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교의 이원론을 넘어서>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폭정으로 전 세계의 유대인 1/3이나 되는 6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2001년 9월 11일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세계 무역 센터(WTC)에서 일하던 죄 없는 시민 오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삐뚤어진 의지와 사악한 행위로 인해 생기는 악을 ‘도덕악’으로 부를 수 있다. 2004년 12월 쓰나미(津波)로 인해 수십만 명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 아시아에서 사망했다. 태풍과 홍수, 해일, 지진, 등등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자연 재해로 인해 생태계와 인간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자연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악이나 자연악을 불문하고, 악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며 악은 도대체 무엇일까? 젊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의 기원과 본성 문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가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서 방황했던 이유나 신플라톤주의에로의 전향, 마침내 기독교에로의 개종 역시 악의 문제에 대한 고뇌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악의 문제에 직면해서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이원론에 심취했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와 영지주의가 뒤섞인 혼합종교였다. 게다가 마니교는 영성과 합리성 혹은 과학성을 적절히 배합한 절충종교로서 엄격한 금욕주의와 나름대로 우주의 신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꾀함으로서 꽤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다. 마니교의 근저에는 무엇보다도 이원론적 사고가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즉, 우주를 두 가지 대립되는 원리와 세력 간의 갈등과 투쟁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선신과 악신,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팽팽히 대치한 결과 온 우주 역사는 두 세력이 서로 뒤엉켜 혼합되었는데,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빛의 세력을 해방시키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마니교의 이원론에 따르면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은 우리의 본성이나 의지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고 우주를 사로잡고 있는 악신과 어둠의 세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 된다. 악이 인간 자신으로부터도 아니고 선한 하나님으로부터도 아니고 빛의 왕국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어둠의 왕국으로부터 온다는 주장은 합리적인 것을 열망했던 어거스틴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악은 악신과 어둠으로부터, 선은 선신과 빛으로부터 각각 온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을 이렇게 선에 대립한 어떤 만질 수 있는 독립된 실체로 여기는 이원론적 견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운명론적이며, 더욱이 악까지도 철저히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신관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이 우주와 세계를 하나님과 악신의 이원론적 대결로 보지 않으며, 만일 악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다고 본다. (물론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셨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다스리실 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마니교적 이원론의 입장에서처럼 악과 어둠을 축출하는 상태에서 인류의 선과 구원의 회복을 볼 경우, 이 세상에서의 싸움과 폭력은 끝이 없을 것이며 세상은 점점 더 큰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이 다 좋은 것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까지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통제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결정적 대안은 무엇일까? 이것은 자연스레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있음) = 선, 무(없음) = 악 ⇒ ‘악 = 선의 결핍’>

        여기에서 저 유명한 어거스틴의 ‘악 =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는 이론이 나온다. 마니교와 결별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발출설 이론에 영향을 받아 악을 존재와 선의 결핍 상태로 이해하게 되었다. 태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빛은 태양으로부터 떨어지는 거리에 비례해서 빛의 조도가 희미해지고 약해지게 된다. 마침내 태양의 저 끝 편에는 어둠이 있지만 이 경우 어둠은 결코 따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에 불과할 뿐이다. 태양 없이 어둠이 없으며, 어둠은 단지 태양빛의 결핍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맹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악이 아니라 단지 시력의 결핍에 불과할 뿐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기본적으로 다 선하다. 그렇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적 창조관으로 볼 때 악이란 존재와 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무’(nihil)로 빠져 들어가는 경향성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우주만물이 본래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면 존재는 ‘무’로 되돌아 갈 가능성과 경향성을 항상 갖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무’(無)로 되돌아갈 경우 당연히 우리의 ‘유’(有), 즉 존재와 선은 결핍되거나 손실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악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립하는 독립 실체가 아니라 본래 선하게 창조된 존재와 그 선성(善性)이 결핍, 손실, 혹은 왜곡된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악이 어떤 ‘적극적인 동인’(動因, efficient cause)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결핍 원인’(deficient cause)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방심, 주위 산만, 두려움, 이기심, 충동, 등등의 왜곡된 의지에 의해서 더 좋은 가능성으로부터 덜 좋은 가능성으로 떨어지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사랑의 질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은 인간의 선한 의지가 왜곡되고 부패해서 최고로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서 더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할 때 생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랑의 대상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의지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한 의지에 있어서도 외부에 그 어떤 악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의지의 결핍, 즉 의지의 왜곡 그 자체가 동기가 될 뿐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 = 존재와 선의 결핍’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이 ‘악 = 선한 의지의 결핍’이라는 실존론적 차원으로 다시 연결된다. 결국 정리하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존재(있음) = 선’, ‘무(없음) = 악’이 되며, 악은 반드시 선한 존재에 기생(parasitic) 혹은 공생(symbiotic)하는 것이 된다.

        어거스틴의 악의 이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미학적인 것이다. 마치 타일에 있어서 검고 어두운 부분이 전체의 미와 조화에 기여하듯이 악도 부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주 드라마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적이고 제한된 시각에서 보면 인생이 불공평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이고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결국 선하고 정의로운 것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생을 대장간을 방문하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대장간에는 위험한 연장들로 가득하지만 대장장이는 이 연장들을 유익하고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 세상에도 악과 고통이 그치지 않지만 하나님은 결국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종말론적 낙관론인 것이다.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악으로부터도 더 좋은 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악을 허락하신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적 악 이론의 明暗>

        확실히 악의 기원과 본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우리가 냉엄한 현실 속에서 매일 경험하는 악의 폭력성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미흡한 듯이 보인다. 가령 나치즘의 광기와 폭력을 단지 ‘선의 결핍’ 혹은 ‘선한 의지의 결핍’이라고 보기에 그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때로 쓰나미나 지진이 가져오는 재앙도 존재와 선의 결핍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너무나 약하다. 더욱이 히틀러가 저지른 도덕악이나 때로 쓰나미나 지진이 일으키는 자연악이 우주 전체 그림의 심미적 아름다움에 일조를 가한다는 생각도 결코 현실적이지 못하다. 세상 끝 날에 가서 하나님이 모든 악으로부터 궁극적인 선을 이룩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낙관론 역시 현재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의 악의 이해가 모든 종류의 악과 고통에 만병통치 식의 해결책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이 악을 창조주 하나님에 대립된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당하는 것으로서 설명한 것은 창조 신앙과 존재하는 만물의 선성을 끝까지 붙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유진 테셀(Eugene TeSelle)은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어거스틴의 이론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종류의 악을 분석하고 해명하는데 여전히 적실성(relevance)을 가진다고 주장한다(Augustine, 24-26). 가령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단지 피부 색깔이 희지 않다는 사실 하나를 온전한 인간이 되기에 뭔가 부족한 결핍 혹은 열등 요인으로 간주함으로서 인종차별주의(racism)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 또한 남성우월주의자들은 단지 남성이 아니라는 사실 한 가지를 어떤 직능을 떠맡기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서 성차별주의(sexism)를 합리화시킬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와 다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능력이 부족하다며 소외시키는 능력주의(ableism)나, 동식물을 비롯한 생태계 모두가 인간의 이기적 목적과 필요성 때문에 존재한다고 보면서 인간의 유용성에 미치지 못하는 대상은 모조리 결핍되어 있다고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현대 사회 심리학자들의 ‘상대적 박탈 이론’(the relative deprivation theory)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가지 사회 변동이나 혁명, 등을 분석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결국 어거스틴적인 악의 이론은 그 본래적 의도와 상관없이 여전히 오늘 인류가 안고 있는 숱한 악의 문제를 조명하는데 큰 빛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