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경: 롬11:25-36

찬송: 264장

저자: 이삼규 목사

 

 

오늘은 말씀의 결론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의 비밀인 복음을 소개하면서 결론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카운슬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에 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것을 깨닫는 우리 인간들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찬양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네 주에 걸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이 왜 하나님의 지혜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남은 자의 구원(1-12절)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1장 1절에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 근거를 먼저 찾고 있습니다.

1절 하반 절을 보면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만큼 정통성을 자랑하는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그가 철두철미하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놈도 하나님이 선택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와합 왕이 이세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엘리야가 볼 때 눈 씻고 볼래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아마 엘리야는 이 말씀을 듣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만 믿음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는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 천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엘리야의 예를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이 말씀은 엘리야 시대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멀리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렘 23:3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겔 14:22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미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습 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찌라

습 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 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교회 안에 있다고 하여 다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저는 우리 식구들이 다 구원받기를 소원합니다. 불행하게도 남은 자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많이 섞여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은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 였지만 자기 민족의 구원문제를 긍정적으로 접근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습니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 못 박기까지 하였지만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패망의 넘어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예수님을 거절한 범죄)으로 인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만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은 버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기 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기 나게 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치 있는 자극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더 잘합니다. 나쁜 의미에서 시기심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건전한 시기심은 사람들을 더욱 분발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시기심을 갖는 것은 안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시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12절을 봅시다.

롬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회복되어 그 구원받은 수가 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무궁한 것인지를 깨달으셨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우리는 이런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2.자긍하지 말라(13-23절).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롬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그는 자나 깨나 자기 민족을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더욱 이방인 선교에 힘을 쓴 것은 자기 골육으로 하여금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경륜,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역시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을 확신 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롬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첫 뭉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 특히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거룩했으니까 그 남은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논리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뿌리는 조상들을 가리키고 가지는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참 감람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는 가지 얼마가 꺾여지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통 원예의 기술인 접붙임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감을 따려면 어떻게 합니까? 고염나무에다가 좋은 감나무 가지를 꺾어서 접붙입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접붙이는 원리를 잘 몰라서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성지에 흔한 나무인데 바울이 그런 정도의 상식이 없을 리 만무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접목의 기술이 아닙니다. 그의 목적은 다른데 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명확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사막과 광야에 있었고 들장미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그들이 참 감람나무의 부요함과 비옥함에 접붙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중요합니까? 가지가 중요합니까? 뿌리가 없다면 가지는 곧 말라 없어집니다. 그럼으로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은 자긍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9-20절을 봅시다.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롬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어떤 사람이 꺾이웁니까? 비록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지 아니하면 꺾이웁니다.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높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두려워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방인들이 자긍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접붙임을 받은 우리들이겠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롬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이 말은 믿으면 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 가운데 거하면 접붙임을 얻습니다. 유대인이 꺾이운 것도 이방인이 접붙여진 것도 모두 믿음의 표준에서였습니다.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누구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도 자긍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절대 높은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롬 11:24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돌 감람나무가 좋은 감람나무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 기술로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나무라면 접붙이는 것이 쉽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꺾기도 하시고 붙이기도 하십니다. 원가지라고 해서 자긍해서도 안 되고 접붙임을 받았다고 높은데 마음을 품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우리를 접붙이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3.구원의 비밀(25-36절)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말하면서 그것을 배경으로 우리에게도 구원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밀이란 “mystery"로써 신비롭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이 비밀을 모르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모두가 신비롭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비밀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구원 문제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는 상호 작용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오해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유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가룟 유다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궤변 자들은 가룟유다는 공로자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차라리 나지 아니하면 좋을 뻔 하였다고 말씀하셨을 까요? 넓게 볼 때는 가룟유다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감에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개인적인 책임은 결코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악처가 성자를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면 그녀가 악처여서 소크라테스가 성인이 되었다면 그녀에게 상급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결과가 좋았다고 죄를 인정하지 않을 없는 것입니다. 성공회 신부였던 이재정 전 의원이 대선자금을 받아서 전달하였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그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행동 때문에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죄를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은 진심으로 백성들 앞에서 사죄하는 반성의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대선에 공헌을 하였다 할지라도 불법은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적인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해서 섭리적인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북한에 있던 성도들이 월남해서 교회들을 세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김일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 부흥의 일등공신은 김일성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책임은 그대로 인정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적인 역사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완악해진 이스라엘의 책임을 물을 때 세 가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하).

이스라엘이 다 예수님을 거역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이 거역을 하였지만 그 가운데도 남은 자는 있다는 것입니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4.15 대선을 앞두고 물갈이를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썩은 정치인들이 있지요. 그렇다고 다 썩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잘 믿었다고 하면 기독교가 이방에 그렇게 쉽게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일어나니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혜 즉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더러 완악하게 된 것은 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즉 지혜라는 것입니다.

3)이스라엘이 믿음 없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지금은 말썽을 부리고 있지만 원래 그런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씨로써 훌륭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은 뉘우침도 없고 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사랑하시기 시작하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아 헤매지 아니하고 대상을 창조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 만한 자로 만들어서 사랑하십니다.

칼빈선생님은 이러한 은혜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깨달을 진데 바울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지 않고 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믿기는 쉽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능력은 많이 구하는데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도 필요하지만 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가 심오하게 드러난 것은 구원의 사이클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되어 이방인에게로 넘어왔고 다시 이방인들이 믿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시기심이 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구원의 사이클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