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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평야와 넓은
궁전>
사노라면 가끔 옛 친구를 만날 때가 있다. 수십 년 전에 함께 공부하고 뛰놀았던 친구를 대개 처음에는 알아 볼
수 없다. 모진 세월의 풍상 속에 너무도 변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새록새록 옛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의 이름이며, 그의
버릇이며, 그가 살던 집, 그와 다투었던 일, 수업 시간에 함께 끌려 나가 벌섰던 일, 실타래가 풀리듯이 오만가지가 생각난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죽마고우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났어도 어떻게 그에 대한 일들이 어제처럼 생생히 잊히지 않는 것일까? 그 친구가 통째로 내 마음에
들어 왔을 리가 만무한데 어찌하여 그에 대해 내가 경험한 것들이 줄줄이 기억되는 것일까?
『고백록』제 10권에서
어거스틴은 기억의 신비를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을 통하여 ‘외부적인 것’에서 ‘내부적인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의 길고도 먼 ‘마음의 훈련’(exercitatio animi)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억은 과거의 경험에 대한
회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마음 그 자체, 즉 의식, 무의식, 자의식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기억이 ‘광대무변한 평야나 궁전’
혹은 ‘창고’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억 여행’은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기억’으로 가는
여행의 단계들>
첫째로, 감관들을 통하여 마음에 영상으로 찍혀 있는 기억이 있다. 옛 친구에 대한 기억의 경우이다. 그
친구의 꾀죄죄하고 키 작았던 생김새, 그 친구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 어머니가 새우젓 장사였기에 그랬던지 언제나 풍겼던 비릿한 짠 냄새, 그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 맛, 바윗돌만큼이나 투박하고 단단했던 그 친구의 손, 이른바 오감을 통하여 지각된 그 친구에
대한 영상들이 고스란히 내 기억 속에 간직된 것이다. 그와 관계된 모든 사물들 그 자체는 외부에 그대로 있었지만 다만 나의 감관들을 통해 그
영상들만이, 마치 카메라가 짤깍 사진을 찍듯이, 내 기억의 창고에 촬영되었다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둘째로, 학문에서
배운 모든 지식이 기억의 내부 속에 축적된다. “그것들은[학문 지식들은] 사물의 영상들이 아니라 실체(학문) 자체들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나,
논리학이나 다른 여러 부분의 문제에 대하여 배운 나의 지식은 그대로 내 기억 속에 간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백록』10, 9, 16).
논리학에서 던지는 세 가지 질문들--“그것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은 이 질문들을
구성하고 있는 음성에 대한 영상뿐만 아니라 그 말이 의미하는 본질까지도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의 의미, 즉 감각적 잔상이 아닌
지식의 본질 그 자체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일까? 어거스틴은 이러한 학문적 지식은 우리가 그것을 배워 알기 이전에도 이미
우리 마음 어느 곳엔가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본래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어거스틴은 배운다는 것은 상기(想起)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리하여 우리가 결론 내리기는 감각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존재들)들, 즉 아무 영상 없이도 물 자체(본질)를
우리 안에서 알게 된다는 것은 기억 속에 이미 있었으나 흩어지고 혼돈된 상태로 있는 것들을 사고의 과정을 통하여 거두어 모으는 것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두어 모은 것을 우리는 주의를 쏟아 질서 있게 정리하여 기억 안의 가까운 곳에 간직하여 두게 됩니다. 그러면 전에는
숨겨져 있고, 버려져 있고, 흩어져 있었던 것들이 마음에 낯이 익어 쉽게 떠오르게 됩니다”(『고백록』10, 11, 18). 이처럼 상기를 통하여
이미 기억의 밀실에 전존(前存)하고 있었던 사물의 의미와 본질을 기억해 내는 것은 수학과 기하학에서 말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와 ‘선’의
원리와 법칙들까지도 포함한다(『고백록』10, 12, 19).
셋째로, 기억은 또한 기쁨이나 슬픔, 욕망, 두려움과
같은 마음의 감정 상태까지도 저장한다. 기억과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이지만 기억은 마음이 이러한 감정을 체험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기억한다. 예컨대 현재 마음은 몹시 기뻐하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기억은 과거의 몹시 슬펐을 때를 기억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에는 기쁨이 있고
기억에는 슬픔이 있을 때 어찌하여 마음은 자기 안에 있는 기쁨 때문에 즐거워해도 기억은 자기 안에 있는 슬픔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현재 육체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과거 육체의 고통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과 육체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별반 놀랄
일이 못되지만 마음과 기억의 경우 같기 때문에, 어떻게 마음은 기뻐하는데 기억은 슬펐던 일을 슬퍼하지 않고 동시에 그냥 기억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기억이 마음의 위장과 같다면 기쁘고 슬픈 경험은 달고 쓴 음식과 같다”고 본다(『고백록』10, 14, 21).
기쁘고 슬픈 경험이 기억 안으로 한 번 들어가면 위장에 들어가 있는 음식이 그 맛을 느낄 수 없듯이 그냥 하나의 관념으로서 간직될 뿐이라는
것이다.
넷째로, 현존하지 않는 것, 즉 망각에 대한 기억이 있다. 마음은 자기 자신을 기억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망각까지도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에 간직하고 망각한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망각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망각이란 ‘기억의 결핍’ 혹은 ‘기억의 부재’ 현상으로서, 망각이 내 기억 속에 현존하는 한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야 함에도 어떻게 내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분명히 망각을 기억하고 있을 때 무어라고 말해야 옳을까? 내가
기억하는 것이 내 기억 안에 없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아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망각이 내 기억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 두
가지 대답은 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망각을 기억하고 있을 때 망각 그 자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망각의 영상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망각이 영상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그 영상을 가능케 하는 선재 조건, 즉 객관적 실재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망각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기억된 인상들을 다 지워버리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자신의 영상을 기억에 기록해 두어서 망각을
기억할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어거스틴은 이렇게 인간의 기억이 이미 기억한 것, 즉 사물의 영상을 지워버리는 망각까지도 기억한다는 사실에
경탄한다(『고백록』10, 16, 25).
<기억 속에 계시나 기억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다섯째로, 어거스틴은 마침내 행복과 진리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기억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지 않고서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눅
15: 8)은 그 은전에 대한 영상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완전히 망각해버린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의 질문은 정점에 이른다. “행복에 대한 지식이 기억에 있다면 우리가 한 때 행복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꼭 묻고
싶은 것은 행복이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먼저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고백록』10, 20, 29). 인간인 이상 누구나 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행복 그 자체가 인간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 행복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 기억의 어떤 부분에 기억되어
계신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기억 속에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영상도 아니시며, 마음의 감정이
관념으로서 기억되듯 하는 분도 아니시며, 마음이 그 자신을 기억하는 자리, 즉 기억 안에 있는 마음의 자리에도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물체의 영상도 아니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우리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 무엇을 원하거나 두려워할 때, 무엇을 기억하거나 망각할
때, 혹은 그와 같은 것을 느낄 때의 감정 등--도 아닙니다. 또한 당신은 마음 자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마음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부터 내 기억 안에 거하기로 택하시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왜 당신이 기억
안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계신 것처럼 당신이 거하시는 곳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당신을 생각하게 될 때 내 기억 안에서 당신을 찾아뵙기 때문입니다”(『고백록』10, 25, 36).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거스틴의 대답은 모호하기만 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억 속에 처음 알려진 순간부터 인간의 기억
속에 계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만,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초월해서 알려지실 뿐이므로 인간의 기억을 뛰어 넘어 계신다고 봐야 한다.
인간의 기억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송하게도 인간의 기억 안에 임재해 계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의 기억은 하나님의
신비를 포착하기에 역부족이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접촉할 수 있는 통로요 접촉점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도
오래 되셨지만, 그렇게도 새로운 ‘아름다움’이 되시는 당신을 나는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보시옵소서. 당신은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나 밖에
나와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고백록』10, 27,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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