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동정심” (엡 4:30-5:2)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에 ‘늑대와 소년’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동네사람들이 뛰어나오는 것에 재미를 들인 어떤 소년이, 어느
날 진짜 늑대가 나타났는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나오지를 않아서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어느 풀장이 딸린 야외식당에서 약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한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후다닥 파티 장을 가로질러 풀장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사람은 축 늘어진 작은 소녀아이를 껴안고는 물위로 떠올랐습니다. 구급차가 달려오고 경찰이 달려왔지만, 불행히도 이 소녀아이는
영영 깨어나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사연이 이 사건 속에 있었습니다.
2년 전에 이 아이의 부모는 이혼을 하였고, 그 후 부모 둘 다가 재혼을 해버림으로써, 이 아이는 그 후로부터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이 소녀아이가 어쩌다가 그만 풀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사람들이 달려와서는 ‘어떠냐? 괜찮으냐?’ 하면서
여간 자기를 위해주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때부터 이 소녀는 그런 식으로 하면 주위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난 다음 두 달 동안에 무려 네 번이나 풀장에 뛰어들어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누군가가 이 소녀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사고가 난 이날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풀장에 뛰어들었는데, 3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붐볐지만 이들 모두가 풀장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이 소녀아이가 뛰어든 것이 잠시 동안 아무에게도 목격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소녀아이와도 같은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사랑에 절망하고 생활에 절망하여, 이 사람들은 바로 이 소녀아이가 뛰어들었던
바로 그 풀장과도 같은 것들에 ― 마약이라든지 술 같은 것들에, 유흥이나 향락 같은 것들에 ―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당분간은 우선 먹혀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중독이 되어 버리고, 그래서 그들이 우선 도피책으로 하고
있던 행동들이 결국은 그들을 영원한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녀아이는 풀장에서 해결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풀장은 그 어린 소녀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고, 이해를 얻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누군가가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하여 뛰어드는 것만이 이
소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크시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바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바동대고 있지만, 그대로 두어버리면 패망하여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 크신
동정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친히 이 세상 속에 뛰어드셨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가노라면, 거듭거듭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며 동정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모든 행동에는 바로 이
‘동정심’이 깊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모습들을 깊은 마음으로 한번 살펴보세요.
오천 명을 먹이시고, 또다시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신 것은, 바로 배고파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주리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과부 사정은 누가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40일 동안이나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고 배고픈 가운데 시험을 받으셨던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이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부터 계획을 세우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한편으로 무리들을
해산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제안에도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이렇게 말씀하시며 받아들이지
아니하십니다. 오로지 그들의 주린 배를 동정하시며, 배부름을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또 병든 자를
고쳐주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든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다고 복음서는 증거합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사, 그의 눈을 만져서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문둥병이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는 그런 병이 아닙니까?
제가 어렸을 때, 가끔씩 문둥병자들이 목사의 집이라고
구걸하러 오곤 하였습니다. 이미 병이 다 나는 음성 환자들이었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였는지 모릅니다.
가끔씩 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밥을 좀 달라고 하면 제
어머님께서 상을 차려 주시곤 하셨는데, 어머님이 ‘설거지를 할 때 끓여서 씻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몇 번씩 일러 주셨지만, 그 그릇으로 음식을
담아주면 먹지도 않았던 씁쓸한 기억이 제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가, 그것도 음성 환자가 아니라 지금 온 몸에 한창 병이 진행 중인 자가, 그 오싹하고 흉한 몸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는 필사적으로 치료를 구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에 대한 씁쓸한 기억이 있는 저이기 때문에,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여간 죄송스런 마음과 함께 또한 감동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만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문둥병자들은, 누구든지 멋모르고 자기에게로 가까이 오게 될 양이면, ‘나는 부정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질겁하고는
멀리 피해가던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주십니까?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나 내게 가까이 오지는 말아라!”
이렇게 소리치며 고쳐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서, 그를 만져주시며 극진한 동정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또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주신 경우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 살 된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이 세
경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에서 분명히 보는 바대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시는 데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다시
살아남으로 무슨 유익이 있어서 다시 살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얼마 후 언젠가는 또 다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미 끝내었고, 이제 더 좋은 낙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아있는 자들의 슬픔을 동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슬픔에 잠겨 통곡하는 유족들을 보게 됩니다. 모든 죽음이 다 슬픈 것이지만, 죽음 가운데서도 배우자의 죽음이나, 부모보다도 먼저 떠난
자식의 죽음은 아마도 가장 슬픈 죽음일 것입니다.
한 과부의 독자였던 청년의 장례행렬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어 장례행렬을 멈추신 다음에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명하십니다. 그래서
죽은 청년을 살려서, 슬픔과 절망 속에 있던 그 어머니에게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하게 될 때도, 이와 같이 죽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이 ― 그것도 우리의 슬픔 속에 깊이 동참하시고, 같이 아파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살펴 보시며 붙들어 주신다면 ― 거기서 참된 위로를
우리가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한 아이가 어머니를
잃고는,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서만 처음으로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불이 꺼진 다음에 이 아이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아빠,
거기 계세요?” 아버지는 가까이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잠시 후에 이 아이가 다시 물어 옵니다. “아빠, 이쪽을 보고
있어요?”
이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 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하고나서는, 그제야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시편 139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고 말하며, 16절에서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눈은 항상 나를 향하여 고정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우리 예수님의
눈이 관심과 동정으로 우리에게 늘 고정되어 있으며, 그리고 항상 이와 같은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아주신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때로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고생하며
유리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특별하신 동정을 베풀어 주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양들을 인도하여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양’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칭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양을 키우는 목자들의 말에 의하면, 양은 참으로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합니다.
주위의 공격에 아무런
방어력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는 뿔이 부러지도록 머리를 박으면서 잔인하게 싸웁니다.
게다가 근시여서 멀리 보지도 못하고, 쉽게 길을 잃고,
무조건 앞선 동물들을 따라갑니다. 또한 더러우며, 고양이가 자신을 씻듯이 깨끗이 할 줄도 모릅니다.
털을 깎는 면양은 이보다도 더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하루의 태반을 가시덩굴이나 가시나무에 걸려서 우는데 소비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목자 없는 양이라면, 그 형편이 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잃어버린바
된 인간이 ―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이 ―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풀장에 뛰어드는 소녀의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에 굶주리고 절망 속에 허덕이며, 그러면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이 양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들은 수영장에 뛰어들고 있는데,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누가 관심을 기우려 줄 것입니까?
바로 선한 목자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뛰어 들어오고, 관심을 보이시고, 깊이 동정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랑에
절망하고 풀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과 같은 우리 인생들! ―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죽음에의 길이며, 아무리 바동거린들 헤어나지 못할
것인데, 이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의미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분이 혹 있으시다면 ―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그 긍휼과, 그 자비와, 그 동정심,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주님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신다면 ― 이 사순절 기간 동안 매일매일 이사야 53장을 읽으시며 기도를 드려보세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을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불쌍히 여기시는 목자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파
굶주린 자들을 동정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배고픔에 대한 동정심을 기다리는 손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계 기근위원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작년 말 현재로 최소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열 명 중의 하나가, 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생명단축과 발육의 장애,
정신력 미숙의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약 오억 여명이 여기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볼리비아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한 분이 전해주는 소식에 의하면, 그가 일하고 있는 마을에 네 아이를 가진 부부가 말 한 마리를 부려서 일을 하여 겨우 먹고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아이 하나가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비싼 약을 써야만 했는데, 약을 살 돈을 마련할 방법이라고는 그 말을 파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을 팔
것이냐?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이냐?
그 부모는 아이는 언제라도 또 낳을 수 있지만, 말은 다시
사기에는 너무나도 비싸다고 생각하여서, 아이 대신에 말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World
Vision의 창설자인 Bob Pierce 목사님이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의 채플시간에 오셔서, 같이 오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통역을 하셔서
설교하는 가운데,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원래 ‘선명회’는 한국 전쟁 이후 우리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설립되었던 기관입니다. 그것이 ‘국제 선명회’로 확장되는 데에 있었던 배경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티베트 지방을 여행하든 중에, 독일에서 온 여자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시설들을 돌아보는 중에, 문밖에 돌계단에서 구부리고 앉아 있는, 이 고아원에 수용되지 못한 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Pierce목사님은 이 아이가 왜 수용되지 못했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방과 예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니 도대체 이 아이가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한 사람도 더 수용할 수 없었느냐?” 이렇게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 선교사가 슬프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몇 번이고 ‘한 사람만 더, 한 사람만 더’ 하고 수용해 왔습니다. 그러든 중 우리가 가진 예산과 시설을 가지고 애초에 계획했던 숫자의
네 배나 벌써 초과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이 저 밖에 있습니다. 내가 자는 방에도, 내가 먹는 밥그릇으로도,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곳에선가 선을 분명히 긋지 않으면, 이미 수용된 아이들조차도 살리지 못할 그런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Pierce씨는 불만족스럽게 “거참 안됐군요. 바로 문밖에서 도움을 구하는 아이에게 아무런 조처도 못하다니요” 하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독일 여선교사가 그 아이를 안아서는 Pierce씨의 팔에다 덥석 안겨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 ‘참 안됐다’ 하고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생각만 하는 것은 값싼 동정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참 안됐다’ 그러고만 계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은 바로 이 세상 속에 뛰어 들어오시는, 그와
같은 동정심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는 전도의 지상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명령을 어떻게 순종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동정심 때문인데, 주님의 이 동정심은 단순히 ‘우리 육신의 불행을 향한 동정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결국 어디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궁극적 사랑’은 바로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여 주는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결국 멸망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에게로 인도하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궁극적인 이 천국복음을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 주님의 이 마음을 본받아서,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자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 같은 동정심이 불타게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TEAM이라고
이름하는 국제적인 전도단체가 있습니다. 이 TEAM선교회의 총재로서 여러 해동안 일하신 T. Bach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원래가
크리스찬이 아니었고, 대학생 시절에 비로소 신자가 되었는데, 이런 동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오후에 공원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조그만 전도책자를 자기에게 주려고 길을 건너왔습니다. Bach는 그 책자를 받는 순간에 찢어버리면서 “자기 일에나 신경 쓸 것이지 이런 허튼
일을 하고 있어”하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길가로 가서는 기도를 하는데, 그의 뺨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Bach의 마음에 이상한 전율과 함께 감동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 “아, 저 사람이 이 소책자를 자기 돈으로 샀구나! 저 사람은 자기 시간을 바쳐서 이것을 나누어 주는구나! 지금 그는 나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구나! 저 눈물!―바로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구나! 진심의 기도이구나!!”
반시간 후에, Bach는 자기 방에서 찢어진 그 소책자를
원래대로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기도 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긴 그 청년의 그 깊은
동정심으로 인해, Bach는 그날 밤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없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을 여러분, 분명히 마음속에 깊이 새기세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사랑을 실천하고, 그 동정심―바로 긍휼히
여김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정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내가 입었는지를 깨달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큰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가 어찌 주님의 그 동정심을 우리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 이기적이고, 욕심 부리고,
자기 배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사랑하며, 도우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영생의 복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전하며,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기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이렇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더욱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자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처럼 사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십시다. 예수님의 동정심을 배우며 더욱 더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