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의 삶의 자세” (마 5:21-26)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이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걸쳐 있는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설교의 말씀입니다.  산 위에서 하신 설교말씀이기 때문에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놀랐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어떤 면에서 당시의 서기관들과 달랐다는 것입니까?  무엇이 그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것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듣는 사람들을 놀래게 만든 주님의 설교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리고 솔직한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오늘날 우리들도 여전히 놀랄 수밖에 없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하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제 6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나오지요.  “살인하지 말라!!”―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 그 지키는 동기에 있어서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왜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당한 말씀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심판을 받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원어로 보면, 여기에 쓰인 심판이란 단어는 “지방 형사 재판소”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살인하면 경찰에 붙잡히게 되고,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그리고 재판을 받아서 결국은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살인을 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율법교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이었고, 또 당시의 율법을 지키는 ― 소위 믿는다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였다는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거 참 유대인들, 신앙생활을 정말 엉터리로 하였구먼. 그러니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지…”하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겸손히 여러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보세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여러분도 경찰에 붙들려가서 재판을 받게 되고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 단지 그것 때문에 법을 어기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준법정신을 말하여 “준법, 준법” 합니다만,  과연 어떤 동기에서, 무엇 때문에 준법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조사보고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길가에다가 돈을 떨어뜨려 놓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돈을 보고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한 둘 어린아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 살펴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횡단보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빨간 불이 켜져 있는데, 아무런 차들이 오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 경우, 여러분은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서서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그냥 건너가 버리십니까?
 그 심리학자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물론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건너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건너버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가 건너기 전에 주위를 먼저 둘러본다는 것입니다.  만약 저 멀리서 교통경찰이라도 있을라치면, 열이면 열 다가 기다리더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비단 이와 같은 일상생활에서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 유감스럽게도 이런 동기에서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어느 큰 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의 서무직원이 가장 고심하며 긴장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보에 헌금자의 이름을 수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만 명이 모이는 중에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무슨 헌금’ 하면서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이 한 주에도 수천 명이 됩니다.  이 이름을 수록하기 위해서, 영한사전의 글씨보다도 더 작게, 깨알 같은 글씨로 몇 페이지에 걸쳐서 이름을 싣는데, 요즈음처럼 컴퓨터가 있던 시절이 아닌지라  이름이 빠지지 않게 또 틀리지 않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지요.

 한번은 어느 분이 말하기를 “아니,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이런 걸 누가 본다고 주보에다 내느라고 고심하느냐고, 아예 주보에 싣지 말자”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서무부에서 대답하기를 “모르는 말씀 마시라고. 주보를 받으면 사람들이 무엇부터 제일 먼저 보는지 아느냐”고요.
 무얼 제일 먼저 보는 것 같습니까?
 다른 건 다 젖혀두고, 그 깨알 같은 속에서 자기 이름부터 찾아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자기 이름이 빠져있거나 틀리는 날에는 ― 당장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또는 전화로 난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계속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그러니까 아예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모조리 싣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것도 모르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헌금액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 벧엘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없다고 믿습니다만,  만약 누가 무어라 그러지 않는다고 하여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남이 안 본다고 헌금을 적게 한다거나 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 만약 보는 눈이 없어, 또는 공개되지 않아, 사람 앞에서 창피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히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수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체면 때문에 행동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똑 같은 것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비단 헌금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를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다른 모든 신앙생활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번은 목회자 모임에서 어느 선배목사님께서 자기 교회에 있었던 일을 두 가지 들려주셨습니다.

 미국에 있는 교포교회들은 대부분 교회당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전담 관리자를 두지 못하고 교인들이 자원하여 청소도 하고 관리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모든 곳이 다 정돈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화장실은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는데, 도무지 누가 청소를 하고 있는지, 그것도 언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몇 번이고 하루 종일 지켜보았는데,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어느 집사님 가정이 멀리 타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뒤로부터는 변기에 때가 끼고 청소가 되어 있지를 않아서, 그제야 그동안 숨어서 청소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도대체 언제 나와서 청소를 하였는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새벽기도를 하기 한 시간 반 전에 나와서 청소를 하곤 하였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몇 달 후 그 교회에서 장로님을 선출하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그럽니다.
 어떤 집사님이 그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봉사를 하며 교회를 받들었는데, 장로투표에서 자기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난 이 교회 백년 있어봤자 장로 되기가 어려울 것 같다”며 교회를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남이 보는 앞에서는 있는껏 열심히 했지만, 보지 않는 데선 전혀 일하지 않았더랬는데, 막상 투표를 해보니, 교인들이 모르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더 잘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살인하지를 않았습니까? 왜 법을 지켰습니까?
 단순히 재판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  범법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동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은 동기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로 이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또한 지적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 나는 현재까지 살인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율법을 깨뜨리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법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참으로 잘 믿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좋다. 물론 너는 살인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중심적 의미이냐?!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이 살인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면 ― 만약 그렇다면 ― 다른 사람을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서도 그만 실수를 하여서 그 사람의 생명까지는 미처 끊지를 못했다면,  그러면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겐 살인의 죄가 없다는 것입니까?
 또는 마음속으로는 자기의 적을 죽이고 싶어 하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또는 체포될 것이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님은 말씀은 결국, 너희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마음상태는 어떠하냐?” 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살인은 미움과 분노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경우도, 결국은 시기로 인한 미움과, 그로 인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내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그 자체가 바로 살인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세상 법이 무서워서―잡혀가는 것이 두려워서 실행은 못했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분노하는 나머지 정말 죽이고 싶은 생각을 품은 적은 없으십니까?
 부부싸움 할 때도, 사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이혼을 아니할 것이지만, 그러나 분노하는 나머지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이혼을 결심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성경에 살인치 말라고 했는데, ‘나는 현재까지 살인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잘 믿는 사람이다. 선량한 시민이다!’ ―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해야 하겠는가? 어떤 태도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미움이나 증오를 품는 정신적인 살인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나는 법을 깨뜨린 일이 없고, 감옥에 간 일도 없고, 재판을 받은 일도 없으니 ― ‘나는 잘 믿고 있다!’ ―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보세요.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속생각, 여러분의 중심은  어떠하십니까?!!


 세 번째로,  내 마음 속에 품는 분노에 이어서,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 나오는 “라가”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들의 욕설로서, 직역을 하면 “헛된 놈”이라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상대방을 나쁘게 보이도록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모든 편견과 시기, 중상모략, 투기,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모든 무책임한 말, 음모, 헛소문 퍼뜨리는 것, 수군거리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라가”라는 이 말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또 “미련한 놈”이란 말은,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놈”,  “하나님 앞에서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욕하는 것입니다.  “저런 어리석은 놈 같은 이라고. 어쩌자고 하나님께서는 저따위 인간을 다 만드셨나…” 하고 욕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아주 재미있게 욕을 하시더군요. “야, 너도 사람이라고 낳아 놓고는 네 어머니가 미역국을 먹었겠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 분, 좀 교양 있게 보이는 분 이었고, 그래서인지 쌍시옷자 들어가는 말들은 쓰지 않고 이렇게 교양 있게(?) 욕을 하십디다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이만 저만 큰 욕이 아닙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그려 놓은 작품을 보고는 “저걸 그림이라고 그렸나” 하면,  이 말은 작품에 대한 멸시일 뿐만 아니라, 곧바로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한 멸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부모까지도 멸시해버리는 그런 욕을 그 사람은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얼마나 무시무시한 욕설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직접 손을 대어 죽여야만 살인입니까?
 다윗은 우리야를 죽일 때 ― 그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왕권과 책략으로써 교묘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서 말입니다.
 세상 법과 사람 앞에서 그는 무죄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엄연한 살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직접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나 붓으로나, 그 외 어떤 행위로써 하고 있는 간접살인이 얼마나 많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남의 아픈 가슴을 그대로 찔러서 정신적인 살인을 버젓이 행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살인한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때고 있습니다.  사실 말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까?

 어느 암 전문의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구체적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의 임상경험으로 볼 때, 대개의 암환자들은 암 세포가 발견되기 3년쯤 전에 심각하게 몇 주간이고 밤잠자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내뱉은 말들이 그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이지요.
 물론 누군가 그 사람 ― 칼을 들이대지도 않았고, 자기 손으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살인을 한 것이지요.

 야고보서 3장 8절에서 10절 말씀을 찾아보세요. (p.374)
 여기 보면 우리의 혀가 범하는 범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이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그 입으로 남을 죽이는 말들을 ― 수군거리고, 욕하고, 비방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 앞의 야고보서 1장 26절을 보세요.(p.372)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내가 미워하지 않았거나 살인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생기면,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며,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행위로까지 발전하여야  우리는 살인을 범하는 것과 똑같은 모든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하나님의 법을 바로 지키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의 말씀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기키고 있는가?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나의 적극적인 동기가 되고 있는가?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의를 사모하며, 
 의로운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창피와 무안을 당하는 인간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그래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이 아닙니다.
 법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그 사랑이  내게서 넘치기 때문에
 그래서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찬양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깨끗함을 받은 자이기에, 결단코 다시 더럽힐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깨끗이 살아갑니다.
 이미 이루어 주신 ‘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이 크리스챤의 긍지와 보람으로서
 ‘의’를 이루고 ‘사랑’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의 참된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도록 택함을 받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참된 크리스챤의 삶 ―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더욱 힘 있게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