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과 말의 진실” (마 5:33-37)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품성 중의 하나가 바로 ‘진실성’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진실성’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평소에 하는 ‘말’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일거다!”―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존경과 신뢰를 해도 좋을 훌륭한 사람입니다.  돈 거래를 한다고 해도 차용증서조차 쓸 필요가 없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사람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겠다!!” ― 이 정도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의 사람됨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 하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하는 말이 있지요.  바로 우리가 하는 이 ‘말’이 지니는 신뢰성과 진실성을 강조해 주는 그런 말일 것입니다.

 ‘진실성’이란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이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진실성’을 들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성은 평소에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과 ‘말’들을 통하여 쌓여 나가게 됩니다만, 특히 자기 자신의 ‘진실성’을 들어내는 최종의 방법으로서 우리는 ‘맹세’라고 하는 것을 사용합니다.  ‘내가 맹세한다’고 하는 것 이상의 다른 방법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맹세한다”고 하면, 그게 다이지 않겠습니까? 그 이상으로 어떻게 주장을 할 것입니까?
 그래서 법정에서는 ‘선서’를 시키고,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약속 이행을 맹세하는 ‘서명’을 우리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의 진실을 들어내는 최종의 보루로서 맹세를 합니다만, 그런데 이 ‘맹세’마저도 ‘거짓’이 거기에 들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상 어디서, 어떻게, 우리 인간의 ‘진실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특별한 형식으로 설교하신 네 번째의 말씀으로서, 바로 이 ‘맹세의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먼저 놀라움과 함께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맹세하지 말라!!” ― 그러면 맹세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어떻게 나의 진실성을 들어내며, 또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진실성을 찾으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제로 많은 맹세를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사고 팔 때 우리는 계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법정에 서게 될 때도 선서를 하고, 또 교회에서도 ‘임직’을 할 때에는 서약을 합니다.
 이게 모두 맹세들인데, 그런데 본문에 보면 ‘너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우리 크리스찬은 도무지 맹세라고는 어떤 종류의 맹세이든지 ― 그것이 서약이든지, 선서든지, 약속이든지 ―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그러셨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모든 평소의 맹세들을 포함해서, 그리고 구술서에 거짓이 없음을 선서하는 싸인을 하는 것이나, 법정에서마저도 선서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퀘이커 교도’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들의 정식 명칭은 Members of the Society of Friends―‘형제 사회 단원’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분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요즈음도 이들은 법정진술과 모든 서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면, 퀘이커 교도들이야말로 정말로 잘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들만이 진정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갈 때 커다란 문제점들에 계속 부닥치게 됩니다.  왜냐면 성경엔 정반대로 ‘맹세를 하라’고 하는 구절들이 또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큰 복을 주고…”하시면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도 맹세를 하고 계십니다.

 또 신명기 10장 20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종종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라고 호소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면서 예수님에게 맹세를 시킬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서는 안 된다!!”―이렇게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들의 ‘맹세하라’는 말에 우리 주님은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은 퀘이커 교도들이 이해하는 바와 같이 모든 맹세들 ― 그게 서약이든 선서든 ― ‘모든 맹세들은 도무지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율법적인 금지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맹세하지 말라”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 바로 이 말씀이 본문의 뜻을 올바로 깨닫게 해 주는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행하고 있지 아니하냐? ― 그것이 옳은 것이냐? 바로 행하고 있는 것이냐?!…”

 산상수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이해! 우리의 잘못된 행동들! ―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전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맹세란 인간 진실성의 마지막 확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란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함부로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얼마나 이 맹세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자주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거기다가 이 ‘맹세’란 말이, 오히려 ‘거짓’을 ‘진실’로 가장하기 위해서, 남을 속이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용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이 ‘맹세함’을 사용하는 엄청난 거짓말도 뻔뻔스럽게 자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빈번히 보고 있지 아니합니까?!!

 어떤 분이 이런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참말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일수록 거짓말이고,
  거짓말쟁이일수록 맹세를 많이 한다!!”
― 사실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맹세하지 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불성실과 위선을 비판하시는 말씀이며, 또한 내 속에 깊이 들어있는 이 인간 본래의 악을 고발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진실의 마지막 보루이어야 할 이 맹세를 우리는 남용하고 있고, 그래서 맹세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문을 종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천박하고 경솔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대체로 깊은 생각이 없이 쉽게 맹세하여버리는 그러한 맹세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가십거리를 만들어 낼 때, ‘이건 참말이라고 맹세할 수 있다’고 하면서 불필요한 얘기들을 사람들은 종종 하지 아니합니까?

 “맹세하지 말라!!” ― 주님께선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맹세’란 말은 성경 원어로 보면 ‘순교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 일에 내가 맹세한다고 할 때, 내가 곧 그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에 있어서 깊이 생각하면서 말해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에, 특히 남에게 대한 무슨 말을 할 때에, 그 말이 나의 생명을 걸어야만 할 그런 내용의 것입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제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맹세만 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해도 좋다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목숨을 걸 수 ‘없는’ 그런 말들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는, 또 자기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기 어려울 때는, 상대적으로 남을 비방함으로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말들, 비방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그런 말을 할 때에는 주로 어떤 식으로 말을 합니까? ― “네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그 사람은 이런 이런 사람이라고…, 나만이 아는 사실인데 그 사람이 이런 이런 잘못을 했다고요.”
 그러면서 흔히 이렇게 말을 덧붙이지요.  “이건 내가 너를 믿고 하는 말이니, 그러므로 절대로 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이래서 말이 말을 만들고, 우리 인간사회에는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비 진리와 불성실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내게서 들은 그 사람이 ‘내게서 들은 말’을 남에게 해서는 곤란하게 여기는 그 말을 나는 왜 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나의 거짓이 탄로가 날까봐 남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진실을!!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땐, 내가 한 말에 나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또, ‘이건 비밀’이라고,  ‘너하고 나만 알자’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비밀이라고 했지만, 벌써 ‘내’가 알고 ‘네’가 압니다.
 그리고 그러고만 끝납니까?
 그 사람은 또 자기와 친한 다른 사람에게 “이건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한 얘기지만 너니까 말한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또 얘기를 하지요!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 크리스찬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남이 ‘비밀’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예 듣지를 마세요.  내가 듣지 않아야 그 비밀이 비밀로 남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남에게 대해서 옳지 않은 비방을 하는 얘기는 더더욱 듣지를 마세요.  거기다가, 남에게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는 얘기는 아예 듣지도 믿지도 마세요.  그렇게 하는 말일수록 거짓이며, 지어내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찬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은밀히 “너에게만 말한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이 듣지를 못하십니까?  하나님은 잔 귀를 먹은 그런 분이십니까?

 바로 이 점에 대한 중요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구약성경 말라기 3장 16절을 같이 찾아보십시다. (P.1330)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분명히 들으세요.  내가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 기록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만 하겠습니까?

 ‘말의 진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두 번째로는, 회피적인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주의적이며, 또 맹세 그 자체를 다른 어떤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그릇된 동기에서 흔히 행하게 되는 맹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뺏은 후, 그 후환이 두려워서 하란으로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날이 어두워 돌베게를 하고 누웠습니다.
 이 때 그는 몹시도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합니다. ―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시면 앞으로 계속 여기에 단을 쌓아 기름을 붓고 제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빠짐없이 꼭 바치겠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여러분도 혹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아파서 병이 들면, “하나님, 이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앞으로 내가 이렇게 이렇게 꼭 하겠습니다!”
 입학시험을 앞에 두곤, “이번 시험만 합격하게 해 주신다면 내가 꼭…!”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맹세들이  지금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언젠가 TV에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오더군요.
 한 사람이 배에서 탈출을 하여 육지를 향해 헤엄쳐 갑니다.  그런데 육지는 멀고 힘은 자꾸만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요. “하나님, 제발 날 살려주세요. 저 육지까지만 무사히 다다르게 해 주세요. 난 그동안 교회에 잘 안 나갔고, 헌금도 제대로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또 십일조 헌금도 잘 할께요!!”
 그러다가 십일조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하나님, 힘을 주세요. 저 섬까지만 가게 해 주시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할께요. 아니 십삼조요, 아니 십사조요, 십오조요 …!"
 그러다가 구사일생으로 섬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그런데 막상 살고 보니, 십오조를 맹세한 것이 생각나서 ― 줄여나갑니다.
 “하나님, 십오조는 너무 많지 않습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그러니 십사조요, 아니 십삼조요.  아니, 성경엔 십일조만 얘기했으니 십일조만 할게요.  그것도 내가 집을 사고, 장가도 가고, 아이들 다 키운 다음부터 할게요. 그래도 되지요?”
 그러는데, 원주민 식인종이 그를 잡아먹으려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지런히 다시 달아나야만 했는데,  이제 달아나면서 다시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날 무사히 달아나게 해 주세요. 아깐 잘못했어요. 꼭 십일조를 드릴게요. 아니 십이조요. 아니 십삼조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십오조요!!” 하면서 stop motion이 되고, 그리곤 영화가 끝납니다.

 이것이 혹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위기모면’용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보다 큰 존재의 이름을 빌어서, 그 이름을 빙자한 맹세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의롭고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아무리 맹세해 보아야 다른 사람에게 먹혀들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 외의 다른 존재의 이름과 그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 보려고 애쓰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이미 신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고 제법 거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런 맹세의 의도들은 대부분 무엇을 뜻합니까?
 그 깊은 곳에는 대부분 거짓과 악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요.
 진실은 진실 자체가 증명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는 담담합니다. 변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진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진실로 가장하려고 할 때에는, 무리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동기와 의도, 그리고 불의와 거짓을 환하게 들여다보시는 주님께서는 그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 여기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 ― 이 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은, “너는 너의 말에 얼마나 진실성을 담고 있는가?  너는 얼마나 진실 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또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바로 그 입으로 저주와 비방과 거짓말과 한숨과 독한 말을 어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날의 우리 인간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들은, 맹세와 서약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잊고, 우리의 말에 있어서 진실과 정직을 잃어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국제 수준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서운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또 친구나 이웃 간에 있어서는 소위 ‘가벼운 거짓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리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어려움에서부터 순간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 ‘가벼운 거짓말’을 하고서도, 그것은 마치 죄가 되지 않는 양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되게 됩니다.
 이점을 여러분, 결코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항상 진실 된 말만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을 찾아보세요. (p. 296  5절 하반절)
 사도바울은 그 비결을 우리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십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

 우리의 ‘말’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말’보다 앞서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4장과 15장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에 들어있는 것이 입을 통해 말로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병이 네게가 있습니다. 한 병에는 참기름이, 또 한 병에는 물이, 다음엔 휘발유가, 그 다음엔 잉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흔들 때 각 병에서는 무엇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까?
 각기 그 속에 든 것이 나오게 마련이지요!

 여러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 마음속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내 입에서 거짓이 나오지 않게 막으려는 소극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마음을 그리스도로 온전히 채우지 아니하면, 우리는 거짓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가득 채울 때에, 우리는 주님을 닮은 진실된 말만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말들은 오직 거룩한 마음에서만 나옵니다.
 거룩한 마음이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랑에 사로잡힌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나 깨나 그리스도를 생각하세요.
 우리 주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세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그분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이 진실을 위해 평생을 벽만을 보며 수도하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 애쓰고, 심지어는 손가락을 불태우며 애쓰고 하여도 하지 못하는 그 진실을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언제나 진실 되며, 언제나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된 말만을 하며 우리 주님을 더욱 닮아가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긍지요 자랑이며, 바로 우리들 ― 여러분과 저의 긍지요 자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