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되어라, 박해 받는 사람이여!
본문 - 마태복음 5:10-12


  북한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고백하는 고백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사들의 수칙’이라는 이 고백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수 믿는 사람은 천대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2. 칭찬 받는 것보다 욕먹는 것을 먼저 배워라.
  3.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인민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서로 눈물을 닦아 주며 주위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4.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
  5. 성경이라는 잣대로 자기 먼저 살아가야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천대받고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삼겠다.’는 첫 번째 고백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날도 죽음을 각오하고 박해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 박해 받는 성도들을 돕고 위로하는 사역을 하는 오픈도어선교회가 있습니다. 그 선교회에 따르면 가장 박해가 심한 나라가 북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고, 하루에 482명이 박해 가운데 순교를 당한다고 합니다. 이는 3분에 한 명 꼴로 순교를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한 시간에도 약 20명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박해 받는 사람이여!” 세상에 박해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과 삶이 평안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박해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박해 받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하십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교회가 굉장한 박해를 받았고, 교인들 역시 숱한 박해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이나 중국과 같이 공산화되어 폐쇄된 사회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 박해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신앙의 자유가 제한된 이슬람권 사회에서도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박해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해 이란에서는 33살의 유세프 나다르카니(Yousef Nadarkhani) 목사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를 도와 변론하던 변호인단의 대표마저도 징역 9년에 10년 동안 변호사의 자격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박해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 속에서 누구나 교회에 나올 수 있고, 불교나 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직장을 잃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해 받는 사람이 복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말씀일까요?

  디모데후서 3: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우리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시대에도 박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박해라는 말은 단순히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명예가 실추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통제를 받거나 자유롭지 못한 것까지를 다 포함합니다. 그러기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지금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우리가 받는 모든 제약과 어려움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역사상 신앙인에 대한 박해가 사라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건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건하고 희생적인 사람을 보면 감동을 하고 칭찬은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사람을 닮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를 위대한 성자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사십시오.’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줄행랑을 치고 말 것입니다. 저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런 차원 높은 가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더욱 큰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자신은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자녀들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선한 양심을 소유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부를 잘 하는 것,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서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직장에 빨리 취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 가운데는 직장에 취직을 하지 못하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가치를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마음에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취직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은 모두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을 닮아가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잘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한 우리에게 ‘박해’라는 말은 남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복되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여.” 박해 받는 모든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의’라는 말은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11절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세상으로부터 거스림을 받을 때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박해를 받는다고 다 복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박해일 때에만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뭔가 실수하거나 뭔가를 잘못 판단해서 직장의 동료들이나 상사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욕심이나 욕망 때문에 미움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의를 위해 받는 박해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분들 가운데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하는 고난이나 박해는 결코 복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충고를 해 준답시고 충고를 하는데, 그 사람의 형편이나 마음의 상태를 무시한 채 충고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신앙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얼마 후에 우리는 추석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족이 전부 예수 믿는 가정이라면 추도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제사 문제로 가족이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 나만 예수를 믿는다면 제사음식을 준비하거나 제사 지내는 자리에 간다는 것이 마음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믿으니까 제사 지내는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가족들 모임에 늘상 빠져버리고, 다른 가족들이 힘들게 음식 준비하는데 가지 않는다면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예수 믿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어머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은 종갓집입니다. 어렸을 때 보면, 한 달에 거의 한 번 꼴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가을 묘사 때가 되면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하얀 도포를 입은 집안 어르신들이 50-60분 정도가 집안에 모였습니다.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1월부터 어머님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님이 더 일찍 교회에 나오지 못하신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1년에도 수없이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교회에 나가면서 제사음식을 준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종갓집 맏며느리가 교회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머님은 그해 첫 주일 교회에 다니시면서부터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제사음식입니다. 종갓집 맏며느리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고 그 제사음식 만드는 것을 안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제사음식을 다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음식을 만드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빨리 이 제사 끝내고 교회식으로 추도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사음식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리기 전에 부엌에서 제사음식에다가 십자가를 그립니다. 십자가를 그린 제사상 음식을 귀신들이 와서 먹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20여년 동안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아버님께서 제사를 포기하시고 추도예배 드릴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첫 추도예배를 드릴 때 고향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교인들이 함께 오셔서 예배를 드렸는데 어느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 집이 제사를 포기하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제사음식을 준비하면서 어찌 마음이 편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거부하지 않으시고 기도하시면서 추도예배 드릴 날을 기다리시더니 20년 만에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종손이신 아버님까지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열심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6월 한 달 동안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대상 설문조사를 한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무엇이 가장 불편했느냐는 질문에 1위를 차지한 것이 ‘종교 전도행위’였습니다. 자신은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고 지하철이나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결코 전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어 전도를 방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잘못된 열심이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전도에 방해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한 때 말이 많았던 절에 들어가서 땅밟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밟기를 하는 것을 비디오로 찍기도 하고, 사찰 안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불교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서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조차도 조롱하는 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경고해 줍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결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따르다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것을 의를 위한 박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의를 위해서 받는 박해가 아닙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진실되게 따르기 위해서 받는 박해를 말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삶을 닮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살려 할 때 우리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신앙의 방법으로 사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한 모습이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둠을 거부합니다. 죄악과 더러움이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깨끗한지 더러운지 분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을 비추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은 결코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치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정직하지 않게 사는 사람은 정직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사람을 세상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친구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더라도 우리는 거짓말을 버리고 진실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더라도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너만 뭐 그리 잘난 척을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바르게 사는 것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신앙인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야근을 하지 않으면서도 야근을 하는 것처럼 해서 야근수당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분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했었는데, 신앙인답게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야근하지 않을 때에는 야근출석카드를 찍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손해 본 것이 월 20-30만 원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1년으로 따지면 몇 백만 원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쓰는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서류를 거짓으로 기재해야 했습니다. 10만 원짜리 어떤 물건을 샀다면 영수증을 12만 원짜리로 끊고 하는 방식으로 사무실 공공비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만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만 정직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근무하는 사람이 모두 동의를 해야 하고, 다른 방법으로 공공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내야 했기에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살려다 보면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양심을 물질적 이익과 바꿔치기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신앙인이란 누구입니까? 누구를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결코 세상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천국백성이다.’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마칩니다.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그리고 팔복의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인데, 그들에게 주어질 상급 역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팔복은 모두 천국백성에게 주신 복입니다. 천국백성들이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천국백성은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자랑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천국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기 위해서 생명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잃으면서도 신앙을 따랐고, 어떤 사람은 직장과 삶을 포기하고서 떠돌이(디아스포라) 생활을 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내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그것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었습니다.

  미국 네바다 주에 후버 댐(Hoover Dam)이 있습니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건설한 것으로 콜로라도 강을 막아 세운 댐입니다. 댐의 길이는 441m로 그리 길지 않지만, 굉장히 깊은 골짜기를 막아 댐을 건설했기 때문에 댐의 높이가 무려 221m에 달합니다. 이 댐을 막음으로 해서 미드호(Lake Mead)라는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는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댐에서 공급되는 물과 전기는 사막 위에 세워진 라스베가스와 로스앤젤레스에 공급되고 있습니다.
  이 댐의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이 댐을 건설하던 중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곳에서 희생당한 이유는 사막에 장미꽃을 피우고, 골짜기에 생명의 강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죽으심이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막과 같이 죽음의 땅에 살던 우리 인생에게 장미꽃이 피어나게 했고, 사망의 골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강이 흘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갈수록 사막화되어가는 세상에 장미꽃을 피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망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물이 흘러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닮은 삶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는 삶을 통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백성답게 사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죄로 물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 박해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처럼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을 닮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다시금 선언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며 좁은 길을 걸어가십시다. 박해받는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천국백성인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임을 알고 기쁘게 여기여 그 길을 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하늘의 큰 상급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상급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 무엇보다 클진대, 어찌 그 상급을 놓치겠습니까? 박해받는 천국백성에게 주실 그 상을 어찌 포기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