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6: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여호수아 6장에 기록된 여리고성 정복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전쟁 사건이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편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체험한 전쟁이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편에서는 그 전쟁은 처참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그러면 여리고성 정복 사건에 담긴 진리들은 무엇인가?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음
첫째로,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그 땅의 원주민들을 다 죽이게 하셨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 가운데서 이 일을 행하셨다.
본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노라"고 말씀하셨다. 16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말했다.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붙여주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성의 남녀의 사람들과 노인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또 소들과 양들과 나귀들까지 다 죽인 것이 인간적으로는 잔인한 행동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처참한 일을 뜻하시고 행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심히 컸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죄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이었다. 레위기 18:24-25에는, "너희는 이 모든 일[근친상간의 음란한 일들, 동성애, 짐승과의 문란 등]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말했다.
또 신명기 7:1-5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신다. 특히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를 미워하신다. 그것들은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한 소돔 고모라성을 유황불비를 내려 멸망시키셨다(창 19장). 이와 같이 그는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심히 음란했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완전히 멸망시키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들과 언약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인간적으론 불쌍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도, 소돔 고모라성의 심판도, 또 최종적인 지옥의 심판도 참으로 무섭다.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 됨
둘째로, 여리고성 정복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지시가 때로는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할 때 이루어진다.
본장 1절에 보면,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성을 점령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고 또 많은 군인들의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에 단순히 순종했다.
하나님의 지시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매일 성을 한바퀴씩 돌라는 것이었다. 도는 행렬에 순서가 있었다. 몇 명의 무장한 자들이 맨 앞에 섰다. 원문에는 '무장한 자'라고 단수로 되어 있지만(7, 9, 13절), 아마 한 명이 아니고 몇 명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영어 성경들과 한글 성경은 복수로 번역했다. 그 다음에 일곱 양각나팔[소나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든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섰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섰다(12절). 언약궤는 보통 때는 레위인들 중 고핫 자손들이 메지만(민 4:15) 요단강을 건널 때(수 3:6)와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메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모든 군사들이 행진했다.
그들이 여리고성을 돌 때 한 가지 조심할 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외치지 말고 음성을 들레지 말고[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입으로 아무 말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10절). 오직 일곱 양각나팔을 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다(8절).
그들은 6일 동안 매일 그렇게 해야 했다. 그리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 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그 당시 여리고성은 둘레가 약 600미터이고 면적이 약 28,300평방미터 [약 7,000평] 정도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자그마한 성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 시대의 성은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용도이었고 평소의 생활은 성안에서뿐 아니라 성밖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정도 크기의 성이라면 제7일에 일곱 바퀴를 도는 것은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성을 일곱 바퀴 돈 후, 양각나팔을 든 제사장들은 나팔들을 길게 울려 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큰 소리로 외쳤고 그 성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으로 들어가 그 모든 사람들을 쳐서 멸망시켰다. 본장 20절, 21절은 기록하기를,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老幼)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정복의 방식에서 우리는 몇 가지 뜻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해야 했다. 가나안 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다(창 12:7; 13:15; 15:18-21 등).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계속된다(창 26:3; 28:13).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고 하셨다(출 3:8).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에 반복되었고(출 3:17; 13:5; 33:3; 레 20:24; 민 13:27; 신 26:9)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말씀에도 나타난다(렘 11:5; 32: 22; 겔 20:6).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믿어야 했다. 그들의 행렬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또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나팔을 들고 행진 중에 나팔을 분 것은 하나님께 아뢰는 뜻이 있는 것 같다. 민수기 10:10은 말하기를,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고 했다. 제사장들의 나팔소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소리와 같았다. "오 하나님, 주의 약속만 의지합니다. 주의 명령을 따라 이 시간 이 곳까지 왔사오니 우리의 이 전쟁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주의 대적들을 주의 종들의 손에 붙여주소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매일 한 바퀴씩 6일 동안 성을 돌고 돌 때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행진하며 오직 제사장들만 나팔을 불었고 제7일에 일곱 바퀴 성을 돈 후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에 맞춰 큰 소리로 외침으로 성을 정복하게 된 이 모든 과정은 한마디로 순종의 과정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방식대로 이루어졌고 인간편에서는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멸망 중에 기생 라합은 구원을 얻음
마지막으로, 본장에서 우리는 여리고성의 멸망 중에서 기생 라합이 구원얻은 일을 읽는다. 본장 17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지시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또 22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그 성을 칠 때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고 말했고 그들은 들어가서 라합과 그에게 속한 자들을 다 이끌어 내었다.
라합의 구원은 이스라엘편에서는 맹세를 지킨 것이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표로 그와 그의 친족들을 살려줄 것을 맹세했었고(수 2:13, 17) 여호수아는 그것을 지켰다.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는 그 멸망의 성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다. 그는 비록 큰 죄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여리고성의 정복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 사건은 죄의 결과가 멸망임을 증거한다. 여리고성이 그렇게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 그 예이었다. 소돔 고모라성의 멸망이 그 예이었다. 가나안 땅의 멸망이 그 예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은 분명히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다(계 21:8).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이미 지은 모든 죄들을 회개하고 그것들을 떠나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은 죄 짓지 않는 일이다.
둘째로, 여리고성 정복 사건은 하나님의 일이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해야 했다. 여리고성 정복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우리에게 전도의 일을 명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교회의 건립을 명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주의 명령을 이룰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붙들고 의지하며, 양각나팔을 불듯이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지시와 방법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적 교훈이라면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진실한 성도들이여, 오직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살며 주의 일을 하자.
셋째로, 여리고성의 정복 사건은 사람이 멸망의 세상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함을 증거한다. 라합은 멸망하는 성 가운데서, 비록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구원을 얻었다. 그와 그의 모든 친족들이 구원을 얻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비록 그가 라합처럼 큰 죄인일지라도, 비록 그가 사는 사회가 여리고성처럼 심히 악하여 그 멸망이 임박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은 말한다.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기이한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다음 성인 아이성에서는 패배했다. 여호수아 7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에서 패배한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서 사람을 아이성으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기를,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제안하기를,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라고 했고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가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아이 사람들은 그들 중 36명쯤 죽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내렸다.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실패의 원인은 죄 때문이었음
여리고성에서 승리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왜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이었다.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패배의 원인이었던 아간의 죄에 대해 좀 생각해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들을 모아 제비뽑기를 통해 범죄자를 찾아내었는데, 그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었다. 그 아간 한 사람의 죄는 이스라엘 회중의 죄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 . .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고 기록한다.
11절에도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아간 한 사람의 죄를 가리켰다.
한 사람 아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온 회중은 고통을 받았다. 그 전쟁에서 36명쯤이나 죽었고 온 백성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내렸다(5절). 지도자 여호수아의 마음도 낙담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는 단번에 땅에 떨어졌고 아마 주위의 가나안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의 전쟁들을 생각할 때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죄는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이스라엘 회중에게 연대책임을 물으셨다. 그것은 아담의 죄의 경우와 비슷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인류의 타락을 초래했고 온 땅의 저주를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18).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인류는 정죄되었고 죽음 아래 처하게 되었었다(롬 5:12-19).
한 사람 아간의 죄는 특히 '바친 물건'을 인한 죄이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 . .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고 말한다. 본장에 '바친 물건' 혹은 '바친 것'이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1절[2번], 11절, 12절[2번], 13절[2번], 15절). '바친 물건'이라는 히브리어 케렘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것, 저주받은 것, 멸망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아주 바친 물건'이라는 개념은 레위기 27:28-29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했다.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더러워졌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것, 저주받은 것, 멸망받아야 할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셨던 내용이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었다(수 6:17-18).
여호수아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언약이었다. 그러므로 11절과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고 하셨고 또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네발라 , 어리석은 일]을 행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저주와 죽음의 경고를 담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지키면 복을 얻을 것이지만,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고 죽을 것이다(신 28:1-6, 15-19).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어겼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바쳐진 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아간의 죄는 탐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간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고 그 물건들을 그의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었다. 시날산 즉 바벨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은 오늘날 값비싼 프랑스제 혹은 이태리제 밍크 코트 같은 것일 것이다. 은 200세겔은 은 약 2.3킬로그램인데, 후에 은 1데나리온이 은 5그램이니 은 200세겔은 약 460데나리온 정도가 되며, 신약시대에 일꾼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5만원만 쳐도 은 200세겔은 약 2,300만원어치의 가치가 된다. 50세겔중 금덩이는 약 600그램, 즉 약 160돈으로 800만원 이상의 가치가 될 것이다.
아간의 탐심은 오늘날 우리가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를 탐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탐심은 신앙생활에 큰 방해거리, 시험거리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한다(골 3:5).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믿어도 탐심을 가진다면 마치 가시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3:22).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다(딤전 6:9-10). 또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했다(약 1: 5). 우리는 탐심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죄의 원인이요 죄이다.
아이성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는 한 사람의 아간의 죄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친 물건을 취한 죄이었다. 그것은 탐심의 죄이었다. 죄가 패배의 원인이었다. 죄 때문에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세상도 망하는 것이다. 죄가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해결책은 죄를 제거하는 것
그러나 또한 해결책이 이 사실에 들어 있다. 해결책은 죄를 제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12절,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 .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 또 그는 15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고 하셨다.
24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고 말한 후에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아골'이라는 히브리어는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아마 그 가족들은 아버지의 잘못을 알고도 숨겼던 것 같다. 하나님은 때때로 부모의 죄에 대해 자녀들에게까지 벌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십계명에서 말씀하셨다(출 20:5).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어린 자녀들은 부모들의 죄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해야 했다(민 14:33). 아버지 아간의 잘못으로 그의 온 가족들, 즉 그의 자녀들이 죽임을 당했다.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이었다. 아간의 죄의 결과는 아골 골짜기에서의 그 가족들의 고통의 부르짖음과 죽음이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이 고통스런 부르짖음 가운데 죽임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가 그쳤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수 7:2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에 성공하려면 악을 제거해야 했다. 그들이 악을 가지고서는 가나안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시 5:4).
말씀을 맺는다. 죄는 불행과 실패의 원인이다. 개인이 죄를 지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다. 우상숭배나 이단이나 교만, 미움이나 음란이나 거짓말 등 십계명을 어기는 죄는 무엇이든지, 죄는 불행과 화와 실패의 원인이다. 특히 아간같이 탐심의 죄는 불행과 화와 실패를 초래한다. 또 부모가 죄를 지으면, 그 자녀들에게 불행과 화가 있다. 부모의 죄는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교회가 주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고 간직하려면, 악을 제거해야 한다. 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교인 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중요하고, 특히 직분자 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중요하다. 교회의 중직 한 사람이 범죄하면 교회에 큰 해가 될 것이다. 또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일을 바르게 시행하려면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직분자를 바르게 택하여 세우고 교인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교회 안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바르게 다루고 필요하면 권징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개인이나 교회나, 죄악을 포용하고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바르고 힘있게 시행할 수 없다. 오직 철저히 회개하고 죄악을 제거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여호수아 8: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첫번째 전투에서는 아간의 범죄 때문에 패배하였으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하였고 아이성을 정복하였다. 여호수아 8장은 아이성 정복에 대해 기록하면서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첫째로, 아이성 전투의 승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 시편 저자는 성령 안에서 고백하기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했고(시 115:3), 또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라고 했다(시 135:6).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마 10:29). 세상에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일어나지 않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무슨 선한 일이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이루어질 수 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욥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했고(욥 9: 12), 솔로몬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고 했다(전 7:13). 하나님께서 구부러뜨리시면 아무도 펼 수 없고 하나님께서 펴시면 아무도 구부러뜨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의 아이성 정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가능했다. 본문 1절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라"고 한다. 여호수아 8:7에 보면, 여호수아는 매복할 군사들에게 복병 작전을 설명하면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다. 여호수아 8:18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두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작정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허락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뜻하시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지만, 이스라엘 편에서는 악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죄악은 사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고(사 59:1-2),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증거했다(렘 5:25).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막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의 죄를 징벌했을 때 승리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죄가 제거되었을 때 승리가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허락하셨다.
복병술을 사용함
둘째로, 아이성 정복은 복병술을 사용함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주셨고 승리를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몫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제2원인이나 수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긍정하고 사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 성도는 소극적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성취에는 보통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몫을 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우리의 몫을 성실히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두 번째의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몫은 복병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지시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실행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병 전술을 설명했고 군사들 중 처음에는 3만 명을, 그리고 후에 추가로 5천 명을, 아이성의 서쪽 곧 뒷편에 매복시켰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아이성을 공격했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급히 대처했다. 그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거짓 패하여 아이성 군사들을 유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아이성 왕과 모든 군사들은, 패하여 도망가는 듯한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성문을 열어 놓은 채 그들을 따라갔다.
이 때 여호수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높이 들었다. 우리 말 성경에 '단창(短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키돈)는 '짧은 창'이 아니고, '던질 수 있는 가느다란 긴 창(dart, javelin)'을 가리킨다. 여호수아가 창을 높이 든 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이스라엘의 복병들은 여호수아의 신호에 따라 숨었던 곳에서 나와 성을 점령했고 그 성에 불을 놓았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경솔함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제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되었고 그 날 그 전투에서 아이성의 남녀 모든 사람들 12,000명이 다 죽었다.
지난 번 여리고 성 정복 때는 가축들을 다 죽이고 노략물들 중 금은동철(金銀銅鐵)은 하나님께 바치고 그 나머지는 다 불살랐으나, 아이성 전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의 가축과 노략물을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2절,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사실상 사람들이 죄악된 것이지 동물이나 물건들이 죄악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 조물주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혜택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죄인들에게서 빼앗아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대로 그들은 그 성읍의 가축들과 노략한 것을 취하였다(27절).
그런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을 불사르고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다. 또 그들은 아이성의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매달았다가 해질 때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던지고 돌로 큰 무더기를 만들었다. 그 전쟁은 처참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더러워졌던 가나안 땅의 한 성 아이는 이렇게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이스라엘은 그 두 번째 전투에서 이렇게 승리하였다.
복과 저주의 선언
셋째로, 여호수아 8장은 이런 일을 기록한 후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시대로 복과 저주를 선언한 사실을 증거한다. 본장 30절 이하에 보면, 아이성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었다. '새 돌'(아바님 쉘레모스)이라는 원어는 '온전한 돌들' 즉 '깍지 않은 돌들'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여호수아는 그 돌들 위에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기록하였다. 그런 후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대로였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라"고 명령하였었다(신 27:12-13).
이스라엘 백성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서게 한 후,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 본장 35절은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한 것은 복과 저주의 선언과 같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복과 저주의 두 길을 주시고 그들로 선택하게 하셨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그들은 복을 얻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면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요 저주와 화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복과 저주의 이 두 길은 세상에서도 그러하고 궁극적으로 내세에서도 그러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죄를 지으면 결코 복을 얻지 못하고 평안과 형통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순종한다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평안과 형통을 누리며 장차 확실히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보면, 아이성 정복의 사건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 진리이다. 아이성 정복 즉 아이성의 두 번째 전투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세상 만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대로 이루어진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온 세계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되어질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가 허락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믿자.
둘째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아이성 정복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일이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복병 전술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 소극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의무들을 성실히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바대로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는 좋은 시민, 좋은 직장인, 좋은 상사, 좋은 직원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좋은 성도, 모범적 성도가 되어야 한다.
셋째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할 때 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진리이다. 아이성의 첫번째 전투에서 실패한 이유는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죄는 실패의 원인,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모든 죄를 철저히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고 의롭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결코 복과 평안과 형통을 누리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복과 평안과 형통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된 삶, 평안과 형통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죄 짓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 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중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정복했을 때,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나아와 그들을 속이고 자기들과 조약을 맺게 함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고 구원얻은 일을 기록한다. 우리는 오늘 아침 본장에 기록된 사건에 관계된 몇 가지 사실들을 묵상함으로 교훈을 받고자 한다.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냄
첫째로,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꾀를 내었다. 본장 1절과 2절을 보면,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정복한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고 하였다. 그 때 히위 사람이었던(7절) 기브온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연합적 행동에서 이탈하였고 자신들의 살길을 찾았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에 행한 일을 듣고 한가지 꾀를 냈다. 그들은 사신들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게 하고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게 하였다.
그 사신들은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원방에서 왔으니 자기들과 약조하자고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약조할 수 있으랴"고 대답하자,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여호수아가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라고 묻자, 본장 9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나라의 모든 거민이 우리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맞아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청컨대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하라 하였나이다.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다. 그들은 또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들의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도 들었다. 또 본장 24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종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 모든 거민을 멸하라고 명하신 사실도 들었다.
기브온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하신 일들과 하신 말씀에 대해 듣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두려워했고 어떻게 하면 그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을까 생각했다. 그들이 꾀를 낸 것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브온 사신들의 말은 거짓말이었고 그들의 모양은 자신들이 지어낸 것이었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실수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큰 실수를 하였다. 그들은 기브온 사신들의 꾀와 거짓말과 위장(僞裝)에 속아넘어갔다. 본장 14절, 15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신들과 언약을 맺은 후 3일이 지나자, 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등의 성읍에 도착했고 그 사신들이 그 성읍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족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 사신들에게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큰 실수를 한 것이었고 온 회중은 그들을 원망하였다. 족장들은 온 회중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성급한 결정은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잠언 19:2은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교훈한다. 그러나 경건한 다윗은 무슨 일을 행할 때, 사무엘하 5장 19절이나 23절에 기록된 대로 먼저 하나님께 묻곤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받아야 하며 그래야 실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로 한 맹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시편 15:4은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맹세를 지킬 것이다. 후에 사울왕은 잘못된 열심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그 결과 다윗 시대에 3년 간의 극심한 기근이 이스라엘 땅에 임했는데, 그것은 기브온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옛맹세를 어겼기 때문이었다(삼하 21:1-2).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맹세를 어기는 자는 큰 화를 당할 것이다.
기브온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음
셋째로, 기브온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본장 21절을 다시 번역하면,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고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로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게 하라 하였더라." 22절과 23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그 때 기브온 사람들은 대답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기브온의 장로들은 다른 성읍들의 장로들과 달랐다. 그들은, 본장 3절 말씀대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에 행한 일들을 들었다. 또 그들은, 9절, 10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과 또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듣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2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것을 멸하라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다.
즉 기브온 장로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하였다면 그들은 그런 꾀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굴복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거짓을 말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 멸망의 위기 앞에서 그들 속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함과 두려워함이 있었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당할 상황에서 살아 남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그들에게는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는 것이 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처지이었기 때문에 그런 신분이라도 감사했을 것이다. 26절, 27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였고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다. 그들은 멸망당할 직전에 기이하게, 예외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본장의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실수를 통해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과 언약을 맺었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큰 실수이었다. 사람의 성급한 말과 행동은 실수하기 쉽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살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실에서도 교훈을 받는다. 기브온 사람들은 며칠 후면 멸망당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임박한 멸망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비록 거짓된 꾀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고 또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한다는 사실도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오늘날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오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도 전파되고 있다. 이것은 여호수아 당시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또 지금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멸망당할 처지에 있는 것을 알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
셋째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 패며 물 긷는 종들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교훈을 받는다. 그들은 비록 종이 되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멸망당할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영원한 지옥 불못에 들어갈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짐스러운 일이 되겠는가? 이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불평스러운 일이 되겠는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즐거이 드리자.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즐거이 하나님의 종들이 되자.
여호수아 10:8,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소식을 듣고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을 불러 함께 기브온을 공격하였다. 그 때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빠른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스라엘은 즉시 올라가 그 연합군과 싸웠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을 다 멸하였다. 또 이스라엘은 막게다, 라기스, 게셀, 에글론, 헤브론, 드빌 등의 성들도 다 멸하였다. 우리는 본장의 사건에서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두 나라
첫째로, 우리는 본장에서 두 종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여러 성들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이다(신 7:6).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고 이제 그 땅을 진멸하라는 임무를 주셨다.
가나안의 여러 성들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세상 나라이다(신 7:1-5; 레 18:24-25).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며 마귀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이스라엘과 그들의 전쟁은 불가피하였고 가나안 성들은 마침내 다 멸망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장에서 두 종류의 나라를 보고 그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보는 것이다. 이 두 나라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가리킨다. 성경은 이 두 나라에 대해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 두 나라밖에 다른 것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로 구성된 나라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이 나라는 불완전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로 나타났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로 나타났다.
신약 교회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꾼 금신상의 꿈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이 열왕의 때[로마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고 했다(단 2:4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셨고(마 4:17) 이 나라를 밭에 뿌려진 씨에 비유하셨다(마 13장).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행 28:23, 31). 신약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세계 역사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과정에 대한 역사이다. 마침내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것이다(계 11:15).
하나님의 뜻--가나안 진멸
둘째로, 본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의 성들을 진멸(殄滅)하는 것 즉 완전히 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장뿐 아니라 여호수아서 전체의 주요한 내용이다. 가나안의 모든 성들을 완전히 멸하라는 것은 모세를 통해 명령된 하나님의 뜻이었다(신 7:2). 이것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참하고 비극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성들을 완전히 멸하는 것은 오늘날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모든 사람을 구원해내는 전도와 구원받은 영혼들의 성화에 비교할 수 있다. 전도와 성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전쟁과 같다. 마귀는 영혼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일을 가장 싫어하고 그것을 가로막고 방해한다. 세상과 교회는 영적으로 항상 전쟁 중이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역사책인 동시에 그들이 받은 핍박의 역사책이다. 또 사도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고백하였다(롬 7:22- 23).
예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5:18 -19),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전도와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그러나 핍박 속에서도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성도들은 충성된 마음으로 주를 따랐다. 가나안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외적인 전쟁이 아니고 영적인 전쟁이다. 영혼 구원의 전도와 구원받은 영혼들의 성화는 영적 전쟁의 길이다. 그것은 때때로 핍박과 심지어 순교의 피흘림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의 임무 수행
셋째로, 본장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하신 임무를 잘 수행했음을 증거한다. 그들은 먼저 그 전쟁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본장은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성들의 왕들과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부쳐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8절,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19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30절,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32절, "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긴급한 구원 요청을 듣고 즉시 응답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8절).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밤새도록 올라갔고, 그 성을 향해 진을 친 아모리 다섯 왕들의 군대들을 갑자기 쳤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우셨다.
본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원문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당황케 하셨고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죽이셨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셨고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러 죽이셨더라"라고 되어 있다.4) 옛날 영어성경(KJV)이나 근래의 어떤 권위 있는 영어성경(NASV)은 그렇게 번역했다. 놀라운 표현! 하나님께서는 친히 가나안 사람들을 치셨다.
그뿐 아니라, 본장 11절에 보면, 아모리 다섯 왕들과 그 군대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원문에는 '큰 돌들'이라고 되어 있음]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셨으므로 그들이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다.
또 12-14절에 보면, 그 전쟁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아뢰며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하라"고 명령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셔서 그들이 그 전쟁에서 이기기까지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쳤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고 또 그 사실이 야살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본장 14절과 4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다고 거듭하여 증거한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 전쟁이었다. 그가 직접 개입하셨고 그가 친히 도우셨고 그가 놀랍게 응답하셨고 그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셨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25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아모리 다섯 왕들을 죽이기 전 이스라엘 군장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 본장 40절은 결론적으로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고 했고 또 42절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고 했다.
본장에 증거된 이스라엘의 이러한 임무 수행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무엇보다, 그것은 가나안 전쟁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듯이 전도와 성화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교회의 임무와 사명인 전도와 영혼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행하시는 일이다. 또 성도의 성화는 그들이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갈 5:16). 그것들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人子) 곧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3:37) 또 그는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마 15:13). 또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영혼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다.
사도행전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증거한다(행 2:47). 또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구원에 대한 일을 들은 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고백했다(행 11:18).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친히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했고(롬 8:30), 또 하나님께서 신자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 일을 주의 재림의 날까지 다 이루신다고 말했고(빌 1:6), 또 신자들 속에 새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말했다(고전 3:7).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의 전도와 구원받은 자들의 성화와 온전케 됨은 성도들이 구주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수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오늘날 세상에서 두 종류의 나라를 본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모든 자는 세상 나라에 속한다. 세상은 가나안 땅처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여러분은 참으로 구원을 받으셨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늘 하나님께로 나오라. 오늘 예수님을 믿으라.
옛날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듯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며 그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는 전도의 일과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우리는 우선 전도와 성화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심으시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일이며 시작하신 그가 또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전쟁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전도와 성화를 위해 때때로 핍박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여호수아 11장은 하솔의 연합군을 멸한 사건과 가나안 전쟁이 그친 것을 기록한다. 1절부터 15절까지는 하솔의 연합군을 멸한 사건을 증거하고, 1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가나안 전쟁이 그친 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여호수아 12장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성들의 왕들을 열거하는데, 거기에는 요단강 동편에 있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함께, 요단강 서편에 있었던 여리고 왕과 아이 왕 등으로 시작하여 31명의 왕이 언급된다. 이들이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가나안 전쟁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던 왕들이다. 우리는 특히 11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거대한 대적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거대한 대적자들을 직면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중부로 진입해서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그 주위를 진멸하고 그 다음 남부를 진멸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땅 북부의 성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에 위치한 하솔이라는 성이었다(10절).
본장 1절 이하에 보면, 하솔 왕 야빈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북방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방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동서편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산지의 여부스 사람과 미스바 땅 헤르몬산 아래 히위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었고 그들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 쳤다. 본문은 그 군사들의 수가 많아 해변의 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고 증거한다. 가나안 땅 북부의 연합군은 거대한 세력이었다.
전쟁은 두렵고 힘든 일이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일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도 항상 그러하였다. 가나안 땅의 이 북부 전쟁도 거대한 대적을 상대해야 하는 두려운 전쟁이었다.
더욱이 16절 이하에 가나안 전쟁을 총정리하면서, 21-22절에는 가나안 땅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었다고 증거한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아낙 자손은 거인이었다. 민수기 13:33에 보면, 가나안 땅에 보낸 열두 정탐군들은 보고하기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심
둘째로, 그렇지만 다른 전쟁들과 같이 이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두려운 대적자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주셨다. 본문 6-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따라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그들을 습격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서 죽였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삼상 17:47).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시려고 뜻하셨기 때문에 또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하솔의 거대한 연합군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본장 20절은 가나안 전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증거한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려 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나 이스라엘의 호의를 받지 못한 것도, 또 그들이 결국 처참하게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음란의 충만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여호수아의 순종
셋째로, 여호수아는 이 전쟁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그의 지시와 명령대로 행하였다. 본문 7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하여 하솔의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다. 본문 9절은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고 기록한다.
또 본장 10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는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완전히 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또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다.
또 14-15절은 기록하기를,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라고 한다.
가나안 전쟁은 두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모세의 명령대로 온전히 순종하여 승리하였다. 16절 이하는 가나안 전쟁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맨 남쪽으로는]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맨 북쪽으로는]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또 23절은 결론적으로 증거하기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라고 한다.
말씀을 맺는다. 여호수아 11장은 가나안 땅 북부의 하솔 성과 그 주위의 여러 성들의 거대한 연합군을 물리친 사건과 가나안 전쟁 전반에 대한 결론적 증거을 기록한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가나안 족속이 되지 말아야 한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가 가득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신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이 그러했고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비 심판이 그러했다. 가나안 땅의 죄악된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정복을 통해 심판했다.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죄 가운데 살 때 바벨론 군대를 오게 하여 멸망시켰다. 우리는 가나안 족속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다 회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성도들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너무 크게 여기거나 두려워할 때 불신앙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6:24). 자기 부정은 곧 세상 부정이다. 또 그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1, 33).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도의 의무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여 죄 짓지 말고 의와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행위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힘써야 할 의무이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우리 자신의 남은 죄성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협하고 방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아직도 남은 땅이 많았지만(수 13: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그 일은 상당히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모든 지파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 열두 지파 중,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요단강 동쪽의 땅을 얻었으므로, 요단강 서쪽의 땅은 나머지 아홉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나머지 절반의 기업이 될 것이다.
레위 지파는 땅 분배에서 제외됨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원문에는 '그가'; 모세를 가리킴]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오늘 본문은 기록한다.
민수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 광야에서 각 지파의 사람들의 수를 셀 때,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대로 그 셈에서 빠졌었고, 그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유언대로 두 지파로 간주되었었다. 레위 지파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과 그들을 도와 성막 봉사의 일을 하는 레위인들이었는데 그들만 성막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
숫자적으로도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 적었다. 다른 지파들은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수가 평균 약 5만 명 가량이었지만 레위 지파는 1개월 이상의 남자들의 수도 약 2만 2천 명에 불과했다. 레위 지파는 숫적으로 많이 번창하지 못했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땅의 분배에서 제외시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이다. 본문 33절은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민수기 18:2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셨었다. 그 말씀대로, 레위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이셨다.
오늘날 레위 지파는?
레위 지파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 누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목사나 전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의 일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자들이다. 또 교회의 일들을 돕는 유급 봉사자들도 레위인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들도 세속적 일과 구별된 하나님의 집의 일에 종사한다. 그들은 돈을 버는 생각보다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정신으로 일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레위 지파는 그들뿐 아니라, 영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며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요 천국이 그들의 본향임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더욱이 성경은 성도를 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세상은 지나가는 곳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고 여행하듯이 지나가는 곳이다. 다윗은 인생을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고 묘사하고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고 사람의 일생이 없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대상 29:15; 시 39:5-6).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되다고 강조하였다(전 1:2-3). 야고보는 사람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예수께서는 세상의 일들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성도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의 기업에 모든 마음을 두지 않는다. 지나가는 세상, 그림자 같은 세상, 안개 같은 인생의 삶, 썩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자신이 심히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
세상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다(시 39:7).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요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시편 73편의 저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고백했다(시 73:25-26).
하나님과 그의 일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전도자로 부르시는 주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마 4:18-22). 주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던 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교훈하며 격려하셨다(막 10:29-30).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큰 보화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눅 14:26, 33).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義)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라"고 고백했다(빌 3:7-9). 이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안 자만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천국은 우리의 본향
하나님이 우리의 보화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다.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 참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에게 죽음 너머에 본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은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가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열조들에 대해 증거하면서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5-16).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인 그 성이 천국이다. 사도 베드로도 장차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지금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증거했다(벧전 1:4).
하나님의 뜻만 행함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며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기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하나님의 뜻만 행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증거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롬 14:7-8). 얼마나 놀라운 증거인가?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고후 5:14-15). 주를 위해 사는 삶,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예수님 자신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요 4:3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17).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일을 힘써야 하는 자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레위 지파와 같다. 우리의 기업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게으르지 말고 성실히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지나가는 세상이며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화이시며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양식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성도의 모습이요 그것이 영적 레위인들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 레위 지파 사람이 되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레위인들처럼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보화로 삼고 천국만 우리의 기업으로 삼고 살자.
여호수아 14: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여호수아 14:6 이하의 내용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 정탐을 위해 보냄을 받고 돌아와 보고한 일을 회고하면서 그 때 모세가 자신에게 맹세한 대로 자신이 원하는 땅 곧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줄 것을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것과 그의 요청대로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은 것에 대해 기록한다.
갈렙은 그 때 자신은 자신의 마음에 성실한 대로, 즉 자기 마음에 있는 대로 모세에게 보고하였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증거했다. 또 그는 그 때에 모세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고 했다고 증거한다. 모세도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증거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요청을 허락하며 갈렙을 축복하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고 이 책에 기록하기를,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고 하였다(본문 14절). 그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민수기 14:24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친히 증거하셨다.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다. 오늘 본문(8, 9, 14절)과 민수기 14장의 본문(14:24)과 성경의 다른 곳들(민 32:11-12; 신 1:35)이 그 사실을 증거한다. 갈렙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갈렙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믿음의 보고(報告)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정탐군들이 돌아와 회중 앞에 보고했을 때 다른 동료들은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긴 하지만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며 거기서 거인들의 후손인 아낙 자손들을 보았다고 말했으나 갈렙은 백성을 안정시키며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다(민 13:27-30).
또 동료들의 나쁜 보고로 인해 백성들이 낙심하고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할 때, 갈렙은 그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다(민 14:7-9).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의 능력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런 긍정적 보고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의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며 그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다.
부정적 보고
그러나 열 정탐군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외적인 조건만 보고 두려워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해 악평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말했다(32-33절). 그들의 보고는 나쁜 보고이며 부정적 보고이었다.
열 정탐군들의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담시켰다. 오늘 본문 8절에서 갈렙은 그들이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다고 말한다. 민수기 14:1-4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들은 왜 그런 나쁜 보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약속도, 그의 능력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수기 14:1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을 때 그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열 정탐군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였던 것이다.
용기와 인내가 필요
갈렙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종하였으나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였다. 열두 정탐군들 중에 갈렙과 뜻을 같이하는 자는 여호수아뿐이었다. 10 대 2의 상황이었다. 또 열 정탐군들의 보고의 영향으로 백성들 가운데 거센 반대 세력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민 14:4).
때때로 하나님의 일에는 거센 반대 세력이 있다.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대결해야 했다(왕상 18:19). 또 선지자 미가야는 400명 가량의 거짓 선지자들과 구별되는 외로운 선지 사역을 해야 했다(왕상 22:6).
민수기 14:10에 보면, 사람들은 심지어 돌로 갈렙을 치려고까지 하였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종하는 길은 때때로 고난의 길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다 죽인 후에도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칼을 두려워하여 도피하여야 했고, 미가야는 바른 말을 한 후에 옥에 갇혀 고난의 떡을 먹고 고난의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므로 연약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할 수 없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만일 갈렙에게 그런 용기와 인내가 없었다면, 그는 중도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끝까지 하나님을 따랐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라고 말하지만, 또한 고백하기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시 3:1, 5-6). 많은 대적들과 싸워야 하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참고 기다렸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고(고후 4:8-9), 또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며(딤후 4:14-16) 낙심치 않고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갈렙은 45년의 세월이 흐른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읍이 크고 견고하며 아낙 사람이 있는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요청하였고 또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믿음의 말을 했다(수 14:12). 그것은 변함 없는 믿음과 용기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종하고 있었다.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다. 그는 주위의 동료들의 다른 생각과 백성들의 불신앙적 적대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용기와 인내로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 신앙의 선진들은 다 그와 같았다. 다윗도, 바울도 그러하였다.
믿음이 없고 혼탁한 말세지말을 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순종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줄 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소망하고 그 교훈을 힘써 지키면서 온전히 하나님만 따르며 순종하자. 믿음 없는 세상에 영향을 받지 말고 용기와 인내로 행하여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15-17장: 유다와 요셉의 기업
여호수아 15:63,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여호수아 11:23과 14:15에 보면,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이것은 대략적인 표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주요한 전쟁을 마쳤고 그 땅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여호수아 15장부터 17장까지는 요단강 서쪽에서 처음으로 땅 분배를 받은 유다와 요셉의 기업에 대해 증거한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 땅의 남부를 기업으로 얻었다. 15:2은 유다의 기업의 남편 경계에 대해, 5절은 동편과 북편 경계에 대해, 12절은 서편 경계에 대해 말씀한다. 여호수아 15장 전체를 읽어보면, 유다의 기업은 112개 이상의 성들을 포함하였다. 요셉의 자손들 중 에브라임의 기업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16장에 기록되어 있고, 므낫세의 기업에 대해서는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많은 지역들과 성읍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그 이름들은 우리가 읽기에도 생소하다. 성경이 이러한 이름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역사적 기록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사람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나 신화적 내용이 아니고 일차적으로 역사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는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말했다(행 24:14).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모든 내용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다 믿어야 한다.
여호수아 15장부터 17장까지에 기록된 유다의 기업과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기업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볼 수 있다.
갈렙의 믿음과 용기
첫째는 갈렙의 믿음과 용기에 대한 내용이다. 여호수아 14장은 갈렙이 헤브론 산지 곧 기럇 아르바를 기업으로 요청한 것과 여호수아가 그 요청을 허락한 것을 기록했었다(12-13절). 그 산지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았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지만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그 지역을 요청했었다. 여호수아 14:15의 말씀대로, 아르바는 아낙의 아비이었고 아낙 사람들 중 가장 큰 자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 15:14에 보면, 갈렙은 기럇 아르바['아르바의 성'이라는 뜻] 곧 헤브론을 정복하였고 아낙의 세 아들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다. 과연 믿음의 사람답다. 우리는 이런 갈렙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갈렙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고 그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명하신 일을 용기 있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옷니엘이 갈렙을 본받음
둘째는 옷니엘이 갈렙을 본받은 일이다. 갈렙은 기럇 아르바를 정복한 후에 드빌 곧 기럇 세벨이라는 곳으로 나아갔는데, 그 때 그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이 성을 취하는 자에게는 나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 그의 아우5)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하였고 갈렙은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런데 성경은, 악사가 출가할 때 자기 남편을 설득하여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렸고, 갈렙이 그에게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라고 구하였고, 갈렙은 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고 기록한다.
옷니엘은 갈렙을 본받아 믿음으로 기럇 세벨을 쳤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갈렙의 딸 악사를 복으로 주셨고 그와 더불어 밭도, 두 개의 샘도 주셨던 것이다. 악사는 지혜로운 여자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행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신다. 잠언 13:21은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고 말했고, 또 잠언 19:14은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했다. 어찌 지혜로운 아내만 하나님이 주시겠는가? 좋은 남편도 주시고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옷니엘처럼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믿음과 용기로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복으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28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1-2절).
요셉 자손에게 개척을 격려함
셋째는 여호수아가 요셉 자손에게 개척을 격려한 내용이다. 여호수아 17:14 이하에 보면, 요셉 자손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여호수아에게 나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라고 하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셉 자손이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마을]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라고 말하며 주저하자, 여호수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격려했다.
요셉 자손들은 갈렙처럼 믿음과 용기가 충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요셉 자손처럼 믿음과 용기가 부족한 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수아의 격려를 받았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오늘날 우리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하지만,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힘과 용기를 갖자. 믿는 자는 어떤 역경도 이기며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요일 5:4-5; 롬 8:35).
불완전한 정복
넷째는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그 땅의 원주민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 읽은 본문 여호수아 15:63은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고 말한다.
또 여호수아 16:10은 "그들[에브라임 사람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고 기록하고, 17:12-13은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여호수아서 다음에 나오는 사사기 1:21-35에 보면 나머지 일곱 지파의 땅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불완전한 정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멸하라고 명령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일부를 멸하지 못하고 남겨두었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함께 살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의 주원인이 되었다(삿 2장). 사람은 모방을 잘하는 존재이다. 악한 본은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친다. 민수기 11:4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증거한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부패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쁜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사람들 간의 바른 교제가 참으로 중요하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과 교제하면 좋은 영향을 받지만,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람과 교제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말했고(고전 15:33-34), 또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던 것이다(갈 5:9). 우리의 신앙이 부패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상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경건하고 선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우리는 보는 것,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말씀을 맺는다. 여호수아 15장부터 17장까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받지만, 특히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기억하기를 원한다.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갈렙의 행한 바요 옷니엘이 행한 바이며 또 여호수아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게 권면하고 격려한 바이다. 세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즉 전도와 영혼 구원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며 관심이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가치 있게 여기시는 바이다.
전도는 인간적으로 두려운 일이며 세상은 쉽게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는 자마다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초청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완전한 정복을 반성해야 한다. 불완전한 정복은 개인적으로는 불완전한 성화이며, 교회적으로는 불성실한 교회, 즉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는 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고의적 불신앙과 부도덕을 포용하고 권징할 의사가 없는 교회, 그래서 세상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 교회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정복을 반성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건립과 성장은 단순히 교인을 늘이는 데 있지 않다. 교회의 참된 건립과 성장은 참된 신앙고백을 하고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늘어나는 데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영혼의 구원과 영적 성장은 단순히 육신의 흥미를 추구하는 데서는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하는 진실함이 없이는 영혼의 완전한 정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분은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완전히 정복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개개인이 참된 신자가 되도록 힘쓰자. 우리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힘쓰자.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개인과 교회가 되자.
여호수아 18: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대략적으로는 이루어졌다. 여호수아 11장과 14장 끝부분은 전쟁이 그쳤다고 말한다(11:23; 14:15). 그러나 아직 다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지파는 아직 땅의 분배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기업의 땅 경계도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지체하였는가? 아마 믿음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이 적으니 순종심도 적었을 것이다. 연약한 마음과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우리가 주를 섬기며 주의 일을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어디 있으며 우리의 순종심은 어디 있는가.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달랐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창 12:1), 그는, 히브리서 11:8의 증거대로,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또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도(창 22:2),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리아 산으로 갔고 자기 아들을 결박하여 죽이려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지체치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이제까지 능력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그들은 애굽에서의 10가지 재앙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넘, 광야 40년의 시간들,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넘, 여리고성을 정복함 등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들은 지체치 말고 나가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취해야 했었다. 그러나 일곱 지파들은 지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믿음도 담대함도 순종심도 부족하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권면하며 그들을 보내어 남은 땅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고 그 땅을 분배하였던 것이다.
이미 분배한 땅들
본문 1-2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얻지 못한 자가 오히려 일곱 지파라"고 말한다. 가나안 땅 정복은 거의 이루어진 것과 같았다. 본문은 '그 땅은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호수아 13장에서 요단강 동쪽에서의 땅 분배에 대해 읽는다. 남쪽으로부터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半) 지파가 거기에서 기업을 얻었다. 르우벤 지파는 아로엘, 헤스본, 디본 등 아모리 왕 시혼의 나라의 땅을 얻었다. 갓 지파는 길르앗 모든 성읍들, 마하나임 등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을 얻었다. 므낫세 반 지파는 아스다롯, 에드레이 등 바산 왕 옥의 나라와 야일의 모든 고을 60성읍들 등을 얻었다.
여호수아 15장부터 17장까지에서 우리는 유다 지파의 기업과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의 나머지 반 지파의 기업에 대해 읽는다. 그것들은 다 요단강 서쪽 지역 중 남부와 중부의 대부분에 해당한다. 남쪽에서부터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의 순서로 기업을 얻었다. 그 중에 유다의 기업은 총 112개 이상의 성읍들로서 매우 넓었다.
남은 땅들의 분배
그러나 아직 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지파가 일곱이나 되었다. 그 일곱 지파는 베냐민, 시므온,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단 등이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여호수아는 매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게 하였고 그들을 보내어 남은 땅들에 대한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고 실로의 회막 앞 곧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아 그 땅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하였다(4, 9-10절).
여호수아 18:11 이하는 베냐민 지파의 기업에 대해 말한다. 베냐민은 유다와 요셉 곧 에브라임의 중간에 위치한 땅을 얻었고 거기에는 벧엘, 기브온, 라마, 여부스 즉 예루살렘 등 14성읍들이 포함되었다.
여호수아 19장은 나머지 6지파들의 기업에 대해 말한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자손의 기업 중 남쪽에서(1절) 기업을 얻었다. 그것은 유다의 기업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9절). 스불론 지파는 가나안 땅 북부 즉 갈릴리 지방에서 기업을 얻었는데, 아셀과 납달리 지파 기업의 남쪽 부분이었고 가드헤벨 등 12성읍들이었다. 잇사갈 지파는 스불론 지파 기업의 동남쪽, 므낫세 지파 기업의 북동쪽에 인접해 있는 곳에서 기업을 얻었고, 이스르엘, 수넴, 다볼 등 16성읍들이었다.
아셀 지파는 스불론 북서쪽 땅의 22성읍들을 기업으로 얻었다. 납달리 지파는 아셀 지파의 동쪽, 스불론 지파의 북동쪽의 19성읍들을 기업으로 얻었다. 단 지파는 유다의 북서쪽의 땅에서 기업을 얻었는데, 소라, 에스다올, 에그론 등의 성읍을 포함하였고, 또 가나안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레센이라는 성읍을 취하였고 그 이름을 단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그 일곱 지파들을 위하여 실로의 회막 문 앞, 즉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고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땅 나누는 일이 마쳤다(수 18:10; 19:51).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의 신약적 의미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의 신약적 의미는 무엇인가? 여러 번 말했지만,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는 신약 시대에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고 참된 교회를 건립하는 것, 즉 전도와 교회 건립에 비교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런 해석을 동의 안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적어도 이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대한 우리의 성실한 순종, 지체치 않는 순종, 온전한 순종에 대해 교훈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실히 전도와 교회 건립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이 밝히 계시하고 명령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우선 우리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정복을 당했다. 우리가 멸망할 세상에서 구원얻은 것은 가나안 땅이 정복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우리, 가나안 땅과 같았던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멸망할 죄인이 영생얻은 의인으로, 지옥 갈 사람이 천국의 백성으로 변화되었다.
이제 개인적으로 우리 속에 있는 가나안적 요소, 죄악된 요소, 옛 사람의 요소를 멸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이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하시면서 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28:20). 온전한 인격은 단 시간에 되지 않고 한 번에 되지 않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단련이 필요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 .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였고(빌 2:12),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자라야 되고 온전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는 우리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우리 주위로 확장되고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고(마 28:19) 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막 16:15). 주께서는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주께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였는데(벧전 2:9), 그것은 전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를 구원하신 중요한 목적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세계 복음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정 복음화는 전도의 일차적 과제이며 우리의 기본적 의무이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고 말했다(고전 7:14). 그것은 가정에서 한 사람이 믿어 구원을 받으면 다른 가족들도 구원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 편에서 큰 복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큰 복이다.
사도 베드로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벧전 3:1). 그 말씀은 전도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을 통해서도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미 믿는 가족은 선한 행실을 통해 다른 가족들에게 구원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말로뿐 아니라 선한 행실로 전도해야 한다.
가정 복음화뿐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기회 있는 대로 우리의 이웃과 지역사회, 그리고 온 세계에 전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전도지를 전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 소식을 전하며, 힘있는 대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자들, 선교사들을 세우며 파송하며 기도하며 후원해야 한다. 그들로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참 교회들을 세우게 해야 한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믿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돌아올 것이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이것은 신약 시대에 우리가 전도의 일에 성실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이다. 전도는 지체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도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고전 1:18, 21).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다"(고후 4:3).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딤후 4:2). 우리의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 주위에 사는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나라나 온 세계의 어느 곳이든지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자들을 파송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고 그들이 그 곳에 복음을 전하고 참된 교회들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전도는 주께서 명하신 가장 큰 명령이다. 그것은 우리가 뒤로 미루지 말고, 지체치 말고 곧 실천해야 할 일이다.
여호수아 20:2-3,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
모세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도피성에 대한 법은 독특한 규정이다. 이 법은 출애굽기 21:13에 처음 암시되었고 민수기 35장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고 신명기 19:1-7에도 같은 법이 다시 설명되어 있다. 오늘 읽은 여호수아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대로 도피성을 구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정리해보고 그 의미를 살펴보자.
도피성 규정의 내용
도피성은 실수로,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하여 피의 보복을 피하게 한 성읍이었다. 본문 3절에 '부지중 오살한 자'라는 원문은 '실수로(비쉐가가), 부지중(비벨리 다아스) 사람을 죽인 자'라는 뜻이다. 5절과 9절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고의적으로 죽인 자와 성격이 다르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잘못을 하기는 한 것이지만, 사형을 시킬 만큼 악한 자는 아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의 가족이 그에게 감정적인 보복을 하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보복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한 법이 도피성에 대한 법이었다.
그 곳으로 피한 사람은 그 성문에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고에 대해 고하고 장로들은 그에게 그 성읍의 한 곳을 그에게 주어 그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그 곳에 거하게 했다. 그 재판은 그가 본래 살던 성, 즉 그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던 그 성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민수기 35:24-25은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가 그 재판에서 그 사고가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판정되면 그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곳에서 어느 기간 동안 살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금고 상태와 같았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가 그 성읍을 떠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가 죽임을 당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용도로 여섯 개의 성읍들이 구별되었다. 그 성들은 본문 7-8절에 기록된 대로 요단강 동쪽에서 3개, 요단강 서쪽에서 3개이었는데, 요단강 서쪽에서는 북쪽에서부터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중부의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남부의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이었고, 요단강 동쪽에서는 북쪽에서부터 보면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과 중부의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남부의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이었다.
이 여섯 개의 성읍들은 다 레위인들이 받은 48개의 성읍들 중에 속한 것들이었다(민 35:6-7). 그 성들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에서 북부와 중부와 남부에 걸쳐 있어서 실수로 살인한 자들이 쉽게, 빨리 피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고, 레위인들은 비교적 경건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들보다 공의로운 배려를 기대할 수 있었다. 신명기 19:8 -9에 보면, 후에 영토가 더 확장되면 3개의 성읍들을 더 추가하라는 명령도 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그 경내에 우거하는 이방인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본문 9절은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고 기록한다. 민수기 35:15은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고 규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해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배려도 증거하셨다.
살인의 구별
도피성에 대한 법의 중요한 점은 살인에 대한 구별이다. 살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고의적인 살인이 있고 실수로 하는 살인이 있다.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하고 구별해서 처벌되어야 한다. 출애굽기 21:12- 14에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말한다.
고의적인 살인이 있다. 민수기 35장에 보면, 고의적 살인은 예를 들어 이웃을 미워하여 손으로나 돌이나 나무나 철 연장으로 쳐서 죽인 경우이다. 이런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시키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생명은 존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생명이 귀하기 때문에 사형을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미워하는 것은 혁명적 방법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지식인들과 부자들을 죽임으로써 물질적 평등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북한과 쿠바는 아직도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고 있고 중국도 그 이념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인정한다. 세상에는 악한 방법으로 부자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정당한 방법과 지혜와 근면함으로 부자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성경은 지혜와 근면을 장려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평등의 이상적 사회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악마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출 21:12, 14)를 포함하여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출 21:15, 17)나 간음을 행한 자(레 20:10) 등 중범죄자들을 반드시 사형시키라고 명하셨다. 오늘날도 사회적 평안을 위해서는 악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 같은 것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폭력 시위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고의적인 살인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할 죄이었다.
그러나 실수로, 부지중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다. 민수기 35장에 보면, 우연히 밀치거나 우연히 돌이나 연장을 던지다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런 자는 사형을 시킬 만한 악을 행한 자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도 잘못이기는 하지만, 사형에 해당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자의 가족은 감정을 가지고 그에게 보복하려고 할 것이다. 이 때 도피성은 실수로, 부지중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예표적 의미
도피성에 대한 법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실수로 살인한 자가 그 성으로 도피하여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에서 거하다가 그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그것은 금고 상태와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유배나 귀양 같은 형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함을 얻는 것이요 은신처를 가지는 것이었다.
옛날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수장(首長)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나라의 종교적 수장이었다. 대제사장은 모세 시대의 아론을 계승한 종신직이었고 그 나라에서 한 명뿐이었다. 물론 후에 헬라 시대에는 그 직이 속화되었고 세속 통치자가 임명하며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직이 되었고 종신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수도 하나 이상이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대제사장이 한 명뿐이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라는 규정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레위 지파의 수장이요 나라의 종교적 수장인 대제사장의 죽음은 온 나라의 슬픔이 되었고 그 슬픔은 개인의 사사로운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사람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더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 규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다6)고 보았다. 대제사장의 일차적 사역은 백성의 중보자로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민수기 35:25은 도피성에 대해 말하면서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고 규정한다. '기름 부음'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일을 이루신다.
대제사장은 살아 있을 때 백성의 중보자로서 속죄의 제사를 집행했다. 특히 속죄일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제 그는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완성한다. 그의 죽음은 장차 오실 크신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로 말미암는 속죄는 죄인의 죄를 씻고 그를 자유케 한다. 그 살인자의 잘못은 용서함을 얻고 이제 자유로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9:12, 14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한다.
도피성으로 구별된 여섯 개의 성 이름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합하다. 게데스(케데쉬)는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의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한 처소이시다. 세겜(쉐켐)은 '어깨'라는 뜻이다. 대제사장이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두었듯이(출 28:9, 1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름을 그의 어깨에 두셨다. 헤브론은 '교통, 연합'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시고 교제케 하신다. 베셀(베체르)은 '금광석' 혹은 '요새'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배시요 우리의 요새이시다. 라못(라모스)은 '고지(高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성이시다. 골란은 아마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이시다.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의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이시다(롬 8:1). 도피성은 요단강 동서쪽에 세 개씩 북부, 중부, 남부에 걸쳐 있었고 실수로 살인한 사람이 쉽게 달려가 피할 수 있는 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쉽게 달려가 피할 수 있는 구주이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0:13). 도피성은 이방인도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구별 없이 구주이시다(롬 3:29-30). 그러나 그 죄인이 도피성을 벗어나면 보호함을 잃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구원을 잃을 수밖에 없다.
도피성에 대한 법은 의미심장하다. 그 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고의적 살인과 실수로 한 살인은 구별되어야 했다. 고의적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우리는 이 점에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도피성은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그는 우리의 실수의 죄뿐 아니라, 고의적인 죄까지도 용서하셨다. 그는 모세의 살인죄를 용서하셨고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 죄인들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하셨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은신처시요 피난처이시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은 분이 계신가?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 곧 지옥 형벌도 의미한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이다. 여러분은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오셨는가?
여호수아 21:43-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셨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그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분배하고 여섯 개의 도피성을 구별하고 레위인들을 위해 마흔 여덟 개의 성읍들을 구별한 후에,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을 포함했다. 가나안 땅은 본문의 표현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43절)이며 '여호와께서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안식'(44절)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45절)이었다.
아브람[아브라함의 이전 이름]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고(창 12:7),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하고 헤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3:14-15).
하나님께서는 후에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며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고(창 15:18), 또 언약의 표로 할례를 명하실 때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8).
하나님께서는 후에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고(창 26:3), 또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나타나셔서 "나는 여호와니 . . .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다(창 28:13).
성경에서 언약과 맹세는 동의어로 쓰이는 것 같다(시 105:8-10). 하나님께서는 맹세함으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신실하였다.
그러므로 후에 요셉은 애굽에서 죽을 때 그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했다(창 50:24).
또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다(출 33:1).
또 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군들 중 열 명이 불신앙적 보고를 하고 백성들이 그 보고를 따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였을 때도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고(민 14:23), 또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민 14:30).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면서도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수 1:6).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셨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보다 영생이다. 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요 3:16). 그는 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사도 바울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영생을 약속하셨다고 말했고(딛 1:2), 사도 요한은 그가 신자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들로 그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요일 5:13). 영생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또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예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며 땅끝까지 증거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4; 행 1:8).
또 천국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또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보았고 거기에서는 눈물과 고통과 사망이 없을 것이라는 음성과, 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는 음성을 들었다(1-5절).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책 맨 마지막에 기록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22:20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생이, 세계 복음화가, 천국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교회에게, 온 인류에게 약속하신 바이다.
난관과 대적이 있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얻는 과정에는 많은 난관들과 대적자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는 645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지루한 긴 기간이었다.
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왕 바로의 권세로부터 건져내는 것도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는 처음에 보내주려 하지 않았으나(출 5:2) 열 가지 재앙들을 통해 조금씩 항복하였고(출 8:28; 10:11; 10:24 등) 마침내 그들을 내어보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도 홍해의 난관, 백성들의 불평과 불신앙, 고라 일당의 반역,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 등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고 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도 많은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간의 범죄로 인한 실패 등도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많은 문제들을 가진 역사이었다. 그것들은 인간 본성의 연약함과 세상의 죄악됨과 마귀의 활동들에 기인한 문제들이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도 헤롯왕이 베들레헴 부근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기들을 다 죽이는 일이 있었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바울은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었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또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살전 2:15-16).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다.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 때 핍박을 받았던 사도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섰다(계 1:9).
또 그는 장차 극심한 핍박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기를, "[짐승이]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다"고 말했다(계 13:7, 10).
신약 교회의 역사는 핍박의 역사이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진실한 많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 시대와 공산 치하에서 많은 고난과 투옥과 순교를 당하였다. 오늘날도 공산주의 독재 사회나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다. 이 모든 핍박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
약속하신 바를 다 이루심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에게 많은 난관과 대적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다 이루셨다. 그는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다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여주셨고, 그 모든 대적들 중에 그들을 당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45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 중 한 말씀도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졌더라"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실패치 않고 다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신다(요 6:39).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주님을 따른다(요 10:27).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들을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요 10:2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을 것이다(행 13:48).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롬 8:30).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를 부르신 그가 이루실 것이다(살전 5:23-24).
우리의 구원과 성화와 영생, 세계 복음화, 천국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환난과 핍박과 굶주림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했다(롬 8:35, 37).
사도 요한도 중생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말했고(요일 5:4-5), 또 예언하기를, 대 환난 시대에 핍박자들이 나타날 것이며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고 말했다(계 17:14).
이스라엘의 열조들에게 맹세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다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들, 즉 구원과 영생과 세계 복음화와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들도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고 확신하자.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다(히 10:37). 또 성경 맨 마지막 구절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계 22:20). 우리도 아멘으로 화답하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이 되자.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되지 말자. 참 신자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이다. 어디든지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주께서는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약속한 대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자. 하나님의 신실하심같이 우리도 신실한 자가 되자.
여호수아 22:10-12,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여호수아 22장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간 세 지파 장정들이 요단강 언덕에 큰 단을 만들었고 그 일로 오해를 받아 큰 싸움이 일어날 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는 여호수아 22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교훈을 찾아보자.
세 지파에게 권면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를 마쳤을 때,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지파 장정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그들이 모세의 명령과 자신의 명령을 다 지키고 순종했고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의 명하신 책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크게 삼가 모세의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고 그 계명을 지키고 그를 붙들고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5절). 본장 5절에 '친근히 하라'는 원어(다바크)는 '붙들라'는 뜻이고, '성품을 다하여'라는 원어는 '영혼을 다하여'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었다.
여호수아는 또 세 지파 장정들에게 그들이 얻은 많은 전쟁 노획물들, 심히 많은 가축들과 은금동철과 심히 많은 의복들을 그들의 형제들과 나누라고 말하였다(8절). 세 지파 장정들은 여호수아의 권면을 들은 후 요단 서편의 실로에서 요단 동편 길르앗 땅으로 돌아갔다.
요단가에 큰 단을 만듦
그 세 지파의 장정들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다가 가나안 땅 요단강 언덕에서 큰 단을 만들었다(10절). 그것은 볼 만한 큰 단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11절) 큰 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 지파의 장정들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요단강 서쪽 강언덕에 그 단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들의 행위는 덕스럽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할 때 다른 지파 사람들과 의논한 후 했어야 했다.
본장 12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하니라"고 기록한다. 즉 세 지파 사람들의 행위는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 세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오해했다. 물론 그것은 오해이었고 그들의 판단은 부족했고 성급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부족과 연약이 많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 간에는 큰 전쟁과 분열이 불가피하였다.
이스라엘이 조사단을 보냄
이스라엘 온 회중은 우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사장 비느하스와, 열 지파에서 한 명씩 열 명을 조사단으로 길르앗 땅에 먼저 보냈다. 비느하스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해 단을 쌓아 여호와를 배역(背逆)하고자 하느냐고 지적하였다(16절). '거역한다'는 원어(마라드)는 '배역한다, 배반한다'는 뜻이다.
비느하스는 또 브올의 범죄를 상기시키며 말하기를,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고 하였다(17-18절). 브올의 죄악은 모압 평지 싯딤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한 것을 가리킨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염병으로 치셨고 그들은 24,000명이나 죽었다(민 25:1-3).
비느하스는 또 말하기를,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배역하지 말라"고 했다(19절). 한글 성경에 '패역하다'고 번역된 원어(마라드)도 역시 '배역하다, 배반하다'는 단어이다.
비느하스는 또 아간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서도 상기시키면서,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느니라"고 말하였다(20절).
요약하면,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조사단의 지적은, 그 세 지파 사람들이 요단 강가에 큰 단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범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세 지파의 답변
이런 지적을 받은 세 지파 사람들은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조사단에게 자신들이 단을 만든 것이 하나님을 떠나 배역함이거나 범죄함이 아니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본장 22절에 보면, 그들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엘 엘로힘 예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엘 엘로힘 예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신들의 신이신 여호와, 신들의 신이신 여호와께서7) 알고 계시며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신들의 신'이라는 표현은 참된 하나님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그들은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혹시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8)라고 말한다(22-23절).
세 지파 사람들은, 그들이 그 단을 만든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여 훗날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상관이 없다. 요단강이 너희와 우리 사이의 경계선이다. 너희는 우리 하나님 안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27-28절).
그들은 또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단 외에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배역]하고 오늘날 여호와를 좇음에서 떠나려 함은 결단코 아니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29절). 그들은 그 단을 '증거'(에드)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 단이 이스라엘과 그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동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훗날에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부정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들이 그 단을 만든 것은, 비록 덕스럽게 행하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회중이 즐거워함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회중의 대표자들은 세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30절). 비느하스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 아노라'고 말했다. 비느하스는 돌아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보고하였고, 그의 말을 들은 온 회중도 즐거워하였다(33절). 큰 시험거리가 잘 해결되었고 큰 오해가 잘 풀렸다. 하마터면 큰 싸움이 일어날 뻔한 일이 평안하고 은혜스럽게 잘 마무리되었다.
모든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 여호수아 22장에 기록된 이 사건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이든지 덕스럽게 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세 지파 사람들은 좋은 의도로 단을 만들었지만, 오해를 주는 방식으로 행했다. 그들은 먼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나 회중의 동의를 구하고 행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덕은 건설과 건립을 말한다. 덕스럽게 행한다는 것은 남의 신앙과 인격을 건립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범사에 덕스럽게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도 남에게 오해를 주는 방식으로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남의 말이나 행동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단 동편으로 보내진 세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했다고 오해하였고 그들과 싸우려 하였다. 사람이 생각을 잘못하면 말과 행동도 잘못되어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또 세상에는 잘못된 말들도 많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 말이나 다 믿지만, 지혜로운 자는 사람의 말들을 분별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배역하고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 지파 사람들에 대해 염려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을까봐이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본장 5절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이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친근히 한다'는 말은 '붙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그를 붙들고 성심으로 그를 섬기며 그의 말씀대로 행하며 모든 악을 떠나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것이 회개요 이것이 구원이다. 인생의 정로(正路)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법칙이 지금도 온 우주 만물의 법칙이듯이,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의 삶의 법칙이요 인생의 정로이다. 사람은 첫째로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여호수아 23:6-8,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여호수아 23장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권면이다. 이 권면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을 때(1절) 있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 당시 모세의 수종자이었고 성경은 그를 '청년(나아르) 여호수아'라고 표현하므로(출 33:11) 적어도 40세 이하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가나안 정탐을 했던 갈렙은 그 때 40세이었다(수 14:7). 광야 40년을 지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40년 후이었고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의 나이는 80세 이하이었을 것이다.
또 그가 많은 가나안 전쟁들을 치르며 그 땅을 거의 정복한 때는 그로부터 적어도 5년 내지 10년 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그가 110세까지 살았다고 증거하므로, 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대략 20년 내지 25년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장로들, 우두머리들, 재판장들, 주요 관리들을 다 모으고 마지막 권면을 하였다. 본장의 내용은 셋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고와 전망이며, 둘째는 교훈이며, 셋째는 경고이다.
회고와 전망
첫째로, 본장 3-5절, 9-10절에서, 여호수아는 지난 날을 회고하며 앞으로의 일을 전망한다. 3절에 보면, 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미페네켐 , '너희 앞에서,' '너희 때문에']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고 말한다. 9절에서도, 그는 "여호와께서 강대한[크고 강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고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셨으므로 그들은 항상 승리하였다. 하나님보다 더 전쟁에 능한 자는 없다.
또한 4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이미 멸한 모든 나라들과 해 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원문 직역)고 말한다. 그는 이미 멸한 나라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열 지파에게 분배하였다. 두 지파 반은 요단 동쪽에서 기업을 얻었었다.
이렇게 과거를 회고한 후, 5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시고 떠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10절에도 그는 다시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이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안에서 가졌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전망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교회 건립과 세계복음화의 임무에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도 싸우실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 많고 세상에 죄악들이 가득하고 또 사람들의 방해와 핍박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실 것이며 참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세계복음화를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에 넉넉히 다 들어갈 것이다.
교훈
둘째로, 본장 6-8절, 11절에서, 여호수아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6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그가 앞에 말한 내용, 즉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또 함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교훈의 근거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자라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또 7절에서 그는,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첫 번째 계명에 관계된다.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성도는 이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또 그는 8절에서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말한다. '친근히 한다'는 원어(다바크)는 '꼭 붙잡다'는 뜻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꼭 붙잡고 따라야 한다. 또 11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다.
이것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필요한 교훈들이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꼭 붙잡고 그를 사랑하며 그가 주신 성경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고(딤후 1:13), 또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보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보수(保守)하고 다 믿고 그 말씀을 주야로 읽고 듣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신 성경 교훈을 행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지키고 힘써 행해야 할 규칙이다.
경고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장 12-16절에서, 여호수아는 중대한 경고를 한다. 12-13절에 보면, 그는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제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이방인들을 다 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친근히 하고 그들과 더불어 혼인하고 피차 왕래하면, 즉 그들이 이방인들과 잘못된 교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인들을 다시는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고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되게 하여 이스라엘로 마침내 다 멸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 14-15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도 틀림이나 어김이 없이 다 응답하여 모든 좋은 것을 주신 것같이, 하나님께서 또한 모든 나쁜 것, 즉 재앙도 틀림없이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16절에서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그들에게 미쳐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요긴하다. 잘못된 교제는 신앙적 부패를 가져오고 그것은 개인과 교회에 큰 시험거리와 문제와 고통이 되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말했고(고후 6: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했다(살후 3:6). 순종하는 성도들 간의 교제는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나 순종치 않는 교인들에 대해서는 교제를 금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한다. 여호수아 23장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마지막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유익한 교훈이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성화, 전도, 교회의 건립 그리고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대하자. 그는 우리 앞에 행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그가 주신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그 진리를 믿고 그 교훈을 행하자.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만 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하자. 잘못된 교제는 신앙의 부패와 변질을 가져오고 그것은 우리에게 올무와 덫, 채찍과 가시가 되며 마침내 우리 개인과 교회를 멸망케 할 것이다. 우리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우리는 순결한 신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교회는 순결하고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렀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모였다. 세겜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지이었던 것 같다. 여호수아 18:1에 보면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에 모여서 회막을 세웠었으나, 이제 세겜이 그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세겜은 레위 지파의 48개의 성읍들 가운데 여섯 개의 도피성들 중 하나이다(수 20:7). 세겜은 팔레스틴 중부 에브라임 산지에 있었으며 실로보다 조금 북쪽에 있었고 후에 아합 시대의 수도 사마리아보다는 조금 동남쪽에 있었다. 신약 성경의 수가성은 바로 세겜성이든지 아니면 세겜성 부근의 어떤 성이었다.
여호수아 24장의 주요 내용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는 2-15절로 여호수아의 교훈이요, 둘째는 16-22절로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이요, 셋째는 23-28절로 여호수아가 백성과 언약을 세운 일이다. 그 나머지 몇 절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의 장사,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언급이다.
여호수아의 교훈
첫째로, 2-15절은 여호수아의 교훈이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라고 말을 시작하면서 2절로 15절의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창세기부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에 걸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내용을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면, 모세 오경의 내용은 참되고 진실하다. 모든 성경은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유브라데 강 저편 즉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을 때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또 그는 그에게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을 주셨고 야곱은 그 자녀들과 함께 애굽에 내려갔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또 그는 그들을 뒤쫓던 애굽의 모든 군사들이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여러 날 거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요단 동편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점령케 하셨고 모압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으셨다. 또 그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들은 칼로나 활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으로 그 땅을 정복하였고 그들이 건축치 않은 성들과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들과 감람원들을 취하였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하였다. 14절에 보면, 그는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했다. '성실과 진정으로'라는 원어(베사밈 우베에메스)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들의 조상들이 유브라데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려야 했다.
또 15절에 보면 그는 그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 아합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심각한 배교에 빠져 있었을 때 선지자 엘리야가 한 말과 비슷하다. 열왕기상 18:21에 보면,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했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과 참 신앙을 선택하라고 촉구하면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자신이 환경에 좌우됨이 없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그의 중심을 잘 나타낸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태도이다.
참 신앙은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시대 풍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사람들의 숫자나 여론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이전에 가나안을 정탐했던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열 명은 불신앙적 보고를 했고 단지 두 명만 신앙적 보고를 했었다. 아합 시대에도 엘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고 고백했었다(왕상 18:22).
우리가 만일 환경을 따라가고 시대의 풍조를 따라가고 사람들의 숫자나 여론을 따라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고 배교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와 열왕 시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것과 역행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노아가 그러했고 아브라함과 롯이 그러했고 엘리야와 미가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야가 그러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말하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다(딤후 4:3-5).
19-20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중대한 경고를 한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따르면 복과 생명을 누리지만, 만일 그를 배반하고 거역한다면 죽음과 영원한 불행을 얻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
여호수아 24장의 내용 중에, 둘째로, 16-22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에 대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교훈을 듣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결심의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셨고 그들 앞에서 큰 기적들을 행하셨고 그 모든 길에서 그들을 보호하셨고 그들 앞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하였고 자기들이 여호와를 택하고 섬기는 일에 증인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언약을 세움
셋째로, 23-28절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운 내용이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말했고 그들은 그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고 대답하였다.
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언약을 세웠다. 그것은 그들이 말한 대로 다른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는 공적 약속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과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출 24:4-8; 신 29:10-13)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또 여호수아는 거기에서 그들을 위해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고 그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책은 모세 5경을 가리킨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서를 그 율법책에 첨가하였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권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 그는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 '성소 곁에'라는 말은 그 당시 회막이 세겜에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성막은 성소(聖所) 곧 거룩한 곳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18:1에 실로에 있었다고 증거되었던 회막은 그 동안 세겜으로 이동되었던 것 같다.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 큰 돌은 여호수아와 백성이 맺은 언약에 대한 증거의 돌이었다.
여호수아 24장에 담긴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몇 가지의 명확한 교훈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이방신들을 버리자. 셋째로, 우리는 성경 교훈대로 행하자.
오늘날 이방신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물론 이방 종교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또한 기독교 이단 종파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또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을 가리킨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도 악령의 활동이며 돈이나 명예나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주의도 그러하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는 신학의 변질이 있다. 그것은 성경 교훈을 가감하고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통적 신학과 옛길을 버리고 있다. 세상 풍조는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과 예배 방식에서도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예배와 교회 음악이 변질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교와 세속주의를 버려야 하는데도, 오히려 잘못된 교제들이 활발하며 그래서 교회들은 점점 더 변질되고 부패되고 있다. 한국 교계에는 성경 번역이나 찬송가 편집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와 은사주의를 배제하고 경계하려는 태도가 전혀 없다. 순수성을 지키려 하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닐 것이다. 자유주의와 은사주의를 배제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교제와 연합 활동에 몰두하는 교회들은 분명히 병든 교회일 것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만 섬기고 이방신들을 버려야 한다. 참 교회는 배교와 타협치 말아야 하고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자.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6: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 16). 우리는 시대의 풍조들을 따르지 말고 성경의 교훈들에 충실히 순종해야 하며 고난을 각오하고 우리의 직무와 본분을 다해야 한다(딤후 4: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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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애굽에서 나올 당시 여호수아의 나이를 40세로 가정한다면 그러할 것이다. 출애굽기 33:11은 그를 “청년 여호수아”라고 표현한다. ‘청년’이라는 원어 나아르,는 ‘아이, 소년, 청년’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에 참여했던 갈렙의 나이는 40세이었다(수 14:7).
2) 신명기 17:9에 처음 이런 표현이 나오고 신명기 17:18; 18:1; 21:5; 24:8; 27:9; 31:9; 여호수아 3:3; 8:33에도 사용되었다.
3)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의 본문은 KJV 영어성경과 같이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에서 멀리 그쳐서 일어나 싸였다”고 되어 있다.
5) ‘그의 아우요’라는 말은 ‘그의 아우’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6) 카일-델리취, 매튜 풀, 매튜 헨리, 박윤선 등.
7) 이것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액센트들에 따른 읽기이다.
8) 예박케쉬
라는 원어는 ‘조사하시옵소서, 심사하시옵소서’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