의 실수를 예방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
16. 복음서 설교하기
복음서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복음서들의 내러티브와 우리의 접촉점들이 무엇이며, 성경신학의 주요 차이점들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까지 말씀하신 것은 모두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상하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이다.
17. 사도행전과 서신서 설교하기
성경신학의 주요 측면 중에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 표현되며 서신서를 설교할 때 설교 방식에 영향을 줄 측면은, 미래의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기독교인의 실존과 역사상 복음사건의 관계이다. 서신서를 설교할 경우, 서신서의 한 부분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든지 단 한 절로만 설교하든지, 해당 서신서 전체의 메시지가 드러나도록 설교해야 한다. 각 설교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18. 성경신학 설교하기
성경신학은 기독교적 실존에 영향을 주는 신약 성경의 개념이나 주제의 진정한 맥락과 기반과 질감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데 있어서 가치가 크다.
이 연구의 중심적인 강조점은 어떠한 본문을 선택하든지 그 본문을 성경신학의 맥락에서 다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본문이 전체의 한 부분이며, 그 본문이 전체적으로 통일된 성경의 메시지에서 그 의미를 취한다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며, 여러 선택들 가운데 하나도 아니다. 그 본문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의 메시지 안에 있는 맥락에서 이반한다면, 어떠한 본문도 그 참된 의미를 내놓을 수 없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각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이 원칙에는 전혀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성경이며, 성경 메시지의 충실한 선포자가 되고자 한다면, 가르치고 설교하는 방법을 성경의 특성이 전체적으로 지시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본문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방식이 성경계시의 위대한 구조에 맞는 방식에 따라 정해지도록 성경신학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성경에 접근한 방법과 결과를 보여주는 설교를 실제로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사실 강조점의 차이이지, 두 접근을 완전히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외 없이 모든 설교에는 성경신학을 한 결과가 들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왔는지를 입증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설교는 어느 정도 그러한 일을 해주어야 하지만, 그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아야 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