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경박한 시대에 다시 읽는 어거스틴(5):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어거스틴은 『고백록』제 11권에서 창조 이전의 시간에 대해서 묻는 자들, 즉 마니교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이것은 ‘CREATIO EX NIHILO’,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어리석은 물음이다. 시간도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인 까닭에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는 질문은 우문(愚問)일 뿐이다. 어찌 시간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 때, 즉 창조 이전이란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창조가 이루어진 후에야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 양상이 가능할 뿐이지, 아직 시간이 없었던 그 때, 즉 창조 이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성은 피조 세계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영원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이다. 시간은 유시유종(有始有終), 시작과 끝이 있으며 항상 머물러 있지 못하고 덧없이 소멸되어 가는 것인데 반하여, 영원은 영원한 현재로서 항상 머물러 있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간성 혹은 초시간성을 본질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피조 세계의 실존 양태를 규정하는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면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에게 내가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고백록』11, 14, 17). 시간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은 완전한 모름과 완전한 앎 사이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 물어볼 수 없고, 완전히 다 알면 물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있음’을 통하여 파악될 수 있는데, 시간은 객관적으로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냉철히 분석해 보면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곤혹스럽다. 시간의 세 축을 이루는 과거는 이미 흘러지나갔기에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하나만 있는 셈인데 그것도 연장, 즉 틈이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과거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 만일 현재가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가지 않고 항상 현재 상태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시간이 아닌 영원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현재가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틈새를 갖지 못한 채 과거로 이행해가야만 한다면 현재도 결코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어떤 길이가 없이 잽싸게 과거로 흘러 들어갈 현재를 지나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로 없어지고 만다. 시간이란 ‘없음’, 즉 ‘비존재’(non esse)로만 흘러지나감으로서 ‘있다’고 말할 수 있기에 어거스틴은 고민한다.         <인간의식 안에서 체험된 것으로서의 주관적 시간 이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시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거스틴의 천재적 공헌은 인간 심리의 내면에서 체험된, 주관화된 시간 이해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어거스틴은 시간이 물체의 운동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하루란 태양의 운동 그 자체인가 혹은 그 운동이 완성된 시간의 길이인가 혹은 그 둘 다 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백록』11, 23, 30). 만일 첫째 것이라고 할 경우, 태양이 겨우 한 시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그 운동을 끝마쳐도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둘째 것이라고 하면, 즉 태양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하루로 간주할 경우 한 시간에 한 바퀴만 돌아도 그 한 시간이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정말 하루가 되기 위해서는 태양이 궤도를 24번 돌아야만 하기에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양자 모두라고 할 경우, 첫째와 둘째 경우처럼 될 것이므로 모순에 빠진다. 결국 물체의 운동이나 그 정지 상태도 시간 안에서, 시간에 의해서 측정하기 때문에 물체의 운동이 시간 측정의 유용한 단위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시간을 구성할 수는 없다. 시간이 이와 같이 양화(量化) 혹은 공간화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시간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측정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시간의 질화(質化) 혹은 내면화를 들고 나온다.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미래, 이미 흘러갔기에 없는 과거, 코앞에 현전(現前)해 있기는 하지만 어떤 틈새가 없이 너무도 신속하게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현재, 분명히 있으면서도 실상은 없는 이 세 시제는 도대체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은 시간의 객관적 실재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나 인간의 마음 안에서 주체적으로 체험되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시점하에서만 바로 인식될 수 있다. 미래나 과거는 다 비존재요 무성(無性)에 빠져 있다면 오직 존재와 유성(有性)은 현재에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 명확히 드러나 밝혀진 것은 미래의 시간이나 과거의 시간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영혼(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고백록』11, 20, 26). 시간이 인간의 의식 안에서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현재’로, 현재는 ‘직관으로서의 현재’로, 미래는 ‘기대로서의 현재’로서 각각 체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의 측정도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아직 있지도 않은 미래로부터 아무 연장이 없는 현재를 지나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로 흘러 들어간다. 있지도 않는, 미래, 현재, 과거를 어떻게 잴 수 있을까? “오, 내 마음(영혼)아, 나는 네 안에서 내 시간을 재노라”(『고백록』11, 27, 36).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아 없기에 미래라는 시간을 측정할 수 없지만 미래에 대한 현재 우리 의식의 기대는 측정할 수 있다. 가령 주일 아침에 창립 기념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성도가 “오늘 예배 시간은 평소보다 두 배 정도는 더 길 것이다” 하고 측정하는 것은 현재의 마음에서 앞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 기대한 것을 측정하는 것이다. 과거 역시 이미 흘러지나갔기에 과거 그 자체의 시간을 잴 수는 없지만 과거가 우리의 마음에 남겨 놓은 인상만큼은 측정할 수 있다. 가령 전방 GOP에서 보낸 군대 생활이 무척 길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의 사건이 현재의 우리 기억에 남겨놓은 잔영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도 틈새가 없기에 측량할 수 없지만 우리 목전에 있는 현실을 순간적으로 직관함으로서 잴 수 있다. “우리 마음은 ‘기대’하고, ‘직관’하고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기대하는 것은 직관하는 것을 통하여 기억하는 것으로 흘러 지나간다. 미래가 아직 있지 않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가 이미 존재해 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현재에 있지 않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존재해 있다. 현재라는 시간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아무 연장(길이)도 없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마음의 직관(주의 작용)은 지속이 되고 그것을 통해 ‘있을 것’(미래)은 ‘없어질 것’(과거)으로 이행하여 지나간다. 그러므로 현재(아직) 있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긴 것이 아니다. 미래가 길다 함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긴 것뿐이다. 또한 이미 있지 않은 과거도 길수는 없다. 과거가 길다 함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긴 것뿐이다”(『고백록』11, 28, 37).         <혼의 분산과 혼의 집중 사이에서>         어거스틴의 시간론은 그의 행복론 혹은 구원론과 직결된다. 그는 시간을 ‘영혼의 분산 혹은 팽창’(distentio animae)으로 본다. 분산 혹은 팽창이란 말은 정반대 말인 ‘영혼의 지향성’(intentio animae) 혹은 ‘영혼의 집중’(extendo animae)과 대조시킬 때 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시간은 미래, 현재, 과거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우리 마음이 산산조각 분산 혹은 팽창되어 있는 것에 다름 아닌데, 다시 영혼을 일자(一者)되신 하나님께로 지향하여 집중시킬 때 영혼의 분열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상하기 짝이 없는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은 미래에 대한 기대는 점점 더 짧아지기만 하고 과거에 대한 기억의 영역은 점점 더 길어지다가 마침내 그 기대의 전부가 사라지고 말 운명 속에 산다. 마치 80분짜리 녹화물을 시청할 때 녹화 분량이 이미 지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S(시작)와 E(끝)로 표시된 막대그래프 사이에다 검은 색으로 표시해서 흰색 분량은 점점 더 줄어드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개인에서부터 온 인류와 전 역사의 운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쌓이다가 마침내 완전소모의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무상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은 영혼이 분산되어 갈기갈기 찢겨져 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 혼을 집중하여 연합하게 될 때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다.         어거스틴이 시간을 객관적 양으로서가 아닌 인간 의식에 각인된 질적 체험으로서 해석한 것은 참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어거스틴의 시간론으로 보건대 개인마다 시간 체험이 각각 다를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의 심리적 시간 이해는 보편적 시간의 질서보다, 특히 과거사의 체험사와 관련해서 특수한 개인의식에 남겨 놓은 잔영, 즉 주관적 체험만 부각시킴으로서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의 질서를 도치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김원우의 소설 『짐승의 시간』이 암시하듯이, 예컨대 과거 30여년 전에 경험한 가혹하고 치욕적인 시간 체험은 겨우 1년 전의 사건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오랜 기억으로 남아 객관적인 시간의 질서를 왜곡시키거나 혼돈시킬 소지가 있지 않을까? 결국 시간을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주관화 혹은 내면화시킬 수 있는가는 하나의 논쟁거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