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7-23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론과 관련하여 가장 권위 있는 책은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교회론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무려 800페이지에 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림이 그려집니까?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교회가 그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의 밀접한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교회의 모든 영광과 능력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머리가 영광스럽기 때문에 몸도 영광스럽습니다. 머리에서 모든 생각과 감각과 능력이 뻗어 나오듯이 교회의 능력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랍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목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또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간 가지는 마르고 결국 불살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6절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교회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에 전심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염려나 인간적인 친교나 많은 일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게으름이나 나태함이나 무지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진 진주이고 밭에 감추인 소중한 보화같은 것임을 안다면 자기 전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시길” 18절에서는 “너희 마음눈을 밝히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욕심과 두려움과 무지 때문에 참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눈이 어두워서 진짜 보배를 보지 못합니다. 3, 4세기 이후 모든 가진 것들을 버리고 사막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사막의 수도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한참 때에는 이집트 사막에만 근 2만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재산이나 지위나 심지어 가족까지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으로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있으면 탐욕 때문에, 세상에 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막에 가면 별이 잘 보입니다. 다른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별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주위의 불빛이 너무 강하고 대기 또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나, 현대 교회에 은혜가 없는 이유는 세상에 많이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빛들이 너무 많고 밝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행위들은 다 지켰으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 그러나 청년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10:22)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 중심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그것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의 재물을 다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안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고무하기 위해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들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가 소중한지 알아야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이 아닙니까? 18절과 19절입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 가지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소망’ 곧 ‘희망’, ‘풍성함’ 곧 ‘부요함’, ‘지극히 크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희망차고 부요하고 지극히 큰 무엇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택하셨습니다. 이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일입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도 전인 수십 수백 억 년 전에 하나님은 이 날을 예정하셨고 때에 되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런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소망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곧 완벽한 사람들로 만드시려는 소망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격은 점점 더 완벽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서 완벽한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 또한 완벽해져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르심의 소망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자 떼아르드 샤르뎅이 ‘오메가 포인트’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세상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인간의 모습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진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동안의 진화는 물질적 진화였고, 이제는 영성적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적 진화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온 인류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결국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완성에 이른 때가 오메가 포인트 곧 종말입니다. 진화론의 대가 리처드 도킨스도 그의 책에서 ‘밈’이라고 하여 ‘문화적 유전자’를 언급합니다. 인간에게는 의식이란 것이 있어 그 진화의 양태가 기존의 물질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압니다. 인류가 또 교회가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둘째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기업은 하나님께 받은 유산입니다. 분깃입니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기업’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각 지파별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 기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런 기업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받았던 기업은 흠모할 만한 비옥한 땅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을 방문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평야지대가 아니고 산악지형입니다. 강수량도 많지 않고, 돌멩이와 거친 광야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옥하다 그렇지 않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받은 기업을 영광스럽게 대하면 정말 그 기업이 영광스럽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변화가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좋은 땅이 아닌데 이스라엘은 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프링클러가 광야를 옥토로 바꾸었습니다. 산악지형에 맞는 포도나무나 감람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유럽에 비싼 값에 수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도 개인에게 맡기신 일이요,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에베소서 1장 9,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경륜, 곧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만물이 다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세상은 그리스도 – 교회 –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교회에 충만히 임하고 교회의 충만함을 통해서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려는 영광스러운 목표 가운데 교회를 불렀습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한 까닭은 그 사명이 영광스럽기도 하려니와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충만하게 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자연을 살리는 기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신앙인들이 가는 곳에 가정이 살아납니다. 회사가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나라가 살아납니다. 교회는 복이 흘러가는 복의 통로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신선한 은혜를 공급받지 않으면 죽음의 강, 녹조의 강이 되어 오히려 세상을 해치고 죽게 만들 것입니다. 셋째는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19절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짧은 한 절에 ‘힘’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힘’은 ‘이스쿠스’입니다. ‘강력’은 ‘크라투스’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입니다. 이 두나미스가 지극히 크다는 말씀입니다. 19절과 20절의 ‘역사한다’는 단어도 ‘에네르게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의 ‘에너지’입니다. 힘과 관련된 모든 헬라어가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능력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20절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인류를 얽어매는 힘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힘은 이 죽음의 권세를 파했습니다. 죽음을 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의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오른편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 이 모두는 어떤 초월적인 세력들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모든 존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주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교회는 그 어떤 권세도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우리 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9)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의 도대체 몇 퍼센트나 활용하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평상시에는 활용을 못합니다. 그러다 코너에 몰리면 그때서야 초인적인 힘들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십시오. 거기서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행동파 신앙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들을 경험합니다. 행동하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이미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시대에 증명된 바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신앙인들이었지만 민족의 선각자들과 독립운동들을 이들이 주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근 20%에 이른다고 하지만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세력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우리 능력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충만함은 헬라 어로 ‘플레로마’입니다. 빛이 비추면 빈틈이 없이 가득 채우듯이 그런 충만함입니다. 그릇 안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충만함입니다. 그 충만함이 얼마나 큰지 에베소서 3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다보다 넓고 깊고 하늘보다 높은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수원지가 풍부하면 수도꼭지를 조금만 틀어도 엄청난 힘으로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런 다함이 없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세 수도사들이 산속에서만 생활하면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리스도의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동굴 수도사라고 하여 평생을 동굴에서만 살아도 그들이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넘치고 넘쳐 만물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마치 전파의 충만함 같습니다. 우리 공간에는 전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전파가 수신이 되면 말이 뚜렷하게 들리고 대화도 가능합니다. 선명한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이 되지 않으면 마치 텅빈 공간으로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은 자신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우리의 목표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의 가장 충만하신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모습이 우리가 닮아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데 열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채울수록 우리 인생은 생명으로 넘치고 밝아지고 올바른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교회의 목표는 성장이나 부흥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과 자유와 진리와 풍요로움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것입니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가 다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