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분노” (막 3:1-6)
우리가 크리스찬으로서 믿음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난처하게 하는 문제가 여럿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분노’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모두가 다, 주일이면 교회로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의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털어버리고 교회로 나와서, 사랑하는 교우들을 만나고 함께 찬송을 부르고, 또 성가대의
은혜로운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하며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은혜를 받으며, 기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에 이 세상에 종말이 오게 된다면, 정말이지 곧바로 하나님
나라로 직행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끝내고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때때로 우리는 어떤 일로 인해서
화가 나고, 분노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하는데, 그러고 나면 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됩니까? 꼭 지옥 갈 것
같고, 내가 과연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도 됩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경험을 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를 가리켜서 ‘분노의 시대’라고
어떤 사회학자가 정의를 내렸습니다.―‘Age of anger’라고요. 또 ‘Angry City-분노의 도시’란 말도 있는데,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생활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심리학적으로 ‘분노’라고 하는 것은 “가끔 무엇인가 우리를 방해할 때에,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정의 격동”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드레날린’이라고 하는 효소가 우리의 혈류 속에 분비가 되는데, 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근육이 긴장하게 되고, 혈압이 올라가며 맥박이 빨라집니다. 그래서 속에서부터 어떤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황소가 날뛰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우리 옛말에 “성난 황소와
같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사방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분별없이 파괴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로인해서, 황소 자신도 뿔이 부러지고
가죽이 찢어지는 등, 자기 자신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로
인하여 빚어지는 참상들을 우리는 연일 뉴스보도를 통하여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황소가 내는 화는 잠깐이면 끝나게 되지만, 인간이 내는 화는 끈질기기 때문에, 거기에서
초래되는 비극은 더 큰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정을 깨뜨려 버리며, 가정을 파괴시키며, 폭력을 유발시키고 원한을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좋은 예들을 보게
됩니다.
분노로 인하여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을 죽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분노로 인해서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도 바라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이 분노는 희생시켰으며,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이 분노가 일으키는 파괴의 모습들을 우리는 매일같이 친히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나왔는데, 평소처럼 부부가
함께 나오지를 못하고 남자만 혼자 나왔습니다. 바로 전날 밤에, 사소한 얘기들이 발전하여서 말다툼이 되고, 그것이 부부싸움으로 변하게 되고나니
분노가 치솟게 되고, 그래서 화를 못 이겨서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 그만 화근이 된 것이지요. 물론 자기 자신도 많이 꼬집히고
말이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도
심하게 싸웠는가 싶어서 후회도 되고, 그래서 서로가 사과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만 아내의 눈두덩이 시커멓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부부사이뿐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분노는 사고를
가져옵니다.
한 젊은 아버지가 살인죄로 체포되어서, 경찰서에서
울면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피곤해진 몸을 좀 쉬어볼 양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딸아이가 어찌나 울고 보채는지,
아무리 달래어도 그치지를 않으니까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만 아이를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그 온화하고 독실하던
신앙심도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모든 하나님의 가르침을 빼앗아 가버리고 맙니다.
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이좋은 잉꼬부부들도, 분노에 치밀면 당장에 이혼할 것처럼 마구
떠들어대며, 심한 말들을 분별없이 내뱉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분노’라는 것은, 그가 크리스찬이든 비
크리스찬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지식인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간에 가리지를 않고 쳐들어가서, 가정관계이건 동료관계이건 모든 것을 상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분노는 엄청난 죄라고요!! 에베소서 4장 31절과 골로새서 3장 8절에 보면,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목들이 거기에 나열되어 있는데, 그 죄목
속에 ‘노함과 분냄’이란 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보면 ‘분노’를 육체의 일이라고, 죄라고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분노에 관한 말씀들을 생각할 때,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때때로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이렇게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분명히 놀라게 됩니다. ― “예수님이 화를 내셨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 아니셨던가? 최악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인내하시며 참아주시지를
않았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제가 조금 전 말씀드린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멸망에 이르는 죄를 열거할 때 등장한 그 ‘노함’과 똑같은 단어가 오늘 분문 속에 그대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분명히 ‘죄’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노하셨다면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무죄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분노’를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분노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진 아주 불쌍한 사람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신지라, 이 사람을 보게 되면 틀림없이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뒤에서는, 어떻게든 예수를 잡아서 처치하려는 바리새인들이 숨어서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사회에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께서 이 환자를 고쳐주시면, 자연히 일을 한 결과가 됩니다. 그러면 법을 어긴
것임으로, 합법적으로 예수를 체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고 보면, 이 불쌍한 불구자를 하필이면 예수님이 오는 앞에 앉아있게 해놓은 것은, 유대인들이 사전에 벌린 음모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회당 안으로 들어서십니다. 자연히 이
손 마른 병자와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회당 안에 있는 음모자들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계략도 단번에
알아차리셨습니다. 이 병자가 왜 여기에 있는지, 바리새인들이 왜 지켜보고 있는지, 이제 어떤 음모가 일어나게 될
것인지…!!
이 경우, 여러분이셨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용감하게,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공개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목숨을 살리는 것이 옳습니까,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잘못을 뉘우쳐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음모가 들어나게 되자 속으로 이를 가는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의 가슴 속에는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셨다고
본문은 세밀하게 예수님의 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단연 명령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손을 내어 미시오!” 그 순간에, 바리새인들이 ‘일’이라고 해석하는
기적적인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일이 일어나도록 계략을 꾸미고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용기와 그 권위에 눌려서, 아무 소리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서는, 본격적으로 예수를 해치려는 음모에 착수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분노한 그 ‘동기’와, 분노의 ‘과정’과, 분노의 ‘대상’, 그리고 그 분노의 ‘결과’를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분노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과정’은
바리새인들이 모함을 아시면서도, 또 그로인해 자기에게 해가 오게 됨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시는 ‘신념의
행동화’였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대상’은 바로 ‘불의의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결과’는 손 마른 자가 회복되게
되는 ‘행복의 창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분노는 결코 개인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점을 놓고, 우리들이 내고 있는 분노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들은 주로 어떤 경우에 분노를 합니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분노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다 ‘나의 성미, 나의 신경질, 또한 나의 이기심’으로 인하여서 터져 나오고 있는 그런
것들이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들은 나의 ‘화냄의 원인’이 시시한 이유로
화내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옳기 때문이라고 차원 높은 것인 것처럼 둘러대며 말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 저변의 이유는
바로 ‘개인감정’에서 시작된 것들이지 않습니까?
나의 자존심, 나의
지위, 나의 재산, 또는 나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느끼기에, 이런 성질들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냉대하거나, 중상하거나, 시기를
할 때에 우리는 너무나도 빈번히 발끈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비난을 당하거나, 우리의 형제나 친척들이 논박을 받거나, 우리들의 입장이 위협을 당하거나 우리들의 감수성이 짓밟힐 때에, 우리들은
발끈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부분의 분노는 악으로 차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리하게 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복수심’이 우리의 분노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를 보세요. 우리와 같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에도 결코 한마디도 분노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우리가 흔히 분내는 그러한 경우에 우리
주님께서는 오로지 인내하지 않으셨습니까?
욕설을 들어도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그 거룩한 이마에
가시관을 씌워 그 가시가 이마를 찢고 피가 눈을 가렸지만,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시고 온갖 조롱과 능욕을 받으셨지만, 한 번도 분노를 나타내시거나, 한마디도 복수의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래 ‘모욕감’이란, 당하는 사람의 신분이 높을수록
더해지는 법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습니다만, 제가 아는 어떤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유신 당시에,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셨습니다. 온갖 협박과 구타에도 꿋꿋하게 견뎠는데, 한번은 심문하는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하여 들어와서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톡톡 치더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하듯 말이지요.
이때 이 교수님은 뺨을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과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나타나주신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능력의 말씀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시며 또한 섭리하시며, 그래서 우주만물
모두가 다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분노의 숨소리조차 예수님은 내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분명히 보는 대로,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 때에는 누가 개인으로서 예수님에게 잘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는 모든 ‘악’에 대항하여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분노케 했던 것들을 주목하여
보세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의 그
강퍅한 마음을 인해, 예수님은 분노하시면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진 것에 노하셔서, 주님은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분노를 보이시며 그 아이들을 팔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고, 우리들도 이
아이들과 같아야 한다고—겸손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분노는 결국 어디에로 나타나게
됩니까?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그 순간에도,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고 다투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분노는 책망과 나무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손수 대야를 들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으로 실천되었습니다.
나사로를 앗아간 사망의 권세에 예수님은 통분하시면서,
모든 인간들을 죄로 얽매어 두는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것을 맹세하셨고, 드디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 인류 모두에게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건설적인 목적들을 위하여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초기 무성영화시대에, 소를 키우는 카우보이들이 수
마일을 달려와서는 서부 활극영화를 즐겨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악한들이 목장 마을들에 쳐들어와서는, 은행을 털고 여자들을 희롱하는 이런 영화를 보는 중에, 때때로 카우보이들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영화 속의
그 악한을 향하여 총을 쏘아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카우보이들은, 자기들이 영화관의 기물들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악한들도
놓쳐버린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의분(義憤)’이라는 말로서, ‘의분이란 좋은 것’이라고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는 소위 ‘의분’이란 분노들도, 솔직히 카우보이들이 하고 있는 이와 같은 것들은 아닌지, 우리는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27절 말씀을 우리 모두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p.314)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가 원어 성경을 직역하여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화를 내시오,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마십시오.” ― 이 말은, 진정 화를 낼
때에는 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를 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분노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그러면 어떻게 죄 없는 분노가 되게 할 것입니까?
우리의 분노가 죄 없는 분노가 되려면, 그 분노의 올바른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분노’를 ‘anger'라고 하지만, 또한
‘temper’라고도 합니다. 이 temper라는 말은 라틴어 ‘temperare’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temperare라는 말은 물건의
길이를 재는 ‘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척도’라는 말이지요.
결국 그 사람의 ‘분노’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을 재는 ‘척도’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의 인격을 잴 수 있는 척도는 결국 ‘무엇이
나를 화나게 하는가?’ 하는 데에서 결정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측정하여 보세요. 나는 무엇 때문에 주로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젊은 시절에 어느 날, 한 흑인 여자가
남편과 어린 아이로부터 강제로 때어져서 팔려가면서 울부짖는 그 소리를 듣고는, 피가 나도록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면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한복판에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이 링컨의 분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참으로 위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Florence Nightingale하면, 등잔을 손에
든 ‘백의의 천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둘도 없는 고집통이고, 몹시 성미가 급한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환자들에 대한 잘못된 처리에 분노함으로써
병원들이 개선되었고, 결국 이 분노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들에게까지, 심지언 적군에게까지 정부 관계자가 세심한 배려를 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영국의 교도소들은 깨끗하고 잘 정비된 환경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영국의 교도소들도 ‘존 하워드’란 사람이 그 당시 감옥의 형편들을 보고 분노하여 일어서기까지는, 빈약하고 더럽고 질병이 만연하는 그런 소굴이었을 뿐입니다.
노예들의 불행을 보고 ‘윌리엄 개리슨’이란 사람이 “노예의 슬픈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늘지게 한다”고 외치면서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노예해방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노들이 바로 우리 주님을 닮은
분노들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주님을 닮은 분노를 얼마나 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에 인내를 하고 있으며, 무엇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이었다면 오히려 인내하실 자리에서
나는 분노를 터뜨리고 있으며, 우리 예수님이었다면 분노하시어 앞장 스셨을 그러한 순간에, 나는 오히려 잠잠히 인내한다고 하면서 뒷전을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에 동기를 두고, 공의에 목적을 둔 분노를 낼 줄
아는 자는 진정 우리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를 폭발시키며, 이 분노가 자기 스스로가 솔선하여 섬김으로 실천되는 자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죄의 세력 아래 있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지 못할 때, 어떻게 여러분, 전도를 할 것입니까?
교회는 교제의 장소도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교회는 곧 사랑과 섬김인데,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
받으려고 하고, 남을 섬기며 겸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분노가 없을 때, 내가 어찌 예수님처럼 말없이 대야를 들고 허리를 굽힐 수가 있을
것입니까?
결국 예수님의 ‘분노’는 예수님의 ‘사랑’의 다른 한
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찬입니다. 어떤 사람이
크리스찬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가 가신 길을 가며, 그가 하신 대로 따라서 행하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십시다. 예수님이 그 고귀한 분노를
본받으십시오!!
우리들이 갖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분노들! ― 이것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분노들은, 내가 참는다고 해서 참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앤다고 해서 쉽게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서 ‘창조적인 분노, 올바른 목적을
향한 그런 분노’를 낼 때에, 우리의 잘못된 분노들은 결국 사라지게 되고 통제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화나 이기적인 화는 인내로서 속으로
분사시키며, 사랑과 섬김을 위한 창조적인 분노를 밖으로 폭발시키는 자가 바로 크리스찬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러한 사람인
것입니다.
더욱 주님을 닮기에 열정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
속에서 아름답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