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나티스트 분열: '건네 준 자들' Vs.
'고백자들'> 어거스틴 교회론의 핵심은 이른바 도나티스트 논쟁과 연계시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나투스주의(Donatism)는 주후 308-311년 어간에 카르타고의 주교 선출을 둘러싸고 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교파 분열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멘수리우스(Mensurius)가 사망한 후 그의 보좌 사제로 있던 캐킬리안(Caecilian)이 카르타고의 새 주교로 선출되자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80인의 누미디아 지역 주교들이 캐킬리안이 대박해시기에 배교자, 즉 성경책을 이교도 행정관에게 '건네 준
자'(traditor)였던 압투그니의 펠릭스(Felix of Abthugni)에 의해서 성별되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반대파는
캐킬리안 대신 순교 신앙을 전수했다고 믿은 마조리누스(Majorinus)를 주교로 선출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주교가 카르타고 지역을
치리하는 대치 국면이 시작되었는데, 마조리누스의 뒤를 이어 근 40년 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도자가 도나투스(Donatus,
313-355)였으며 '도나티스트'(Donatist)라는 이름은 그에게서 유래했다.
그 후 북 아프리카 지역에는
친(親)로마적인 '가톨릭교회'와 아프리카 고유의 토착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도나투스파'가 5세기 초 반달족이 침입할 때까지 근 100년 가까이
치열한 난투극을 벌이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교파 분쟁이 최고조에 다다른 시점에 혜성처럼 나타난 가톨릭교회의 지도자가 어거스틴이었으며
도나투스파는 개인적으로 마니교에 이어 두 번째로 잠재워야 할 어거스틴의 난적이 되었다.
가톨릭교회와 도나티스트의
대립은 관용파(혹은 '廣교회파', latitudinarian)와 강경파(혹은 '狹교회파', rigorist) 사이의 반목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뿌리는 훨씬 더 깊고 길었다. 주후 303-304년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치안(Diocletian)과 막시무스(Maximus)는 기독교회와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이들 이교도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관청에 건네주어서 소각시키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을 박멸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 '성경 양도'를 배교의 표시로 삼았다. 결국 수많은 신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성경을 관계 당국에 '건네주는 일'(traditio,
handing over)이 다반사로 일어났을 때, 북 아프리카 특유의 억센 기상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순수 신앙을 끝까지 고백하면서 장렬하게
순교해갔다. 배교자들을 '건네준 자들'로 지칭했던 반면에 이들 순교자들을 '고백자들'(Confessors)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캐킬리안에게 성직 안수를 했던 카르타고의 주교 압투그니의 펠릭스가 '건네준 자'의 진영에, 이웃 주교
티비우카의 펠릭스(Felix of Thibiuca)는 '고백자'의 진영에 서서 참수형을 당했다. 티비우카의 펠릭스와 마조리누수, 도나투스 등
신앙의 지조를 지켜 순교자의 반열에 섰다고 자부하는 후예들은 '도나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시류에 영합하여 목숨을 보존한 신자들은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으로 분열되어 양 진영 사이에 격렬한 분쟁이 계속되었다. 흥미롭게도 도나티스트와 가톨릭 사이의 대치와 분열은 지리적으로
누미디아와 카르타고 사이의, 인종적으로 아프리카 토착민들과 로마국적을 가진 서구인들 사이의, 경제적으로 가난한 소작농들과 부유한 지주들 사이의,
극한 대립으로 경계가 그어졌다.
로마 정부의 공권력을 힘입어 가톨릭교회는 도나티스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심지어
살상도 서슴지 않았으나 그럴수록 도나투스파는 북 아프리카 토착민들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가톨릭 신자보다 숫자가 더 많게 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은 자기 교회만이 흠도 주름도 없이 신앙의 순결성을 지켜 온 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가톨릭교회를 불결하고 이중적인 배교의 무리들이라고
혹평했다. 이들의 순수성 주장은 도에 지나친 나머지 흔히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져 통제 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져갔다. 이 점에서 "상부로부터
가해지는 교리중심적인 박해는 역으로 아래로부터 나오는 폭력적인 저항에 의해서만 저지된다"는 피터 브라운의 지적은 옳았다. 극렬 도나티스트들
중에는 서컴셀리온(Circumcellion)이라는 떠돌이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의 테러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단의
남녀 광신도들이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며 약탈과 방화, 파괴와 살상 등을 마구잡이로 자행했다. 서컴셀리온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전사'라고 자부했지만
그 실상에 있어서는 농촌 지역을 배회하며 지주에 대한 농노의 저항과 폭력을 부추기는 폭도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마침내 도나티스트 주교들에게
조차도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 정부에 군사적인 개입을 자청할 정도였다.
<어거스틴의
도나티스트 다루기> 주후 396년에 히포의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간곡하게
설득했다. 그는 대중 찬송을 작사해서 일반 대중이 도나티스트 교회의 기원과 오류를 이해하도록 돕는 한편, 특히 「도나티스트들을 논박한
세례론」(De baptismo contra Donatistas, 400)과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De unitate Ecclesiae,
405)라는 책을 써서 도나티스트들의 오류를 비판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 분열주의에 직면해서 내세운 교회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앞에서 언급한 카르타고의 주교 선임을 둘러싸고 두 진영이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이 도나티스트 논쟁의 발단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말해서 '재세례'(rebaptism)와 '재성별'(reordination)의 필연성으로 요약된다. 다시 말해, (1) 배교해서 죄를
지은 사제가 베푼 세례식은 부당하므로 깨끗한 사제에 의해서 재세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2) 배교해서 죄를 지은 주교가 안수해서 성직 서품을
받은 사제는 깨끗한 주교에 의해서 재성별 되어야만 하는가?
이 두 문제와 관련해서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성이
교인들의 거룩성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경을 당국에 건네줘 배교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된 행위로 인해 이미 그리스도의 은총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받은 혹은 베푸는 세례와 성만찬, 즉 성례전 역시 무효가 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배교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은 캐킬리안의 성직은 무효이며 절대로 카르타고의 주교가 될 수 없다는 논지였다. 단지 성직 안수뿐만 아니라
배교자들이 베푼 세례 역시 무효가 되므로 세례를 다시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세례와 같은 성례전의 유효성은 이를 집전하는, 인간 사제의 주관적 거룩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 사제인 그리스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반박했다. 즉 세례의 객관적인 타당성은 교회와 성례전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었다. 참된 교회의 표식인
거룩성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창설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요지였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의롭게 하신다"(「Sermones」292. 6). 결국 도나티스트들의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근거한 비난과 정죄는 성도의
양심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표식인 '사랑'을 훼손하는 일이었고, 그들의 분열주의는 참된 교회의 표식인 교회의 '일치성'을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거스틴은 무엇보다도 배교자들과 같은 죄인들은 교회의 신자가 아니라는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을 심각하게
논박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알곡과 쭉정이가 '혼합된 교회'(permixta ecclesia)를
강조함으로서 죄인들을 교회로부터 배제시키지 않으려 했다. 교회라고 해서 100% 참 신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 신자도 한데 뒤섞여 있다.
마치 야곱의 한 쪽 다리는 성하고 다른 한 쪽 다리는 절뚝거린 것처럼, 한 그물 안에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걸려 있듯이, 포도즙
틀에 찌기와 순수 포도즙이 뒤섞여 있듯이, 노아의 방주에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동승했던 것처럼, 솔로몬이 재판했던 두 창녀들처럼 거짓과
증오로 압도된 신자와 진실과 사랑으로 가득찬 신자가 한 집 교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전 역시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주관적 우수성과 상관없이 이 성례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유효성에 따라 거룩성 유무가 결정되어질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틀이 가톨릭교회로 돌아 올 경우 재세례나 재성별식을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지상
교회는 완전한 천상 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거스틴은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보이는 교회'와 종말에 이루어질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함으로서 시간과 역사 안에서는 누가 참 신자인지 알 수 없고 오직 역사의 종점에 가서 하나님 한 분만 아신다고 했다.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인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역시 참신자와 거짓 신자를 일도양단 식으로 분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선악을 함께 품는 모호성을 피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교회 안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들이 땅의 도시에 속한 무상한 일에 분주하게 빠져
있을지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반면에 하늘의 것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을 즉시 칭찬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때로 멸망의 자식들이 모세의 보좌
위에 앉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것에 관심을 두는 분들은 마음을 들어 하늘을 향하십시오. 그리고 하늘의 말씀에 몰두한 분들은 마음을 땅으로
향해야만 합니다"(「Enarrationes in Psalmos」 51.6).
<사랑의 증거인 교회 일치를
향하여>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에게 가장 경계했던 것은 그들이 가톨릭교회에 끼치는 물리적 손상이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일치성과 보편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분파주의였다. 양자 사이에는 교리적 차이보다 도나티스트들의 신앙적 우월성 주장이 훨씬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교회의 본질로서의 사랑 역시 균열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도나티스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실로 이 세례가 당신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바깥에서 당신 안에 존재할
수도 있는 그런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례를 받을 때 이것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는 평화의 유대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세례를 받을 때 성경에 기록된 대로 '허다한 죄를 덮게 하는' 사랑을 받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Epistulae」185.10.43).
"성례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결혼 예복이 아닙니다. 오직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일 뿐입니다(딤전 1: 5). 이것은 기도나 세례나 성만찬, 죄 용서, 금식, 특별한
은사가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유하기에'(Christum habere) 결정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합니다"(「Sermones」 90.5-6; 「Enarrationes in Psalmos」 4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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