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경박한 시대에 다시 읽는 어거스틴(2): "어거스틴의 행복론"

 

 

 

  <무상한 인생, 행복은 어디에?>

        98년 1월, 꿈에도 그리던 내 박사학위 논문의 구두시험이 통과되었다. 타고난 둔재인지라 꼬박 3년을 투자해서 어렵게 쓴 논문이었기에 묘한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게도 완벽을 기하느라 정성을 다한 논문이었건만 부심 두 분의 지적은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다. 그러나 논문은 통과되었다. "Congratulations! Dr. Kim!" 교수님들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악수를 건네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건만 오히려 까닭 모를 허무가 전신을 감싸왔다. 'Ph. D.' 이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지난 8년 동안 가족들을 희생시켜 가며 그토록 고생해왔는데 왜 기쁨 대신에 힘이 쭉 빠지는 허전함이 엄습해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순간 박사 과정 중 어거스틴 세미나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전까지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무상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도 늘 안달이지만, 일단 가졌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진짜 행복은 못 얻으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나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는,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을 얻는데 있다. 그랬다. 학문에 미쳐서 박사 학위 하나만 겨냥했을 때 나는 그것이 내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 결코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을 힘겹게 잡았어도 그 기쁨은 잠깐 뿐, 또 다른 소원이 옛 소원을 밀치고 들어왔으며 박사 학위도 별 것 아니었다. 하나의 어려운 숙원을 이룬 것일 뿐,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참 행복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종류의 사랑, 'caritas' 對 'cupiditas'>

        어거스틴의 신학은 행복의 신학이다. 주후 386년 기독교로 개종한 뒤 몇 달 만에 집필한 「De beata vita」(행복한 생활)에서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행복 문제를 제기한 이후 그의 주관심은 아무도 낚아채 갈 수 없는 참 행복에 있었다. "누구나 행복하기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De beata vita」 2.10). 이 명제가 모든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공리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직 철모르는 아기가 손에 불을 갖기 원한다고 할 때, 비록 불을 수중에 넣었다고 할지라도 고통과 불행을 느낄 뿐이다. 이 보다 더 복잡한 경우를 들어보자. 한 여성이 오랫동안 숙망했던 자리, 즉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몸에 안겨다 줄 수 있는 지위에 올랐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는 이 지위가 이 여성의 인품이나 성격, 능력에 잘 맞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그토록 염원했던 것을 얻었기에 잠시 동안은 행복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자리가 자신의 성품이나 능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그 얻은 것이 참된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올라가야지만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 여성의 과거 믿음도 잘못된 것이고, 실상에 있어서도 그 올라간 현재의 자리 역시 행복을 주지 못한다. (아, 오늘 한국 대통령의 모습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 '외견상의 행복'과 그것을 획득했을 때 느끼는 '진짜 행복'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자기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상들이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 원하는 대상들을 추구한다고 해서 쉽게 잡히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그 대상들의 오고 감을 도무지 우리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막상 얻었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쉽게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 부나 명예나 인기나 권세나 연인이나 그 어떠한 대상도 얻지 못할 실패의 염려와 얻은 후 상실의 두려움 없이 지속적으로 붙들 수 없다. 이렇게 염려와 두려움은 행복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이며, 무엇보다도 상실의 가능성이 있는 대상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갑작스런 질병 때문에 우리의 삶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는,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 품으로 떠날 수 있는,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두려움이 상시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 행복해지기 원한다면 어떤 운이나 우연에 의해 왔다 갔다 하는 무상하고 일시적인 대상, 즉 잃어버릴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영원하고 지속적인 대상을 붙잡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보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지속적(semper manes)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 스스로를 위하여, 그 자체로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사랑은 일종의 운동인데 운동이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하여 움직이듯이 사랑 역시 그 지향하는 대상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랑은 언제나 '선'(bonum)을 지향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하다고 한다면 그 선한 존재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더 좋은 것이 있고 덜 좋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사랑 역시 그 선의 계층에 따라 질서를 잡아 나가야 한다. 덜 선한 것은 덜 사랑하고, 더 선한 것은 더 사랑해야 올바른 사랑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은 최고로 사랑해야 마땅하다.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하나님 자신만을 위하여, 하나님 그 자체로서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caritas'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애(聖愛)요, 'amor Dei,' 즉 하나님 사랑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창조주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 세계를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저열한 사랑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만물은 다 선하기에 그 다양한 가치의 위계질서를 지닌 대상들이 아닌, 우리 자신의 사랑의 방향정위가 문제이다. 마치 황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우리의 탐욕이 문제가 되며, 음식 그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우리의 폭식이 문제가 되며, 포도주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로되 우리의 폭음이 문제가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선으로서 존재하는 대상들 그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선을 버리고 덜 좋은 선을 향하는 사랑의 혼선과 도착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사랑의 질서를 잘못 잡아 시간 안에서 덧없이 소멸되고 말, 자신과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cupiditas'라고 부른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일시적인 세상을 즐기려는, 왜곡되고 일탈된 사랑이요, 두려움에 직면한 사랑이다. 이것은 탐욕이며 정욕이며, 'amor sui,' 즉 자기애며 '만악의 근원'(딤전 6: 10)이다. 'cupiditas'가 항시 상실의 위험성을 떠안고 있는 세상을 향한 전도된 사랑이라고 한다면, 'caritas'는 하나님을 계속하여 향유하면서 그 누구도 뺏어 갈 수 없는 올바른 사랑이다. 영원하시고 최고로 선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최고로 사랑하는 것(마 22: 37)이 'caritas'인 것이다. 결국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진 사람이다"(「De beata vita」 2.11: Deum igitur…qui habet, beautus est).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행복자 =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겨 하나님을 가진 사람>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윤리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이다. 정직하게 살며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구분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면 우리는 올바르게 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하면 우리는 올바르게 살 뿐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된다"(「De moribus ecclesiae catholicae 카톨릭 교회의 도덕」 1.6.10).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진 것은 아니므로 윤리적 생활 자체를 행복으로서 간주할 수는 없다. 예컨대 절제, 용기, 정의, 신중, 등등의 덕들이 'cupiditas'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해독제의 기능을 하지만, 이러한 덕성들 자체가 하나님을 향유하여 행복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행복을 얻게 되는 결정적인 방법은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데 있다. 참된 행복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는 정점에는 앎이 있다.


        우리는 갖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는 것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앎으로서 그것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예컨대 셈법, 즉 수학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돈 계산을 하거나 타인에게 셈하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덧셈, 뺄셈 등의 계산법을 배우고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적인 지식은 얼마든지 수학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서도 가질 수 있다. 즉, 수학을 배우기 전이나 배운 후에도 수학 그 자체만을 위하여 알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을 알고 습득할 때 사랑하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인격적으로 선한 것일 때에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고서 그것을 완전히 갖거나 알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을 즐기지 않고서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을 수단으로 해서 어떤 것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을 앎으로서 갖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앎이 항상 사랑 그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경우 사랑 없이 완전히 갖거나 완전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수학의 경우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에 있어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최고선이신 하나님은 완전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다. 결국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앎은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갖는 양태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즐기게 될 때 이 사랑은 '사랑하는 자'(amans)와 '사랑받는 자'(amatum)를 연합해 주며,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을 관조할 수 있는 내적 평화와 안정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곧 행복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이나 주변 환경을 통하여 상실될 위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탈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을 저해할 염려가 없다. 까닭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곧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얻는 것이 행복 그 자체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De mor.」 1.11.18).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caritas'로부터 이탈하여 'cupiditas'로 향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우리의 영혼이 사랑의 방향을 바로 잡아 더 선하고 아름다운 대상을 쫓아 상승 운동을 하지 못하고 덜 선하고 추한 대상을 갈망하여 그 쪽으로 하강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물질이나 인기나 명예나 권세를 더 탐하게 될 때 우리는 'cupiditas'에 빠지게 될뿐더러 참 행복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진실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어거스틴을 따라 "주여,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정돈해주소서!"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그 인격의 크기 역시 그가 무엇을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caritas'를 가졌다는 표시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인 반면에, 'cupiditas'의 저주는 두려움, 즉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과 일단 얻은 것을 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Arendt, 「Love and St. Augustine」, 35).