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 자비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비하신 하나님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입니다. 이 열매는 성경에 따라서 ‘자비’(한글 개역)로 번역하기도 하고 ‘친절’(표준새번역, ‘kindness’ – NRSV, NKJV, NIV)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자비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엽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 친절에 대해서는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비나 친절이나 모두 인간을 향한 태도라 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위기나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비의 사람 친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라고 번역된 헬라 어는 ‘크레스토테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할 때 그리스도의 원래 헬라어 발음은 크레스투스입니다. 크레스토테스와 크레스투스는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크레스투스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헬라 인들에게는 생소한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혼동한 헬라 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한 사람, 친절한 사람”으로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자비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먼저 그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시편 103편에서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103:8)라 찬양합니다. 로마서에서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2:4)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인자하심’ 바로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인자나 긍휼이나 자비는 각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해서 벌을 주지 않고 참으시는 데서, 더 적극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인생들이 망하지 않고 여전히 목숨 붙이고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찬양을 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20:2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인간 안에도 이런 자비의 마음이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합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선왕이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앞으로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는 제사에 바칠 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두려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제선왕의 눈에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신하를 명하여 그 소를 살려 두라고 합니다. 대신 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왕이 비싼 소는 살리고 싼 양을 받쳤다며 인색하다고 비방합니다. 그렇지만 맹자는 제선왕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하며 이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금수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것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주방을 멀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소의 불쌍한 모습을 보자 그 안에서 자비의 마음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인간 안에 있는 본래적인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감추어진 마음들이 교육과 수양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원래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 자비의 마음이 둔감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된 후 다시 이 자비의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마치 따뜻한 태양이 땅 속에 있는 씨앗 속에서 싹을 틔우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비의 마음이 솟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수록 우리 안에서는 자비의 열매가 더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성령 하나님이 바로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는 저절로 자비의 열매가 맺혀져 갑니다. 마치 우리 안에 성령이라는 자비의 씨앗이 뿌려진 것과 같습니다. 자라게 하는 힘은 씨앗 자체 안에 있는 생명력에 있습니다. 가만 놔두면 저절로 자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밭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 뿌려졌을지라도 우리 마음 밭에 따라 그 열매의 풍성함은 달라집니다. 성령의 자비하심이 우리 마음 판에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밭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그래서 땅이 단단해져 있습니다. 씨가 이곳에 떨어졌지만 단단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립니다. 우리 마음은 선입관들로 인해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위로는 소크라테스가 지나가고 플라톤이 지나갔습니다. 아담 스미스와 칼 맑스가 지나가고, 니체가 지나가며 단단해져버렸습니다. 이에 더해 예부터 내려온 전통, 자기의 경험, 자기 생각들로 인해 아주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런 편견들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의 은혜가 내려도 다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비심이 없는 매우 냉혹한 사람들이 됩니다. 아스팔트처럼 단단해진 우리 마음을 갈아내야 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2)

돌짝 밭에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보통 땅에서처럼 자랍니다. 그러나 흙이 얇기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자 타거나 마르고 맙니다. 뿌리 없는 신앙입니다. 돌짝 밭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바위처럼 단단한 상처들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속에 우울증의 바위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와 상처의 바위 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릅니다. 겉으로는 신사 같아 보이고 대단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바위덩어리들이 차지하고 있어 예수가 도무지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이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주는 참된 기쁨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어떤 때는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위를 깨뜨려야 합니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잘 자라지만 곧 가시떨기에게 추월을 당하고 맙니다. 모든 잡초들이 그렇듯이 가시떨기는 생명력이 더 강합니다.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위로는 햇볕을 막기에 힘차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가시떨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마13:22). 그것은 일락 곧 세상에 대한 즐거움입니다(눅8:14). 염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관심이 딴 곳에 있으니 자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맺더라도 아주 초라한 열매를 맺고 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마음 밭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비의 마음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비의 열매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은 우리 마음 밭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과 같은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인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제사장도 외면하고 레위인도 외면하였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측은지심, 곧 자비의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34) 자기 업무나 자기 시간 등이 방해받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정성껏 돌보아 줍니다.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35) 하룻밤을 같이 했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는 인정을 받고(37), 성경에서 선한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자비는 자신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롭게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재판관 포셔는 잔인한 장사꾼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호소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자비의 본질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땅위로 내리는 부드러운 비와 같습니다. 이중의 축복인데 베푸는 사람과 받는 이의 축복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나 베품을 받는 자 모두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자 성어에도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푼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푼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사실 자비를 행한 것 그 자체가 복입니다. 자비를 행할 때의 보람 그것 외에 다른 어떤 복이 더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비심이 솟아나게 한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거룩한 선물을 준 것과 같습니다. 중동에서는 그래서 거지들이 적선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자비를 베푼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선행을 쌓게 했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행한 자는 죽어서 가는 천국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천국 또한 날로 확장되어 갑니다.

무자비한 사회

자비는 우리 사회에도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매우 무자비한 사회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무자비함은 자살률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2010년 자살자 수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여전히 자살률이 높은데 작년 한 해 자살로 소중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수는 15,566명입니다. 하루에 42.6명 꼴입니다. 제가 매년 자살과 관련된 설교를 하면서 통계를 언급하는데 단 한 번도 자살자가 증가하지 않은 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00년 6,444명 이던 것과 비교해보면 무려 130%가 증가했습니다. 이 중 남성이 약 1만 명이고 여성이 5천 명 정도로 남성의 자살률이 근 두 배입니다. 1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이고, 40대와 50대에서는 암 사망에 이어 2위입니다. OECD 국가 중 1위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1위입니다. OECD 국가의 평균 자살률이 11.3명인데 비해 우리는 근 3배에 달하는 31.2명입니다. 특히 노인층 자살이 많은 데 75세 이상의 자살률은 OECD 평균보다 8.3배가 더 높습니다. 자살 미수자는 대략 10배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러니 한 해 약 15만 명 정도가 자살 시도를 하고 있는 매우 위험한 사회입니다. 자살의 주요 동기는 첫째가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그 뒤를 건강문제, 가정불화, 외로움, 성적이나 진학 문제 등이 잇고 있습니다.

‘자살은 죄입니다.’ ‘삶이 소중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하고 외치기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너무 각박합니다. 우리 사회의 무자비함은 코너에 몰린 사람들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물질 중심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경향, 인간 존중 문화의 미비, 복지 혜택의 미비 등으로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나 직장인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탈락하면 낙오자가 되어 버립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낙오자로 하여금 극도의 절망감에 빠지게 합니다. 또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지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은 이 대열에서 처진 사람들을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노인층 자살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재산도 없고 쓸모가 없어졌다 생각하니 쉽게 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존중 문화의 미비를 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인격 모독을 합니다. 인터넷이나 언론이 참으로 심한데 자신들이 마치 심판자가 된 것 같이 죄인으로 정죄를 합니다. 여기에 복지혜택의 미비는 미혼모나 실업자나 장애인이나 노년층이나 취약계층들을 생존의 위기로 몰아갑니다.

우리 사회가 여유가 있고 좀 더 자비로운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우리 사회 또한 자비로운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 구약 성경에서는 고아와 객과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그 사회의 자비성을 측정하는 척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 24장에서는 자비로운 사회로 가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4:19) 추수를 하다가 곡식 한 단을 놓고 왔거든 다시 찾지 말고 그대로 놔두라는 말씀입니다. 객과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놔두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20) 감람나무 열매를 딴 뒤에 다시 살피지 말고 그대로 남겨두어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21) 포도 수확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샅샅이 따지 말고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도 ‘까치밥’이란 것이 있습니다. 겨울에 까치 먹이가 되도록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남겨놓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 김남주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그런데 우리의 이런 여유나 자비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비를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리나 자기의 사업장을 통하여 이 자비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비심 키우기

우리 안에서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자비의 십자가이고, 모든 자비가 흘러나가는 샘의 근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집약된 곳입니다. 자기 자신이 받은 자비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은 사람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자비를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자비’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불교의 자비심 또한 대단합니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왕자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산속을 지나다 갓 새끼를 낳고 기진해 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굶주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다른 줄 것이 없었던 마하사트바, 곧 전생의 석가모니는 자신의 몸을 주었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너무 힘이 없어 자기 몸을 주어도 먹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기 몸에 피를 내어 핥게 했다고 합니다. 마하사트바는 결국  호랑이의 먹이가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자기 몸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자비심의 공덕으로 석가모니는 나중의 생애에 해탈하여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입었던 호랑이들 또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태어나 석가모니의 처음 다섯 제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자비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비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예수님은 대신 자신의 몸을 찢기고 상하셨으며, 결국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우리 인생들을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의 먹이로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자비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체험할 때만이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행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타인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 존재는 다 같습니다. 모두 살과 뼈와 피로 만들어졌습니다. 모두가 고통은 피하고 행복을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똑같이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에게서는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무자비한 사람의 특징은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율법사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 실패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하고 물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 동족입니까? 이방인도 포함됩니까? 의인만입니까? 아니면 죄인도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로부터 나온다면 거기서는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변명하고 논리만 따질 것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의 주체를 바꾸어버립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도움을 베푼 자가 그의 이웃입니다. 시선을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옮길 때 우리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비의 마음이 우러날 것입니다.

셋째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비심은 고통 받는 자를 목격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있는데 바로 ‘본다’는 동사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1-33) 헬라 어로 눈으로 본다는 뜻의 동사 ‘호라우’를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실상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기의 안위나 이익을 계산하며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대로 강도 만난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맹자의 측은지심에서 제선왕은 소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소를 살리는 자비를 행했던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썼던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부지런히 보고 찾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잠자고 있는 자비심을 일깨웁니다. 고아들이 외로움 가운데 자라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병들어 아파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노인의 힘든 뒷모습을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지하철에서 피곤에 찌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물질을 탐하여 아등바등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탐욕스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멀리 기근으로 독재로 죽어가고 있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피조물이 신음하고 인간의 탐욕과 난개발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보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찾고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자비심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직접 발로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입니다. 보이지 않거든 찾아가십시오. 찾아가서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자비심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비는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입니다. 이 자비의 열매로 풍성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