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등경 위에서 비추는 빛
본문 - 마태복음 5:14-16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것은 영국 화가인 윌리엄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가 1854년에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무신론자였던 헌트는 27살인 1851년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진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인간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헌트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고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빛’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그런 믿음을 이 그림 속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손에 들고 계신 등불은 우리 인간들의 어둔 마음을 비춰주시고 밝은 삶의 지혜를 주시는 예수님 당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배경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새벽이 가까워지는 때입니다. 밤이 지나면서 밝은 아침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아직 별이 희미하게 보이고 달빛도 남아 있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등불을 들고 한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아직도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빛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뒤편에 있는 사과나무는 에덴동산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에덴동산과 같은 밝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등불을 들고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기까지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음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두드리고 계신 문에는 담쟁이와 잡초들이 뒤엉켜 있고, 그 문은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폐쇄되고 고집스런 인간의 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우리 인간의 게으름과 방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문 위에 도끼를 그려놓았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노동윤리를 보여줍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는 사도 바울의 엄중한 경고와 같이 게으름과 방종을 끊어내고 근면한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두드리고 계신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빛이 필요한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결단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즉 우리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헌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이 뒤덮인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세상은 환하고 밝은 세상이 아닙니다. 물론 원래부터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세상은 더없이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창세기 1:3-4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빛을 만드셨고, 그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너무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반복해 하셨고, 세상 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 세상은 어둠이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지금은 어둠의 공중 권세 잡은 자 - 사탄의 지배를 받는 어둠의 권세 아래 속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면 어둠의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밤을 밝히는 휘황찬란한 불빛들 저 이면에서 죄악들이 얼마나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환 한 것처럼 보입니다. 밝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거짓된 밝음을 앞세워 그 뒤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한복음 1:5, 9) 그리고 예수님 당신도 스스로를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실 하늘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말씀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부터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순간 이미 소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소금이 되었으니 ‘세상 속에 들어가 우리를 녹여냄으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인데, ‘맛을 내는 소금이 될 것이냐 아니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선택해야 한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빛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모두 빛입니다. 그 빛을 ‘세상을 향해 비추느냐, 아니면 말 아래 감춰둠으로 세상을 향해 비추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신앙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은 결코 숨길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더욱이 빛을 비추는 교회는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빛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이라면 그 빛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군대에서 야간훈련을 할 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담배를 피우면 8km밖에 있는 적들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 불빛은 수십km밖에 서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태울 때 나는 그 작은 불빛을 수십km 밖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산 위에 있는 동네의 집들에 불을 밝혀 놓았다면 어찌 그 동네가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등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작은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은 작은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모여 함께 빛을 비추면 큰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동네에 강렬한 써치라이트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보름날 동네 어귀에서 달집을 태우는 것처럼 커다란 불을 놓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집 안에 켜놓은 작은 등불들이 창문을 통해서 하나 둘씩 비춰지기 때문에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은 등불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비추기 위해서 큰 등불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등경 위에 두면 그 등불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 말 아래 둔다는 것은 감추어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입니다. 그 속에다 등불을 감춰놓으면 불빛이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등불을 켜놓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말 아래 감춰놓는다면 등불을 켜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등경’은 등불 받침대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집안 구조로 보면 방 하나에 등불 받침대인 등경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옛날에 방안에 불을 밝히기 위해서 호롱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리고 호롱불보다 조금 더 환하게 하기 위해서 호야라고 하는 등불을 켜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호롱불은 방바닥에 받침대를 세우고 그 위에 올려놓았고, 호야는 기둥에다 못을 박아서 거기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벽에다가 돌출되게 등경을 만들어놓고 그 위에다 등불을 얹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 등불이 온 방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그렇다고 그 등불이 오늘날의 전구와 같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등불들이 각 집마다 밝혀져 있으면 멀리서도 그 불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집에는 방 하나에 등불을 하나씩만 켜 놓는다 하더라도 그 마을 전체가 그렇게 불을 켜놓으면 그 주변이 제법 환하게 될 것이고, 그 빛은 멀리서도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은 등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써치라이트와 같이 거대한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등불을 통해서 우리의 집안을 비추기만 하면 그 빛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잘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은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뭔가 큰 빛을 비추기 위한 큰 등불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가로등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집안을 비추는 빛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안 모든 사람’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 가족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등불을 비춰주면 됩니다. 멀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비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양이 하는 일이지, 등불이 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등불을 그저 방 안에서 집 안 사람들에게 불을 밝혀주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큰 등불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가를 찾아가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구제한 후에는 ‘나 이렇게 구제를 많이 했네.’ 하고 나팔을 불고 다녔습니다. 금식한 후에는 금식한 티를 일부러 내기 위해서 초췌한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심지어 왼쪽 팔이나 이마에 경문이라는 것을 차고 다녔고, 옷술을 크게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경문을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고, 옷술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길거리에 다닐 때에도 그렇게 치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구제할 때에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바른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그렇게 사는 것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건에 앞서 우리 스스로 골방에서 경건해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곳에서조차도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내 삶의 자리에서 언제나 경건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 작은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춰주겠다고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그 빛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비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작은 삶에 먼저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 방을 먼저 환하게 밝히는 빛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빛이 세상으로 새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세상을 비추려고 하면 가식이 되기 쉽습니다. 더 잘 보이고 싶은 우리 인간의 욕구로 인해서 거짓된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치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결코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집 안 사람들에게 등불을 비춘다는 것은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8복의 삶을 통해서 천국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닮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천국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말씀하신 8복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빛은 그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진실된 삶으로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5:9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그렇게 드러납니다. 착함으로 드러나고, 의로움으로 드러나고, 진실함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8복의 정신으로 살 때 우리는 세상에서 분명 손해를 보며 살게 됩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8복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복임을 알고, 그 복 안에 살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8복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8복의 가치와 8복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통쾌하게 웃으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해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울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가진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고 그런 사람이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리까지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배부른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배부름을 넘어서 창고에 가득가득 쌓아놓아야 하고, 더 많이 움켜쥔 채 살아야 마음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한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으로도 충분히 선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부패한 모습을 바로 직시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득과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투쟁하고 싸워서라도 그것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것을 포기하고 내가 손해 볼지라도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압니다. 세상은 어려움이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백성으로서 마땅히 가야할 길임을 알기에 평안함보다는 박해받는 삶을 살면서도 기뻐합니다.

  이렇게 사는 데 어찌 우리 빛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말하는 슈바이쳐 박사도 그렇고, 인도 캘커타의 성자인 마더 테레사도 8복의 정신으로 산 사람입니다. 8복이 최고의 가치요 복임을 알고 그 가치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빛은 더 밝은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량만큼만 빛을 비춰줄 뿐입니다. 크든 작든 그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큰 방을 비추는 등불은 큰 방을 비추기에 적당할만큼 조금 더 클 것이고, 작은 방을 비추는 등불은 크지 않아도 됩니다. 크든 작든 등불은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됩니다.

  미국에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있었습니다. 그 서커스단이 뉴욕에서 공연을 할 때입니다. 공연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 정전이 되었지만, 그 서커스를 관람하고 있던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전된 바로 그 시간에 조련사 한 명이 네 마리의 호랑이를 조련하며 쇼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쇼가 철창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호랑이가 관중들을 위협할 일은 없었지만, 철창 안에서 호랑이를 조련하던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관중들은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커스장 안은 정전으로 칠흙같이 어두운데, 무대 위 철창 안에서는 조련사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호랑이들을 향하여 명령하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1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장내에 전기가 들어와 환하게 불이 켜졌습니다. 관중들을 일제히 일어서서 호랑이를 조련하던 조련사에게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캄캄함 중에서도 호랑이는 조련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쇼가 끝난 후에 기자회견 도중에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런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호랑이를 조련할 수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조련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뚜렷하게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사람으로 살 때에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전에는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에베소서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말 아래 감추어둔 등불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치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아무 쓸모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과 같이, 말 아래 감추어놓은 등불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꺼진 등불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감히 나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제 빛의 자녀답게,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세상에서 빛으로 사십시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에 비추어줌으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시다.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