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를 꼭 작성해야하나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설교원고를 작성해야하는가? 꼭 작성해야 하는가?
반대로 제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설교마다 원고를 작성합니까? 아니면 원고없이 설교하십시니까? 어떨때는 작성하고 어떨때는 작성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습니다. 수없이 설교를 하는, 한주에 아마 열번정도 설교해야하는 설교자에게 설교원고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 자체가 아마 스트레스일겁니다. “아휴, 나보고 어떡하라고?” 여기 질문에 “꼭”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 “꼭”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요.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지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베를린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쉴라이에르마허도 설교원고를 작성했습니다만 막상 설교할때는 원고없이 설교원고를 거의 외운상태로, 아니면 설교내용이 거의 체화된채로 자유롭게, 애드립이 가능한상태에서 강단에서 설교했습니다. 루터도 어떤 설교는 설교원고가 잘 작성되었고 많은 설교들은 설교개요, 설교아우트라인만 가지고 한 적이 많습니다. 바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설교원고를 작성했지만 원고없이 설교한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꼭” 이라는 표현에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꼭”은 아니어도 그렇다면 설교원고를 작성할 필요가 있는가? 이 왜 우리는 설교원고를 작성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꼭” “매 번” 설교원고를 쓸 필요는없지만 그래도 설교원고를 쓸때 왜 우리는 설교원고를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 설교자들에게 설교원고쓰기는 다소 거부감이 생기는 단어로 정착된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부 설교학교수들이 설교실제 강의실에서 설교원고를 보고 읽는 초년병 병아리 설교실습생들에게 설교원고를 보고 읽는다고 호통을 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원고를 착실히 잘 준비하고 원고에 충실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은 우리 한국 설교상황에서 좀 어눌하고 모자라고 덜 떨어진 지루한 설교자라는 생각을 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고설교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원고를 보고 읽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원고를 보고 읽기”때문에 문제이지 원고를 잘 깊이있게 연구하고 묵상하고 심도있게 다듬어 작성하는것은 문제가 전혀 아닌것입니다. 제 생각에 한국설교자들이 설교에 대해 땀을 뻘뻘 흘리는것은 아마도 원고를 잘 쓰고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완벽한 설교자가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완벽하게 준비하는 수준의 설교자가 될수는 있습니다. 매주 매주 특별히 주일설교는 설교원고를 쓰는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금요철야나 새벽기도까지 원고를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설교자의 설교를 평가하는 한번의 설교라면 주일오전, 속칭 대예배 설교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가장 크게 기대하고 평가하는 담임목사님의 설교는 주일설교입니다.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이고 가장 긴장도가 놓은 예배가 주일대예배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에게 가장 떨리는 설교시간이 역시 주일대예배입니다. 그렇게 부릅시다. 주일대예배를 오후에 드리는 교회도 있지만. 여기서도 저는 “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않습니다. 자유로우십시요.

원고에서 자유로우라는 말이지 원고작성에서 자유로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원고설교나 개요설교를 둘다합니다. 상황에 따라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둘다를 좋아합니다. 일종의 설교의 도구박스(tool box)입니다. 여러개의 도구를 가진 목수는 상황에 따라 이 도구, 저 도구를 꺼내 상황에 맞는 작업을 할수있지만 도구가 충분하지않고 다양하지 않은 목수는 모든 상황에 똑같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억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도구박스에 여러개의 설교사역 방법론이 있습니까? 아니면 극히 제한된 설교방법 도구만 가지고 무리하게 뻑뻑거리는 소리를 내며, 상황에 맞지않게 억지 설교사역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배우셔야 합니다. 고민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교원고작성의 필요한 이유를, 좋은 이유를 더 말해보려고 합니다. “꼭” 원고설교를 매번 할필요는 없지만 원고설교의 장점은 대단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장로교목사이지만 자유교회의 영성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자유롭게, 심지어 강단에서까지 원고라는 기계적인 인간적인 통제없이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그때그때 하실말씀을 제 입에 예레미야처럼 넣어주시는대로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기도원설교자들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거침없이 뿜어내는 문자, 원고의 제약을 초월하는 푹포수같은 말씀, 아! 얼마나 시원시원한지요!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저이지만 원고설교를 장려하고 저 역시 가능한한 원고를 쓰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고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할수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해줍니다.
원고작성을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합니다. 작성을 위해 준비를 해야합니다. 연구를 해야합니다. 기도를 미리미리 해야합니다. 묵상도 미리 끝내야 합니다. 때로 자유설교자들의 변명이 그들의 게으름을 위장할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조금 지루하게 들릴지라도 철저히 말씀준비가 되어 원고가 작성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것이 준비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한말 또하면서 성령의 음성이라고 우기는 설교자보다는 낫습니다. 조용히, 깊이, 묵상하고 묵상을 적고, 삶속에 적용하고 삶속에서 예화를 자연스럽게 찾고, 설교의 메시지와 함께 한주를 살면서 고민하고 적용하고 기도하는 진지한 설교자! 이런 설교자를 우리는 기다리는것이 아닐까요?

설교작성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설교사역이 인문학과 관련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사역이 “글”로써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설교사역이 인문학의 도구가 필요함을 발견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글쓰기”에 대한 인문학의 저술들을 읽기를 적극 권장합니다. 서적에 나가보시면 많은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나와있습니다. 수많은 글쓰기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작가의 책 제목, “칼같은 글쓰기”도 인상적입니다. 이 글쓰기, 작문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들이 있씁니다. 제 유기체적설교학의 관점에서는 낭만주의적 자유로운 글쓰기에 대해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설교사역이 “글”이 됨으로써 설교자들은 또한 글쓰기 방법론만이 아니고 다른 글쓰기의 모델인 “책”들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른 책들을 읽을때 그 내용만이 아니고 그 글쓰기 방법까지 동시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배우게 되는것입니다. 심지어 신문읽기, 인터넷 읽기도, 다른 저술가들의 저술을 읽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글쓰기방법론도 접하게 되는것입니다. 이러므로써 설교자들은 설교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세상과 관련을 갖게 됩니다.

설교원고를 주초에 작성하여 주중에 반복해서 읽으면서 추가하고 편집하고 삭제하고 전달연습을 하고 반복해서 읽고 밑줄을 긋고 난외에 억양표시도 하면서 숙달되면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도 원고에 매이지않습니다. 원고를 가진 자유로운 설교자가 됩니다! 원고작성을 토요일밤에 끝내면 절대로 자유롭지못합니다. 그러나 원고작성이 월요일에 끝나면 주중에 내내 즐겁게 마음 편하게 지낼수있습니다. 이 초고는 구지 대단한 주석작업이나 예화작업을 하지않아도 됩니다. 설교본문을 가지고 주일밤이나 월요일 새벽에 피곤하다고 골아떨어지지말고 미리 매를 맞는 기분으로 골방이나 교회강단에 엎드려 다음주 주일대예배 말씀을 주시도록 성령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성경을 옆에 펴놓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구하고 나의 회중의 아픔과 그들의 문제와 필요를 주님께 아뢰며 이 때 떠오르는 메시지와 생각들을 자유롭게 한두장의 종이에 적는것입니다. 오직 성령, 성경, 설교자, 종이와 펜! 이렇게 한시간 정도 메시지를 구하며 한두장 정도 떠오르는대로 자유롭게 적으면 그것이 첫 샘물의 근원이 됩니다. 이때 원고를 쓰는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자유로운 메모를 하는것입니다. 이 단계가 아주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서 설교자의 독창적인 메시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자료가 홍수입니다. 그러나 독창성은 기근입니다. 이 시작단계, 주님앞에 그저 겸손히 백지로 무릎꿇고 성령의 의지하며 성경말씀과 설교자와 설교청중이 함께 만나는 시간, 그리고 그때 떠오른 말씀들이 설교자의 독창적 메시지의 기반이 됩니다.

그런후 그 자유메모를 가지고 자유글쓰기를 합니다. 형태나 내용을 걱정하지말고 삼십분설교하면 6-8정도로 제한하고 그저 자유롭게 자유메모를 옆에 놓고 자유롭게 원고를 “초고”로 씁니다. 너무 겁먹지 마시고, 용기를 내서 쓰십시요. 항상 기억할것은 우리 삶에 완벽은 항상 존재하지않는다는것 완벽을 향해 얼마만큼 완벽하게 노력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원고를 못쓰는 설교자들의 말은 두렵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주저하다 원고를 못쓰고 강단에서는 더 두려움에 떱니다. 설교사역은 잘 준비되지않으면 피를 말리는 사역입니다.
창조성을 요구하고, 깊은 사상을 요구하고, 뛰어난 전달을 요구하는등, 작은교회, 큰교회 목회자 할것없이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사역입니다.
제 유기체적 설교학이 도움을 드리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너무 설교방법론, 형태론에 걱정하지말고 내용에 우선하여 설교원고를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형태는 설교자의 독창적 설교내용에 발전되어 나옵니다. 내용이 먼저이고 형태는 후입니다. 이것이 유기체적 설교학의 핵심내용입니다.

한시간 정도 기도하고 메모하고 한두시간정도 첫 설교원고 “초고”를 작성하는것이 원고설교사역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것은 저는 월요일에 끝내실것을 권합니다. 전 주일밤이든. 매를 미리 맞는것이 스트레스를 적게 줍니다. 아차피 설교하실것, 설교준비해야할것이면 미리 미리 준비하는 훈련을 하십시요. 그리고 이 설교원고를 프린트하여 매일 한두번씩 읽으십시요. 그리고 필요한 부분에 독서를 하고, 추가하고, 삭제하고, 문장을 다듬고, 전달을 연습하십시요. 이러면 설교준비가 아주 아름다운 한편의 예술창작이 됩니다. 다시한번 말쓰드리면 우리 인생에 완벽은 없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노력할수는 있습니다. 한주간 이렇게 미리 준비된 설교는 수많은 예화를 거저 일상의 삶에서 거둡니다. 대화, 독서, 경험, 관찰을 통해 예화사전을 일부러 찾아보거나 인터넷을 헤매는 시간없이 삶속에서 예수님처럼 준비된 메시지에 예화들이 달려와 붙습니다! 아, 아름다운 설교창작의 과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