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젠 소금처럼 삽시다.
본문 - 마태복음 5:13

  여러분, ‘백수’라는 말을 잘 아시지요? 사전에 ‘백수’라는 말을 찾아보니까 그 뜻이 9가지나 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는 ‘돈 한 푼 없으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을 말하기도 하고, ‘99세의 연세에 계신 어르신,’  ‘허옇게 센 머리,’ ‘온갖 짐승,’ ‘큰 형수님,’ 등도 모두 한자를 달리해서 ‘백수’라고 씁니다.
  최근에 백수라는 말을 또 하나 배웠습니다. 볼라벤과 같이 태풍이나 강한 바람으로 인해 벼 이삭에서 수분이 급속히 빠져나가 하얗게 말라버린 것을 백수라고 합니다. 이 때 백수라는 말은 알맹이가 사라진‘희 이삭’을 말합니다. 이런 백수현상은 보통 이삭이 패기 시작한지 1일에서 3일 사이에 강한 바람을 맞을 때 일어나는데, 습도가 65% 이하로 적고 온도가 25도 이상일 때 태풍이 지나간 다음 강한 햇볕이 쪼이면 벼 이삭의 숨구멍을 통해서 수분이 급격히 빠져나가 이삭이 말라버립니다. 지난 태풍으로 이런 백수피해를 입은 농가들이 지금 논을 갈아엎어버렸다는 뉴스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지요? 겉으로 볼 때에는 알이 찬 벼이삭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이삭 안에 알맹이가 없다면, 그 벼를 추수한들 쌀을 수확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실제로 버려진 소금덩어리,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덩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소금은 대부분 바닷물로 만든 소금을 사용합니다만, 이스라엘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는 암염이라고 해서 돌처럼 생긴 소금덩어리들이 있습니다. 광산에서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을 캐듯, 깊은 산 속에서 암염덩어리를 캐내 그것을 정제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소금으로 사용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지역에는 자갈과 같은 암염덩어리들이 산이나 들에 널려 있습니다. 양이나 염소와 같은 가축들이 필요한 염분을 대부분 그런 암염덩어리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또는 풀을 뜯다가 암염덩어리를 핥아 염분을 섭취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가축들이 핥아 먹은 암염덩어리는 염분이 다 빠져나가버렸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길가에 그냥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에게 밟히는 작은 돌맹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암염덩어리, 소금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염분이 다 빠져나가면 그 암염덩어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돌맹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라. 세상에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소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별로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다이아몬드나 황금과 같이 값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소금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소금은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싸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까지도 일어났고, 대부분의 고대국가들은 소금을 얻기 쉬운 곳에 건설되었습니다. 또 옛날 로마 군인들에게는 월급을 소금으로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의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라는 말은 소금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소금은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서 소금과 물의 균형이 깨지면 탈수현상으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지난 해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사람들의 음식이 굉장히 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왜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음식을 짜게 해서 먹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찬을 많이 먹기 때문에 우리 몸에 필요한 염분이 충분히 섭취되는데 미국 사람들은 반찬을 먹는 음식문화가 아니어서 햄버거나 스테이크와 같은 주식에다가 소금을 많이 넣어서 먹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필요한 소금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짐승의 뒤를 따라가서 암염을 찾았다고 합니다. 동물들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으로 된 바위를 찾아가기 때문에, 짐승의 뒤를 따라가면 소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바로 우리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요한일서 5:12절에서 증언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예수님의 생명 안에 사는 우리는 세상에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거짓과 죄악으로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이 세상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한 생명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갖고 사는 우리가 세상에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입니다.

  소금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소금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은 방부제 역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냅니다. 그리고 그 짠 맛은 모든 음식에 들어가서 맛을 내 줍니다. 여러분,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비록 내 손으로 소금을 직접 넣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만들어 먹는 모든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가 있습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이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들이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별로 맛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맛을 잃어버린 세상이기에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살맛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맛이 나는 세상으로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맛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복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눴습니다. 8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말씀입니다. 사람은 가치관에 의해서 행동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끌려 살게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도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신앙의 가치관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8복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이 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통쾌하게 웃으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해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울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가진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고 그런 사람이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리까지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배부른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배부름을 넘어서 창고에 가득가득 쌓아놓고 살아야 마음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한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으로도 충분히 선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부패한 모습을 바로 직시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득과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투쟁하고 싸워서라도 그것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것을 포기하고 내가 손해볼지라도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압니다. 세상은 어려움이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백성으로서 마땅히 가야할 길임을 알기에 평안함보다는 박해받는 삶을 살면서도 기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에 생명의 전달자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살맛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나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라 하늘나라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방법대로는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8복에서 말씀한 가치를 따라, 8복을 진정한 복으로 알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8복에서 말씀하신 그 하늘의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세상의 가치를 더 귀중하게 여기며 산다면 우리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복을 우리의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을 삶의 가치로 삼고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8복은 저 멀리 하늘에서나 가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말씀이고, 오늘 우리의 삶의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에 들어가 세상에서 그 말씀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8복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8복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8복의 삶으로 세상 속에 녹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라,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소금이 됩니다.

  인도의 영성신학자 앤서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1931-)가 쓴 <바다로 간 소금인형>이란 글에, 자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목말라하는 소금인형이 나옵니다. 소금인형은 늘 목이 말랐습니다. 그 목마름은 무엇으로도 해갈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소금인형은 벅찬 기대를 갖고 바다를 향해 여행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바다에 도착한 소금인형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를 보고서 황홀해졌습니다. 소금인형을 용기를 내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이 말을 들은 바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게 직접 들어와 보렴.” 이 말을 들은 소금인형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바다에 자신의 두 발을 담궜습니다. 그러자 이내 발이 녹아내렸습니다. 발이 녹아내리자 소금인형은 발이 사라지면서 아파왔습니다. 그럼에도 바다의 파도는 다시금 출렁거리며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두 다리가 녹아버렸습니다. 더 아팠습니다. 이어 바다는 그의 허리에 밀려왔고, 그의 허리 역시 곧 녹아버렸습니다. 더더욱 아팠습니다. 그러자 바다는 다시 출렁이며 그의 가슴을 녹였습니다. 바다는 다시 더 큰 물결로 다가왔고, 마침내 그의 목과 머리가 바다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소금인형은 작은 알갱이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소금인형은 기쁨에 찬 환호성을 외칩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나는 바다였지요, 내가 바다야!”

  소금인형은 자신의 모태인 바다를 찾고 바다에 잠기는 순간 그는 비로소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들어가 세상 속에서 녹아져야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맛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녹아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시대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면 세상에 물들까봐 두려워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이 세상 속에서 녹아지려 하고 있습니까? 소금이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져야 합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녹아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녹아지면 나는 없어져버린다는 두려운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의 표현대로 한다면 십자가 안에서 녹아져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명예, 우리의 아집, 우리의 편견, 우리의 잘못된 사고, 세상을 닮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 등등이 십자가 안에서 녹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녹아지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녹아지려 하지 않고, 녹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맛을 내지 못한 소금,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사고나 습관, 버려야 할 욕망이나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녹여 맛을 내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닮아가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나라에 신앙인이 부족해서 세상이 험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이 있기 때문에 썩지 않습니다. 물론 바닷물이 다 똑같은 농도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3.5%를 잡으면 될 것입니다. 그 3.5%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3.5%만 있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 17%나 된다고 합니다. 3.5%만 있어도 세상은 썩지 않을텐데, 17%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음에도 왜 우리 사회는 그렇게 암울해져가고 있습니까? 정치권에 기독교인이 적기 때문에 정치가 그렇게 혼란스럽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 18대 국회에서는 전체 의원의 32%인 97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치러진 19대 국회에서는 그 숫자가 늘어 국회의원의 40%(120명)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면 전체인구의 기독교인 비율보다 훨씬 높은 32%의 기독교인이 있었던 18대 국회가 국민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는 국회였습니까? 40%나 되는 19대에서는 더욱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국회만이 아닙니다. 정부부처를 보십시다. 지난해 초 통계에 의하면 장차관급 이상의 고위공직자 중 기독교인 비율이 62%였다고 합니다. 고위 공직자 10명 중 6명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었습니까? 온갖 비리에 휩싸인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어디 정치만 그렇습니까?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등등... 기독교인이 없어서 우리 사회가 그렇게 힘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많은데, 8복을 진정한 신앙의 가치요 삶의 최고 가치라고 인정하며 그 가치를 따라 사는 기독교인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세상은 출세하는 사람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고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소금처럼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됩니다. 자신을 세상 속에 녹여내는 사람만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밝힌 뿐’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이라는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밟히는 것이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이 아니라, 맛을 잃어버림으로 밟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은 절대로 밖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 소금은 아직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음식점에 출입문이 열리더니,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빠의 손을 이끌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의 너절한 행색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걸인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동냥을 하러 온 줄로 안 주인은 불쾌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그럼에도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못 보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그때서야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리에 앉자 아이가 주문을 합니다. “저어. 아저씨! 순대국 두 그릇 주세요.”
  주인아저씨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 좀 와 볼래.”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아저씨는 손짓을 하며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합니다.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거져 먹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 먹겠다는 뜻입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은 대답합니다. “알았다. 그럼 빨리 먹고 나가야한다.”
  잠시 후 주인아저씨는 순대국 두 그릇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앞을 못 보는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통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떠서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아빠 이제 됐어. 어서 먹어.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으니까. 어서 밥 떠. 내가 김치 올려줄께.”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인아저씨는 조금 전 자기가 했던 부끄러운 일로 인해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걸인과 같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세상을 품고, 그 세상에 들어가서 8복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녹아짐으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다이아몬드나 황금처럼 값나가는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값싼 소금일지라도, 세상에 들어가 녹아짐으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든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정말 값진 사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소금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살지 마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