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과 권리 문제” (마 5:38-42)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특별한 형식으로 말씀하신 다섯 번째의 말씀으로서, 우리의 ‘권리문제’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우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철저하게 의식하며 주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내가 가진 권리에 대해 질문해 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크리스찬으로서 내가 누려야 할 권리는 어떤 것인가?
 나에겐 성공할 권리가 있는가? 부자가 될 권리가 있는가?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는가? 명성을 얻을 권리가 있는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는가? ……
 꼭 이대로는 아니겠지만,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찬으로서 여러분이 가진 권리란 무엇입니까?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려 하고 있습니까?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 권리의 사용’에 대하여 설교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 특히 ‘보복할 권리’, ‘물건에 대한 권리’, ‘자기의 시간에 대한 권리’, ‘자기의 돈에 대한 권리’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권리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본문은 모든 권리들을 다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크리스찬은 어떤 성품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히 다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가진 ‘보복할 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수심’이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심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가령, 내가 매를 맞았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마음이 생기게 됩니까?  억울함을 느끼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우리는 당장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어쩌다가 심한 놀림을 받든지 쥐어 박히게 되면, 울면서라도 달려들어 꼭 상대방을 때리려고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려 하지도 않지요. 
 또 자기 힘으로 여의치가 못하면 울면서 부모에게로 뛰어갑니다. 내 대신 복수해 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는 한 대 맞았는데, 보복을 할 때는 두 대, 세대, 아니 그 이상 때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복수심이란 언제나 내가 당한 그것보다 더 많게 복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싸움이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것도 가만히 보면, ‘나는 저 애에게 그저 이렇게 밖에는 안 했는데, 제는 나에게 이렇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싸우는 것이지요.

 한마디 욕을 먹었을 때 한마디로 대응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적어도 다섯 마디 이상의 욕을 해야만 속이 후련해지고, 그래야만 갚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 사람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율법을 설정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23 - 25절 (p.11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알고는 있으나, 실제 구약에서 나오는 그 말씀은 잘 읽지 않는 구절이기 때문에, 우리 같이 찾아서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십니까?


 이 율법의 선언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더 크게 보복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복수심에 제동을 거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한 대 이상으로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상으로, 이에는 이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큰 의미가 바로 두 번째의 의미인데, 네가 가해자라면 피해자와 똑같은 입장에서 체험하며 느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이’를 부러뜨린 일이 있으면, 그 순간에 ‘내 이’도 부러져야 함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남의 이’가 ‘남의 이’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순간 ‘내 이’도 부러져야 함으로, ‘남의 이’는 곧 ‘내 이’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이 법의 기초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온 식구가 그를 받들고 위해주다가보니 그만 버릇이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동네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때려서 곧잘 상처를 입히기까지 합니다.
 부모님이 이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한번은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나섰습니다.
 어느 날 또 동네아이를 때리고 있는 것을 이 청년이 그 애를 불러다간 사정없이 몇 대를 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매 맞은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그동안 동네 아이들을 때렸지만, 이 청년에겐 아무런  잘못도 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 무작정 호되게 맞고 보니, 억울하고 분하고 아프고 해서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줄은 몰랐다”고, “지금까지 남을 때려보기만 했지 맞아보기는 처음인데, 맞은 사람의 심정을 처음으로 느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뒤로는 다시는 남을 못살게 굴지 않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남을 때릴 줄만 알면 어떻합니까?   맞아서 아픈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폭력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인 것입니다.

 우린 흔히 남을 비방합니다.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내 입장에서 본 비판이요 비난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상대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비난과 비판들이 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린 어려서 부모님들로부터 “너도 커서 자식 낳아 길러보아라. 그래야 이 어미를 이해할거다”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얘기를 이젠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라!!  ―  그러면 나의 이 보복하려는 마음에 반드시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의 마음과 아픔을 네가 체험해 보라!!

 내가 남의 팔을 부러뜨렸다면 그 다음에는 내 팔이 불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의 팔은 더 이상 남의 팔이 아닙니다.  곧 내 팔이요, 남의 아픔은 곧 내 아픔으로 인식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경우가 내 경우로, 남의 입장이 내 입장으로,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가 부러지는 것으로 연결만 된다면 ― 문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우리의 보복할 권리에 대해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란 말의 근본의미를 모르고 문자적으로만 잘못 받아들이면 ‘철저히 보복하라’는 말로 오해되는 것처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이 말씀도, 잘못 해석하면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적용하실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한번은 부부싸움 끝에 남편에게 얻어맞아 온 얼굴이 붓고 멍이든 어떤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두 분 다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하시는 말씀이 ― 지난밤에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던 중에, 말로 못 당하던 남편이 화가 치미는 끝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한 대 때렸습니다.
 한 대 맞은 이 아내가 완력으로는 남편을 당할 수 없으니까,  옳거니 하고는 바로 이 성경말씀대로 ‘이쪽 뺨도 때려라!’ 하고 들이대었답니다.  그 결과, 얼굴이 그만 그 모양이 된 것이지요.

 어떻게 보세요. 소리를 지르며 부부싸움을 실큰 하다가 “이 쪽도 때리라”고 뺨을 돌려대면, 이것이 과연 성서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반항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복수하는 마음’이나 ‘분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용서하는 마음으로―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복할 권리가 있음을 예수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큰 권리 ―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권리를 생각하라고,  그래서 보복이 또 보복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이런 권리는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보복할 권리에 대한 크리스찬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을 가장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 - 21절 (p.257)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특히 마지막 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잘못 악한 자를 대적하다보면―자신도 모르게―나까지도 악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권리 가운데서 ‘소유의 권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

 이스라엘 사람들은 얇은 메리야스 같은 것을 떠서 속옷으로 입고, 겉옷은 두터운 담요 종류로서, 누우면 이불이고 일어서면 겉옷이 되는 그런 모양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겉옷을 몸에 휘감고 다녔는데, 이 옷은 대단히 비싸서 보통 한 벌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재산문제로 소송을 당해도 이 겉옷만은 빼앗을 수 없도록 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속옷이 요구될 때에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겉옷은 법으로 보호되는, 말하자면 내가 어떤 경우에라도 내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찬이라면 이와 같은 소유물에 대한 당당한 권리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겉옷을 감고 사는 옛날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에 있어서 이 ‘겉옷’은 바로 우리의 소유물 ― 내가 법적으로 등기를 마치고 당당히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의 재산들 ― 말하자면 우리의 집, 자동차, 양복, 가구들, 음식물, 기타 모든 물품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우리가 이와 같은 물품들을 우리의 것으로 붙들거나 열렬히 추구하는 것은 크리스찬으로서는 잘못된 태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심으로 이 소유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소유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우리는 오해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소유가 마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 양, 또한 영원히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으로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소유에 연연하여 하나님을 망각하고, 또한 내 이웃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품들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신 말씀은, ‘시간의 권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 ”

 옛날 점령지에 사는 백성들은 점령한 나라에서 요구할 땐, 물품들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까지도 바쳐서 일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 좋은 실례로서,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던 중에 예수님 대신에 억시로 십자가를 지고서 골고다까지 가야만 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어느 로마사람이 찾아와서 자기의 짐을 지고 1km를 가도록 요청한다면, 오히려 쾌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2km를 같이 동행해 주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교과서에서 “Time is money”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Time is money’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 시간이 곧 돈으로 그대로 환산이 됩니다.
 따라서 시간은 귀중합니다. 이 시간은 내 것입니다. 따라서 쓸데없는 일로 남에게 뺏기고 싶지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귀중한 시간을 뺏으려 할 때, 상대방이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화를 낼 때는 없으셨습니까?
 사무실에서 업무를 더 많이 부과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나에게 떨어졌을 때, 그럴 때 우린 어떻게 합니까?

 우린 그것을 거절하고 내 시간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크리스찬이란 것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의 시민 된 권리가 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교회 전도대에서 지금 열심히 활동하시는 어떤 여집사님께서, “전도를 하다가 보니 요즈음은 콩나물 값도 깍지 않게 되더라.  시장길 걸어갈 때도 조심하게 되더라.  남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은 말이라도 웃으면서 참으며 들어주게 되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평소 같으면 내 시간과 내 기분이 더 중요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란 이 사실을 가지고 보았을 땐, 그 모든 것을 내세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불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명랑한 마음으로 주께 대하듯 그들에게 임하라!
 그렇게 함으로, 바로 그 일로 인해, 여러분은 그들에게 크리스찬의 관용과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돈에 대한 ‘소유의 권리’를 말씀하십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 그 대가로 돈을 법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 것이야, 내가 내 일을 해서 내 돈을 벌듯이, 남도 자기 일을 해서 자기 돈을 벌면 되는 거야!  이것은 내 것이야!!  나를 위한 것이야!! ……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이 열심히 일한 것을 아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것임을 아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을 천국 곳간에 쌓아두는 그런 일들에 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행에 쌓아두고,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태도를 버려라!!  내 소유물임을 포기하고, 남을 위하여―이웃을 위하여  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정말 필요해서 누군가에게 돈을 좀 꾸러갔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꼭 필요하지만 꾸지 못하고 돌아서는 마음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 아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체험해 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시는 이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꾸어주는 입장에만 있지 말고, 꾸고자 하는 입장에 서 보라!!  그 마음을 이해하라!!
 요한일서 3장 17절과 18절은 따라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또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아예 돈을 꾸어가며 그것으로 ‘살아가는 방도’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약하며, 힘써 일하며 저축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저 이리 저리 꾸어가면서 쉽게만 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이 원칙은 적용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허리띠를 줄여가며, 알뜰히 살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라. 네가 그 사람이라면, 너같이 계속 꾸러만 다니는 사람에게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당당한 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권리가 앞서고 내 권리만 주장할 때는 내 이웃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분쟁과 다툼이 줄을 잇게 됩니다.
 그러고서야 어찌 하나님 나라가 이 지상에 전파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따라서 네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기분을 내 기분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입장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 그 사람의 경우에서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서도 나만을, 내 권리만을 앞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크리스찬은 더 큰 권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된 권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전도하는 사람은 몸소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자에게도 저주하지 않게 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크리스챤의 권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9장 4절에서 19절 사이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