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되어라, 평화 만드는 사람이여!
본문 - 마태복음 5:9


  1928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켈로그-브리앙(Kellogg-Briand)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미국의 국방장관인 프랭크 켈로그(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 주도하였다 하여 ‘Kellogg-Briand 조약’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다면 ‘부전조약’(不戰條約)입니다. 이 조약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15개국이 모여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구상에서 전쟁을 완전히 없애자는 뜻에서 맺은 조약입니다. 그 조약을 맺은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한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어떤 이유로도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쟁하는 것까지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멋진 조약이었습니다. 그래서 11년 후인 1939년까지 전 세계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했고, 이 조약을 주도했던 미국 국방장관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80여년이 지금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십시다. 그 이후에 지구상에서 전쟁이 사라졌습니까? 그 조약에 가입했던 독일과 일본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그 이후에도 지구촌 구석구석은 어마어마한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조약을 주도했던 미국이 개입했거나 미국이 일으킨 전쟁 또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베트남 전쟁도 그렇고, 걸프전도 그렇고, 크고 작은 전쟁들에 미국이 개입했습니다.

  분명 이 땅에서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구촌은 계속해서 전쟁일 일어났고,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명이야기』(Story of Civilization)라는 책을 쓴 듀랜트 박사 부부(William James Durant와 Ariel Durant)의 연구에 의하면, 지난 인류 역사 3500년 중에서 전쟁이 없던 기간은 불과 286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의 92%는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이 없어지기를 갈망하는데도 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큰 범주보다도 ‘우리’라는 작은 삶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내가 손해를 보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었을 때에는, 내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상대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분노하거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내가 잘못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 권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싸움을 걸기도 하고, 손해 본 그것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이 내가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되면 싸움을 걸고 투쟁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싸움을 걸게 만들기도 합니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국의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통해서 서로가 더 많은 것을 손해 본다 하더라도, 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내 것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합니다. 개인적인 싸움이든 국가 간에 전쟁이든 모든 것은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인류의 비극입니다.

  이런 비극은 이미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들은 아담과 하와가, 그리고 그의 자손들이 평생을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꼬드겼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따먹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것을 따먹지 않는다고 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모자람도 없고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에 마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결국 첫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고, 그 결과 더 행복해지거나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우리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무언가 더 가져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이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싸움과 전쟁의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을 상실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가인의 살인사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 대한 기록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바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실존적으로 싸움과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얻고자하는 것을 얻으려는 어리석음 반복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는 결코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는 평화와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전쟁만이 아닙니다. 싸움을 통해서도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욕심과 이기심은 싸움과 전쟁을 통해서 그것을 얻으라고 속삭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속삭인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여!’ 우리는 이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냐 하는 물음 앞에 우리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자기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기가 야망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는 말로는 ‘살롬’입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굉장히 다양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번영하는 것, 마음에 평화가 깃들이는 것, 사람들 사이에 화목한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 등의 모든 것이 이 ‘살롬’이라는 말 한마디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면 ‘살롬’이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에도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위로해 줄 때에도 ‘살롬’이라고 말합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모든 상황에서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싶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너희가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거든 가장 먼저 평안하기를 빌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10:12)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서는 가장 먼저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살롬을 만드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로 평안을 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말로만 평안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평안을 이루어주는 사람, 행동으로 화평을 도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복되어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여,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원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이 땅에 평화를 만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전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우리 주님의 평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 온갖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그 마음이 부패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는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나라들이 그런 것처럼,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탐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기키지 위해서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14:27)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안은 그 안에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평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아름다운 평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포장지일뿐입니다. 포장지가 아름답고 예쁘다고 그 내용물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겉 포장지는 참 예쁜데 그 안에는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거짓으로 포장합니다. 여러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노벨평화상 후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는 1938년과 39년, 2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명되었습니다. 미국의 여류문학가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은 1938년에 히틀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틀러가 평화상을 수상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독일에서 모든 경쟁 요인들, 그리고 투쟁 요인들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평화를 의미한다.” 유대인들과 민주인사들, 그리고 좌익 요소들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역사를 되돌아볼 때 히틀러를 ‘평화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된 평화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의 야욕을 위해서 엄청난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주신 평안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안은 세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평안입니다. 전쟁 중에서도 기쁨이 솟아나는 평안입니다. 순교와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실패와 패배 가운데서도 하늘의 용기로 충만한 평안입니다. 그 어떤 인생의 풍랑 중에서도 기쁨의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경험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는 1736년 1월 25일 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기 10일 전인 그 날 밤, 그가 탄 배는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하늘이 터진 것처럼 쏟아지는 폭우와 배를 뒤집어버릴 것만 같은 커다란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그 폭풍우 가운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모라비안 성도들이었습니다. 25명 쯤 되는 그들은 선교사조차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그 폭풍우 속에서도 너무나도 평안하게 -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평안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런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떨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진대, 세상 그 무엇이 - 그 어떤 상황이 두렵거나 무섭겠습니까? 성경은 그런 평안이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갈라디아서 5:22)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얻게 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맺으며, 평화를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린도후서 5:18)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방법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당하심으로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주셨고, 우리에게도 그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평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세상에 평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수없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다며 6자회담이니 4자회담이니 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목적은 한반도 평화라고 하지만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보니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G20세계정상회의는 세계 경제를 통해서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다는 명목을 갖고 있지만, 모두가 자기 나라의 경제이익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UN에서는 세계평화를 위한다고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에 부응해서 레바논이나 아이티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고, 남수단에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위해서 지금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유지군을 통해서 평화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정치적인 노력이나 경제적인 노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럴진대 군대를 파견해서 평화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평화는 그 어떤 거대한 집단을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수단이나 경제적인 방법이 다 동원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평화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슴 깊이에서 체험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는 사회는 평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류의 시초부터 탐욕과 이기심이 평화를 깨뜨리는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탐욕과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되지 않으면 평화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탐욕과 이기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될 때에만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복되어라, 자신을 희생함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여! 그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희생하지 않고는 평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먼저 챙기려 한다면 그 가정에는 평화가 깃들이지 않습니다. 엊그제 나주에서 아주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집에서 잠자고 있던 7살짜리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를 23살 청년이 이불 째 납치해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든 것은 그 아이의 엄마가 새벽 2:30까지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가정주부가 새벽 2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내팽겨쳐 놓고 게임에 빠질 수가 있습니까? 그 엄마는 게임을 하고 싶은 충동과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가정을 빠져나감으로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어린 아이가 평생 씻지 못할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가정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희생처럼 희생하지 않으면 가정에 행복이 깃들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희생하지 않고 내 욕심을 먼저 챙기려고만 한다면 나는 그 회사에서 결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다른 사람이 하기 싫은 일을 내가 먼저 처리해 놓고, 다른 사람이 힘들다고 하지 않으려 할 때 나도 비록 피곤하고 힘들지만 내가 희생하여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그곳에 하늘의 평화를 깃들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곳곳이 마찬가지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겠다고 하는 곳에는 평화가 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권리를 찾는다고, 내가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곳에도 평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평화가 만들어지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처럼,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흉년에 그랄 땅으로 피신을 갔던 이삭의 가족들이 그 곳에서 큰 부자가 되자,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파 놓았던 우물을 모조리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 아니라 물을 구하기 힘든 환경이기에, 우물은 생활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욱이 이삭과 같이 양이나 소를 기르는 목축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마실 물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가는 곳마다 물을 얻기 위해서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우물을 판다고 해서 다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파 놓은 우물을 오랫동안 그대로 놔두어야 했습니다. 양떼나 가축이 많아질수록 우물을 더 많이 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미워해서 이삭 소유의 우물을 다 메워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이 메워버린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팠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못된 그랄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그것이 우리 것’이라고 우깁니다. 우물을 메워버린 것도 미워 죽겠는 판에, 고생해서 다시 파 놓았더니 ‘우리 것’이라고 우기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번에도 아무 말하지 않고 그 우물을 그 못된 그랄 사람들에게 줘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다시 팝니다. 우물을 판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님에도 이삭을 불평하지 않고 다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그 못된 그랄 사람들이 와서 그것마저도 자기들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것도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는데, 이번에도 또 와서 자기들 것이라고 빼앗아갑니다. 이삭은 그것마저 줘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우물을 파서 물을 얻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그랄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몇 번 싸웠을 것입니다. 싸운 정도가 아니라 그랄 사람들과 전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다툼과 싸움 대신에 희생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권리임에도 싸우지 않고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물을 다 포기한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창세기 26:24) 그리고 그 후에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면 물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내 유익과 권리를 포기했더니 하나님께서 갚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러니 우리 서로 동맹을 맺자. 너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다.’(창세기 26:28-29) 평화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며 포기하는 삶을 살았던 이삭을 통해서 이방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고, 이삭이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뭔가 엄청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만드는 삶을 산다면,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세상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도 이삭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