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9) “절제”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몇 년 전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적이 있습니다. 인라인 스케이트는 스케이트 날 대신 바퀴를 달아 도로 위에서도 탈 수 있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평지에서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내며 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리막길입니다. 조금만 경사도가 있는 길에서도 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경사가 심한 곳은
네 발로 기어내려 와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브레이크 장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브레이크 방법을 터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 방법을 터득한
사람은 내리막길이나 어디든 신나게 탈 수 있습니다.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브레이크 장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가 100km 넘는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 성능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동차는 흉기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브레이크 장치와 같은 역할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입니다. 순서로는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꽃이라 할 수 있고, 나머지 열매들을 맺기 위해 가장 필요한 열매입니다. 당시 희랍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윤리 중 하나로 이 절제를 들었습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한 4개의 덕, 곧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중 하나가 곧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 강해를 시작하며 첫 강에서 프랭클린이 실천했던 13가지 덕목의 예를 든 바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절제였습니다. 절제 없이는
어떤 훈련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만큼 무절제한 동물도 없습니다. 어느 날 돼지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과식하는 사람을 비유해 “돼지처럼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실제 돼지들은 위의 70, 80%만 차면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식으로 고생하는 돼지는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과식이나 소화불량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고 소화제를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너무
먹어 요즘은 다이어트하겠다고 난리입니다. “돼지처럼 먹는다”는 말보다는 “인간처럼 무절제하게 먹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개미들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한다해도 과로사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동물들 중에서 인간만 과로사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적인 욕구만해도
동물들은 번식의 필요를 위해서 짝짓기 기간에만 합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하고, 강제적인 폭력으로 행하기도 하고, 그것을 쾌락으로
바꾸어버린 것은 인간들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제가 가장 필요한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절제는 거친 말을 길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길들이지 않은 말은 아무 소용도 없고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홍수가 나서 둑을 넘쳐흐르는 물은 위험합니다. 절제는 물이 넘치지 않고 일정한
곳으로만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물이 우리에게 혜택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절제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 규정하는데 정말 맞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먹을 것과
성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쾌락과 사치를 말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물질과 명예욕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중독
그러나 인간을 유혹하는 이런 욕망들은 너무나 강해서 절제하기 쉽지 않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심할
경우 중독에 걸리고 맙니다. 식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회자나 유명인들이 이
문제에서 많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왕왕 봅니다. 술이나 담배에 대한 욕구, 마약에 대한 욕구도 끊기 어렵습니다. 어른들은 도박의 유혹을 끊기가
어렵습니다. 청소년들은 게임이나 채팅의 유혹을 끊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쇼핑 중독에 걸려 있고 습관적으로 도둑질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끊기 어려운 욕구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반응을 볼 때 육체적인 우리 몸은 기본적으로 무절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몸은 자기 필요에 맞게 잘 반응합니다. 자기에게 좋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절제를 합니다. 문제는 의식, 곧 인간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좋은 생각, 좋은 의식만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좋지 않은 의식이 습관화된 것,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 부릅니다. 욕망이 통제 못할 정도가 되면 중독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소망은 본질적으로 우리 몸은 무절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중독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기본적으로 모든 중독 현상들은 애정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대리 만족의 대상을 찾습니다. 그것을 술에서 도박에서
섹스에서 찾다가 결국은 습관화되어 중독에 걸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욕망이란 것이 이처럼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우리는 성령의 생각을 해야 할 것이요, 성령이 주시는 생각으로 육신의 생각과 싸울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혼자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는 욕망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하게 노동하는 것도 좋습니다. 유혹이 되는 것은 아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옛날 군자들은 신독(愼獨)이라 하여 혼자 있을 때를 매우 신중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로 혼자 있을 때 절제할 수 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독’ 하는 방법에 대해서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군자가 어두운 곳에서도 벌벌 떨며 감히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상제’가 너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속까지 비춰보고 감시하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마음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동시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명령과 경고를 듣게 된다는 뜻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천주학과 관련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그가 하나님 신앙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독’에서는 초월적 존재 앞에서 삼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우리는 절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중독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수술용 칼입니다.
레이저 칼보다도 더 예리하고 정확한 성령의 검입니다. 이 성령의 검이 우리 안에서 악한 습관과 중독된 우리 마음을 수술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세계 3대 고백록 중 하나인 『참회록』이라는
기독교 고전을 썼고, 『신의 도성』을 비롯한 그의 여러 신학 저서들은 중세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결정적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청년
시절은 방탕했고, 부모의 근심거리였습니다. 어거스틴은 10대를 불량배들과 어울려 쾌락을 좇고, 도둑질도 하며 방탕하게 보냈습니다. 20대에는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 여자와 동거하여 사생아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또 당시 기독교 이단이던 마니교에 흥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32세가 되던 해에 어거스틴은 소나기와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합니다.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내 인생의
비참함이 그대로 내 눈앞에 드러났고, 강한 폭풍이 내 영혼을 흔들더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던 때의
모습을 그의 『참회록』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왔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나는 성경책을 펴들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이 말씀이 어거스틴을 변화시켰습니다. 방탕한 삶에서 절제된
삶에서, 육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꾸었습니다.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야 우리는 죄악에서
중독에서 절제할 수 있습니다.
목표 의식의 부재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 말씀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올림픽이나 전국체전이나 목표가 분명한 운동선수는 절제를 합니다. 먹는 것도 절제하고, 함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조심합니다. 중요한 시험이나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은 TV 보는 것을 삼가고, 노는 것도 삼가고 오직 공부에만 집중을 합니다. 우리가 무절제하다면 그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목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을 육상 경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승점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모든 거추장스런 것들은 다 버려야 합니다. 다른 데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난관이 있더라도 돌아서거나 주저앉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절제하며 경주에 충실한 사람만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중력은 절제력에서 나옵니다. 못이 단단한 나무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힘은 집중력에서 나옵니다. 쓸데없는 곳에 힘을
주는 것을 절제하고 한 곳에 집중할 때 그 힘이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뜨거운 적도의 태양일지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불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극의 태양일지라도 돋보기로 한 곳에 집중하면 불을 일으킵니다. 절제는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 낭비하는 것을 자제하고 한 곳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TV에서 아이들의 절제력 테스트를 하는 실험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고 그것을 5분 동안 먹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면 그 두 배를 약속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참지 못하고 그 과자를
먹어버리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절제하며 참았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를
조사해보니 절제력이 있는 아이가 대부분 학업성취도가 높은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바른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입니다. 먹을
것에서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절제할 수 있고 그것이 그들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다면 무엇보다 자기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고울(goal)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가끔 등산을 갑니다. 좀 높은 산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맞추어 운동을 합니다.
그냥 운동하라면 정말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세워지니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하게 됩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그 산을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의식이 없으면 살을 빼기가 어렵습니다. 취직이나 결혼이나 아니면 TV 출연이라는 - 요즘은 이런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습니다 – 목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수 십kg이라도 살을 뺄 수 있습니다. 절제력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분명한 목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정체성의 부족
절제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는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부족했던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은 아마도 삼손일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자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의 힘이었고, 당나귀 턱 뼈를 가지고 블레셋의 1천명을 죽이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 절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들릴라란 여인의 꾐에 넘어가 머리가 깎이고 힘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소경이 되어 소처럼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힘을 회복하여 블레셋의 수많은 방백들을 죽였지만 자신도 죽고 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능력을 받았지만 무절제함으로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사요 구별된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런
자각이 없었기에 무절제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한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처럼 방탕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무절제한 삶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부르신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 바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교회지도자를 향하여 삼가라, 곧 절제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온 양 떼를 치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 떼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다른 것에 욕심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권력이나 쾌락이나 다른 것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는 질문은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묻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 너 아담아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가 자녀들에게 잠자리에서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입니다.
어머니 수산나가 묻습니다. “너희는 누구니?”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어서 묻습니다. “너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니?”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누가 그 일을 시켰니?”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우리로 절제하게 만듭니다. 절제력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절제
절제의 문제는 감정 조절에서도 발생합니다. 감점 조절이 잘 안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분노를 참고 살아서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화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지나친 분노폭발이 문제입니다. ‘울컥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학
용어로 ‘분노조절장애’입니다. 뚜껑 열린다는 표현이나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키고
맙니다.
그런데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분노 표출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 사람이 분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분노가 죄가 되거나 하루를 넘겨 계속 마음속에 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분노라는 것은 자신이 공격 받을 때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감정입니다. 이것을 억제하면 화병이 되거나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폭발하여
심각한 사태를 만들고 맙니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고 잘 풀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감정도 소중합니다. 분노가 잘 흘러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 이것이 절제입니다.
화가 났으면 자신이 화가 났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알고 화를
돋우는 행위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고 자신도 쌓인 것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분노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단지 감정표출로만 끝내지 말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나 제도적인 노력을 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행동화되는 순간 우리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인간관계나 사회에서 끊임없이 분노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그런 상황에
부딪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즐겁게 그 분노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단 화가 나면 잠깐 멈춤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몇 초만 참으면 됩니다. 분노를 마구 표출하는 것보다 절제된 형태로 표출하는 훈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절제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지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동의하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욕망이나 추한 생각도 참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겪고 있을 고생을 생각하니 안타깝기조차합니다. 그분은 충분히
우리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지만 절제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살고, 우리는 거룩과 의와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알고 그것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절제와 인내와 온유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절제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점점 더 절제의 사람들로 바뀌어져 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