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따라가기 (5) – 예배 습관

 

누가복음 2:46-49, 이사야 40:30-31

 

어떤 40대 남자와 70대 엄마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40대 남자가 엄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저 요즘 너무 교회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기가 힘들어요. 정말 예배를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니?" 40대의 아들이 예배를 드리기 싫은 3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주일에 피곤하니 잠을 자고 싶고 둘째는 예배드릴 때마다 장로님들의 기도가 어찌나 긴지 지루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고, 셋째는 성가대의 찬양이 얼마나 화음이 맞지 않는지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70대의 엄마가 아들에게 그래도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3가지로 말합니다.
"
아들아,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사람을 보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드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가 꼭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너는 그 교회 담임목사이지 않니!" 목사에게도 예배가 지루할 때가 있다면 이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배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다가오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시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예배에 대하여 어떤 모범을 보이셨습니까?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12살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 오는 길에 일어난 예수님의 어린시절 에피소드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따라 오는 줄 알았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 입니다. 12살이면 5학년 정도 밖에 안되니까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여기 저기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냅니다.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사흘 후에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그 때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눅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때 소년 예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주목하셔야 할 것은 12살 소년 이었던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내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하는 성전을 내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인식하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아시고, 거기서 기도 하시고 예배 하시는 습관이 있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성전에서 회당에서 기도 하는 습관이 계셨고, 예배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거룩한 습관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도들이 성전을 그렇게도 사모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이시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어떤 장소가 있어서 그곳을 구별하여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곳에서 성도들은 주의 임재를 특별히 경험했기에 성전을 사모했던 것 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로 교회가 그런 곳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성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성령께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모아 놓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 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 했기에 우리는 교회의 예배를 강조하는 것 입니다.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첫번째 주제는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입니다.

왜 예배해야 하는가?

1. 예배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목적이기 때문 입니다.


(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불안의 구조성을 보면 존재의 불안(죽음과 운명), 도덕적 불안() 그리고 정신적 불안(허무)이 있는데 정신적 불안은 바로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 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왜 만들어졌는지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묻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나를 지으신 분을 만나기 까지 인생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왜 우리를 지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찬송과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 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교제의 방편이 바로 예배인 것 입니다.

(엡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예배자가 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다윗도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왜 예배합니까?

 

2. 예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아브라함을 말할 때 마다 우리는 그는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배했다는 말 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나 먼저 제단 쌓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집 곁에 장막을 치고 사는 나그네 생활을 했고, 항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며 살았던 사람으로 소개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단을 쌓고…>

예배조차 사람을 위한 예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우리의 인생의 생존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이런 대답을 할 것 입니다. 첫째는 제단이고, 둘째는 장막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제단과 장막…… 창12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무엇을 쌓았어요? 단을 쌓고 그랬어요. 8절에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기에 …. 장막을 치니 그랬습니다. …그는 제단을 쌓았고, 장막을 쳤습니다. 이 제단과 장막은 다시 말하면 교회와 가정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장막 못지 않게 참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은 제단입니다. 장막보다도 훨씬 아브라함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제단입니다. 장막이 아브라함의 육신적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단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영적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단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과의 교통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제단을 쌓은 것으로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제단을 쌓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그네 삶에서 장막을 치고 일생을 살되 벧엘 동편 산, 즉 하나님의 집 곁에다 장막을 쳤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어디를 가나 교회를 떠나지 않으며, 부득이 이사할 때에도 교회를 먼저 알아보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이사 가야 참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가 교회와 멀리 살면 시냇가에서 멀어진 나무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해서 단을 쌓으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에도 보면 주님은 예배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 하시다가 주신 말씀입니다. 두 세사람부터 교회가 시작되는데 바로 그 교회의 예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이곳에 특별히 임재하시는 주님을 믿으십니까? 주의 이름을 찬양 할 때 찬양 가운데 계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믿으십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 할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으십니까? 진정으로 봉헌 할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으십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주의 임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말씀을 청종하는 성도들의 옥토 같은 마음에 주의 거룩한 임재는 더 강하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왜 예배합니까?

 

3. 예배가 능력이기 때문 입니다.


시 105: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 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땅끝까지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과 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피곤해하며 곤핍해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주시는데 창조의 능력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소년과 장정은 힘 있는 청장년을 말합니다
. 그들도 계속 걸어가고 달려가다 보면 피곤하고 곤비하며 넘어지고 자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게 될 때는 이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게 됩니다. 메마른 땅을 계속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계속 달려가도 지치지 않습니다. 아니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비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예배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 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은 ‘세겜’이라는 곳 이었어요. 세겜이란 말이 히브리어론 본래 어깨란 뜻입니다.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힘의 상징입니다…..저 사람은 어깨가 딱 벌어졌어. 그것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 세겜 땅에서 제단을 쌓고 이 가나안 땅에서 삶에 직면할 수 있는 에너지와 능력을 공급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 오늘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Challenge Stress와 그리고 많은 Presser를 직면하고 있는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어디에서 능력을 얻습니까? 어디에서 힘을 얻습니까? 저는 그것이 예배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예배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 내가 예배 나올 때만 해도 좀 처진 모습으로 힘없이 나왔지만 우리가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또 기도를 드리면서 내 마음을 쏟아 내면서, 그리고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 예배 끝나고 나갈 때 어떤 심정이 듭니까?

 

예배 딱 끝나고 나갈 때가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여전히 처진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참석하 고 달라졌어요. 변화됐어요. 새 힘이 생겼어요. 성령을 체험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어요. 새로운 재기의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래, 주님이 함께 하시지.. 다시 일어나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세요.‘할렐루야!’ 저는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저는 예배가 살면 우리 인생이 산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산다” 왜 예배합니까?


4. 예배가 주는 축복이 있기 때문 입니다
.


예배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 그것이 바로 이사야의 체험이고, 베드로의 체험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성전에 들어갔던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이렇게 고백합니다.(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았던 이사야는 다시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주님의 신성을 경험했던 베드로는 고기잡는 현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겸손히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아성찰의 장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 할 때마다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자아성숙의 변화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의 목적..주님의 임재…예배가 능력..축복이므로..

 

어떻게 예배할까요?

1.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예배의 열쇠는 집중입니다. 집중이라는 영어 단어는 집중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concentration입니다. 이 말은 con center를 합친 단어입니다. 함께…중심으로 나아간다는 뜻 입니다.

예배자가 함께 영으로 임재 하시는 그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주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에 실패 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쉽습니다….그래서…. 교회에서 봉사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 입니다. 봉사 하느라고 예배를 소홀히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봉사도 중요하지만 봉사를 하다 보면 지쳐요. 1,2,3,4,5부 가운데 한번쯤은 좀 완전히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령의 체험과 하나님의 그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봉사 일변도로 빠지게 되면은 그 봉사 자체도 오래가지 못해요. 지쳐 버려요. 꺾여 버려요.

 

2.예배를 갈망해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한 사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사건을 보았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 합니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삶을 사셨는지 알 수 잇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특심하셨다는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이 있습니까? 여러분 예배에 대한 이런 열심과 갈망을 갖고 오늘도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요즘 예배로 주목 받는 한 교회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일주일에 20번 이상의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가 일년이면 1,000번 이상의 예배가 드려지는 것 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많은 예배 때마다 새로운 은혜와 감동이 있고, 새로운 결단이 있고, 예배 때마다 예배당이 가득 찬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회는 겉으로 내세울만한 건물도 없습니다.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 1시간 전부터 예배의 앞자리를 잡기 위해 거룩한 경쟁을 벌입니다. 예배시간 10분 전 부터는 예배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예배 시작 10분후에는 모든 예배당의 문이 닫힙니다. 늦게오는 사람은 예배당에 들어 올 수 없게 됩니다. 이 교회는 고정된 의자가 없어서 수백명의 성도들이 먼저와서 수천개의 의자를 폈다가 예배 끝나면 수천개의 의자를 접습니다. 요즘 이 교회에는 12,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뜨겁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삼일교회입니다.

 

A.W. 토우저(Tozer)는 말하기를 “세상이 회심하지 않은 것보다 교회가 회복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복이 되어야 여러분도 그 속에서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교회가 은혜롭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예배는 전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

예배는 반심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드리는 것 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역대하 16: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온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예배하여야 합니다.

시편 119: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그 가사 하나 하나를 마음에 새기면서 정성껏 찬양하고, 봉헌 할 때도 정성을 다하여 드리고, 다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할 때에도 기도하는 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기도하듯이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는 마음으로 따라 해야 합니다.


4. 예배는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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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인가 하면, 똑같은 날이지만 일요일은 주님께 드리는 날로 따로 구별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흔히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하나님께 이미 드린 날이요, 구별해 놓은 시간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빠지거나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그 어떤 일도 예배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5. 예배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중에 들어올 때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너무 즐거워 춤을 추다 옷이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즐거워 한 것입니다. 왕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시편에도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시122:1절 “사람들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습니까?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갈 때 기쁨이 있습니까? 시편 100:2절을 보십시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예배의 본질은 기쁨으로의 섬김입니다. 구약의 예배나 신약의 예배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예배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손뼉을 치고 춤을 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이 샘솟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잔치입니다. 축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얼른 교회에 나가고 싶고, 주일이 자꾸만 기다려지고,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6. 겸손함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전통적인 일본 식당에 가면 일본 사람들이 입는 전통 복장인 기모노를 입고, 일본식 슬리퍼를 신은 일본 여인이 의자 옆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문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그만 일식집의 여종업원들도 손님을 왕으로 대접하며 서비스를 하는 시대입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충대충 Service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정말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7. 준비되고 정성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예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신 이유입니다.

사무엘하 24:25절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께 정성된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6: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을 때.... 3백명의 군사로서 모래알과 같이 많은 미디안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그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21:22절에서는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니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쳤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있는 예배가 최상의 예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배의 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자로 반드시 복 받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예배 중심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예배 시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좋아하고, 주님을 즐거워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고 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